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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 20년 동안 지칠 줄 모르고 꾸준히 소설을 지어온 성석제의 소설집 2권이 새로 출간됐다. 이들 소설집엔 각 8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한 권엔 초기작을, 다른 한 권엔 최신작을 엮어 놓았다. 작가인생 20년을 돌아보는 듯한 이들 소설집을 비교해 읽으면, 성석제라는 작가의 스타일과 지난 시간에 새겨진 땀방울이 오롯이 읽히는 듯하다.

오늘 여기서 소개할 책은 성석제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각종 문예지 등을 통해 발표한 단편을 모은 <믜리도 괴리도 업시>다. 눈치챘겠지만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유명한 구절을 따서 지은 것으로 실린 여덟 편의 소설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 표지
▲ 믜리도 괴리도 업시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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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은 <블랙박스>다. 발표된 순으로 정렬된 게 아닌 소설집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역할은 프로야구 1번타자의 그것 못지 않다.

<블랙박스>는 동명이인 박세권의 이야기다. 손님과 블랙박스 판매점 점원으로 처음 만난 이들의 관계는 소설가와 그를 동경하는 동네 동생이 되었다가, 스승과 문하생의 관계를 거쳐, 명의 대여자와 대필작가가 되고, 이내 이름을 빼앗긴 자와 이름을 빼앗은 자가 된다.

소설과 소설쓰기를 주요한 소재로 하는 이 소설은 외적으로 반전이 있는 스릴러처럼 읽히고, 한편으론 소설쓰기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녹은 드라마로 읽히며, 때로는 둘 모두 같기도 하다.

<블랙박스>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작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이야기다. 아무리 짜내고 짜내도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작가가 부도덕하지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고 조금씩 금단의 열매를 맛보다가는 그 모든 관계가 폭로될 위기에 처한다는 흔한 이야기다.

성석제는 이 같은 이야기를 예기치 못한 관계로 시작해 집념 있게 끌고가서는 마침내 파국에 가깝게 끝장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소설과 소설쓰기에 대한 도발적인 언사까지 지면 위에 옮겨 놓고 다시 그 스스로 이를 완전히 깨부순다. 성석제에게 소설은 두 박세권의 소설관 사이 어딘가쯤에 있는 듯하다.

"형님, 문학이 별거예요? 그냥 노가리 까고 생각나는 걸 글로 쓰면 문학이지. 문학은 말로만 해도 되니까 과외나 비싼 레슨 받아야 하는 그림이나 음악보다 훨씬 쉽죠."
"너하고 나의 차이가 뭔지 아냐? 너는 문학에 목숨을 건 적이 있냐, 말로만이라도? 나는 그랬어. 내가 너를 잘못 봤다. 이제 그만하자, 우리."
- <블랙박스> 중에서

두 번째 작품 <먼지의 시간>은 방송사 임원인 선배와 그 아내를 태우고 선배의 아내가 숭상하는 현자를 찾아 시골 산속으로 간 사내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어렵게 찾은 현자의 집에서 실은 그 현자가 사이비 교주 정도의 인물이라는 진실과 마주하는데 그 과정이 꽤나 흥미롭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선배의 아내는 역시 배울 만큼 배웠지만 대학시절 그녀에 미치지 못했다던 남편을 끊임없이 무시한다. 그는 자신이 뛰어난 지성인인 것처럼 시종일관 허영에 찌들어 있는데 바로 그 허영 때문에 자신이 숭상해온 정신적 스승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에 비해 자신이 무지하다고 느끼고 이를 만회하려 끊임없이 공부해온 인물이지만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충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같은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며 독자는 우리 내면의 때 묻은 것들, 가령 허영이나 열등감 따위의 것들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 번째 작품은 <매달리다>다. 군부독재 하에서 간첩으로 몰려 삶이 산산조각난 남자의 비극적 인생을 다룬 단편이다. 성석제의 소설 가운데서는 흔치 않게도 무거운 분위기에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배를 타는 게 꿈이었던 소년이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선장이 되어 단란한 가정을 이루기까지의 과정, 다시 간첩으로 몰려 고통받고 그로부터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하는 모습을 동화적이면서도 아프게 그려낸다.

"나는 그때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댁한테 아무 감정도 없었소.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소. 당신을 언제 체포했는지 수사를 했는지 기억도 할 수 없소."

