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채현국(79)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이 2015년 1월 28일 저녁 진주시청소년수련관 다목적강당에서 진주문고가 마련한 인문강좌에서 강연하고 있다.
 채현국(79)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이 2015년 1월 28일 저녁 진주시청소년수련관 다목적강당에서 진주문고가 마련한 인문강좌에서 강연하고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저절로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2014년 1월, 한 인터뷰에서 채현국 이사장이 한 저 발언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존경할만한 어른과 원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채현국 이사장의 발언은 통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뷰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이 5060 세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또한 박 대통령 당선 이후 '어버이연합'이 출몰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통령은 자신이 표를 얻는데 일조한 '노인복지'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딱 1년 뒤인 2015년 1월, 채 이사장은 한 인문강좌에서 노인 발언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 말은 노인들에 한 경고라기보다 젊은이한테 한 말이다, 자기 삶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노인들은 일제 강점기가 자기 나라인 줄 알고 살았고, 해방된 뒤 이승만한테 속아 가며 살았으며, 박정희가 속이는 대로 살았고, 늙어가면서 속아 산 것도 몰랐다. 자기가 게을러서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버지도 원래는 아들이었다. 인생 쓰레기는 절대 거름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거름이 되고 씨앗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관련기사 : "노인 봐주지 말라는 말은 젊은이들 속지 말라는 뜻")

"박 대통령, 내년 4월까지 하야" 하라는 원로들, 왜죠? 

곱씹을수록, 한국사회가,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되새겨야 할 충고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이승만·박정희한테 속고, "자기가 게을러서 속아 넘어간 것"이란 대목은 뼈아픈 탁견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채 이사장의 발언을 길어 올린 이유가 있다. 바로 어느 '노인'들 때문이다.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에게 "내년 4월까지 하야하라"고 시기를 못박았다. 스스로를 정·관계 원로라고 지칭하는 이들이 그 장본인들이다. 제5차 촛불집회에 190만이 운집했던 그다음날인 어제(2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정·관계, 종교계 '원로'들이 모였다고 한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여야 전직 국회의장 등 정관계 원로 시국 회동이 열리고 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주최한 이번 모임은 김수한, 김형오, 정의화, 강창희 전 국회의장과 이홍구 전 총리 권노갑, 정대철, 신경식,신영균 전 국회의원, 송월주 스님 , 최성규 목사 등이 참석했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여야 전직 국회의장 등 정관계 원로 시국 회동이 열리고 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주최한 이번 모임은 김수한, 김형오, 정의화, 강창희 전 국회의장과 이홍구 전 총리 권노갑, 정대철, 신경식,신영균 전 국회의원, 송월주 스님 , 최성규 목사 등이 참석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주최했고, 20여 명의 원로들이 모였단다. 이들이 내놓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최우선 해법은 "대통령이 사퇴를 선언하고 내년 4월까지 하야"라고  한다. 모인 시기도 늦었지만, 그 방법론들이 꽤나 의심쩍다. 검찰 수사로 인해 "박근혜 구속"으로 업그레이드된 민심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4월로 시점을 못박은 것도 "여야가 대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그때까지 내·외치 모두에서 2선으로 물러난 박 대통령이 증거를 인멸할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은 과도한 걸까?

그러면서 '개헌'을 시사했다. "현 국가적 위기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 여야가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고도 했다. JTBC가 '최순실 태블릿 PC'를 보도했던 그 날까지도 박 대통령이 국면전환용으로 꺼내들었던 그 개헌, 탄핵안을 수용하겠다고 하면서도 김무성 전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내 비박계가 협상용 카드로 내밀고 있는 그 개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발언이 보도된 직후인 오늘(28일) 오전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제안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비박계나 원로들의 주장과 같이, 주도하는 세력을 바뀔 수 있지만 여전히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마치 각본을 짠 듯, 시기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원로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개헌까지 운운... 누가 이들에게 '원로'일 자격을 부여하는가

복수의 매체에 따르면, 이날 모임에 참석한 원로는 20명이다. 주최한 박 전 의장을 비롯해 재임순대로 김수한·김원기·임채정·김형오·박희태·강창희·정의화 전 국회의장, 권노갑·김덕룡·신경식·신영균·유흥수·정대철 전 의원,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 최성규 목사,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 등이 참석했다.

먼저 이 모임을 주최했다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국회 발의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그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핵안을 가결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른바 '박관용 탄핵안'이라 불리기도 했다. '국회의장 임기 후 정계은퇴' 공식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2008년 당시 이명박 당선자의 정책자문위원단으로 활동했고, 2012년부터는 새누리당 상임고문에 직함을 올렸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지난 8월 19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열린 상임고문단 오찬에 참석해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상임고문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김수한 전 국회의장, 박관용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지난 8월 19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열린 상임고문단 오찬에 참석해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상임고문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김수한 전 국회의장, 박관용 전 국회의장.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박희태 전 국회의장 역시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다. 무려 6선 의원인 그는 정치 인생 말년에 이름을 더 드높였다. 2012년 초, 고승덕 전 의원이 폭로한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으로 인해 현직 국회의장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고 불구속 기소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장본인인 박 전 의장은 국회의장직을 사임했다. 2년 후, 그는 "딸 같아서 그랬다"는 유행어를 남긴 골프장 캐디 성추행 사건으로 다시금 국민들의 공분을 산 바 있다.

권노갑·정대철 등 과거 DJ계였던 야당 인사들이 포함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전 국회의장만 놓고 보면, 이날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여타 전 국회의장들이 반대로 신뢰감을 주기까지 한다.

"내년 4월 하야"를 못박고 "개헌"을 주장할 만큼, 이 원로라는 분들이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지 오히려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근거도, 논리도 희박한 원로들의 주장을 경청해야 할 만큼 국민들은 한가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심지어 명단에 이름을 올린 몇몇