경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 그의 앞에서 그는 과거에 철저하게 고문당하고 세뇌당했을 때의 두려움과 무기력함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진실이고 자신은 미몽 속을 헤매온 것 같았다. 허탈했다. 그는 손발을 벌벌 떨며 턱받이에 침을 흘리는 전직 경찰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흐릿한 눈으로 자신도 밤이면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무능하고 무방비했다. 그의 앞을 떠나면서 그는 "당신을 용서하도록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그게 두 사람 모두에게 무슨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 <매달리다> 중에서

네 번째 단편 <골짜기의 백합>은 가장 성석제다운 소설이다. 그 특유의 이야기짓기 재능이 그대로 보여진 작품으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주인공 여성이 지나온 사연 깊은 이야기가 쭉 흘러나온다. 독자는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마주앉은 것처럼 주인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데, 그 내용이 퍽 기구하고 애절하며 너저분하다.

성석제의 많은 소설이 그렇듯 독특하고 인상적인 끝맺음도 준비돼 있다. 과정과 결과 모두가 쉽게 쓰인 소설이 아니라는 걸 짐작케 하는 결말이다. 세상사 온갖 풍파를 겪은 기구한 인물이 삶에 초연한 듯 담담히 풀어놓는 이야기인데 그 삶의 방향과 속도 모두가 평범치 않아 매력적이다. 그의 이야기가 끝을 맺을 때까지 독자가 얻게 되는 건 그저 잠시잠깐의 재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소설은 표제작 <믜리도 괴리도 업시>다. 동성애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에게 대단한 명성을 안긴 작품 <첫사랑>도 떠오른다. 우정과 사랑과 편견과 두려움과 질투, 다양한 감정과 감정 비슷한 것들 사이에서 성석제는 언제나처럼 힘 있는 이야기 한 편을 완성시켜냈다.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그리 새롭지도 파격적이지도 않은 구성이지만 <첫사랑>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역시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여섯 번째 작품 <사냥꾼의 지도>는 친구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아비뇽연극제에 참가한 작가가 겪는 해프닝을 긴장감 있게 다뤘다. 소설집에 자신의 해설을 얹은 문학평론가 노태훈은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라 이름붙인 이 해설을 통해 '<사냥꾼의 지도>를 읽으면 성석제의 소설들이 어떤 방식으로 주조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석제는 '디테일을 확보하고 개연성을 부여한 뒤 사건을 종결'시키는데 <사냥꾼의 지도>는 이 같은 그의 특성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임에 분명하다.

<몰두>는 8편의 소설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소설은 외삼촌의 거대한 서재에서 세상 모든 지식의 정수를 단 한 권에 담은 책, 즉 '이피터미Epitomi'를 찾아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으로 만약 그가 답을 찾는다면 그는 외삼촌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찾지 못한다면 보잘 것 없는 자신으로 남을 뿐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를 비교적 잘 끝맺는 편인 성석제의 작품 치고는 후반부로 갈수록 내적 완결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야기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동력으로 삼아 출발했기 때문이다. 다만 '최고의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힘만으로 이야기를 밀도 있게 끌고나가는 저력 만큼은 말 그대로 괴수 같다.

"세상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너는 이 책 중에서 어떤 책을 읽겠느냐."
- <몰두> 중에서 

마지막 실린 <나는 너다>는 2016년 10월 경향신문에 발표한 최신작으로 소설의 형식과 스타일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려 하는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다만 실험적인 형식에 비해 참신함이 크지 않고 그로부터 얻는 효과도 대단치 않아 범작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인상이다.

책에 실린 8편의 소설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갖추고 있어 독자들은 이로부터 성석제의 오늘을 다각도에서 살필 수 있다. 여기에 그의 초기작 8편을 모아 새로 출간된 소설집 <첫사랑>과 비교해가며 읽으면 더욱 색다른 감상을 자아낼 게 분명하다.

<첫사랑>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반면 형식이 비교적 일정하고 깊이가 다소 얄팍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성석제의 소설은 어떤 변화를 겪어왔을까. 답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펼쳐보면 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믜리도 괴리도 업시 / 문학동네 / 성석제 지음 / 2016. 10. / 12000원>



믜리도 괴리도 업시

성석제 지음, 문학동네(2016)


태그:#믜리도 괴리도 업시, #문학동네, #성석제,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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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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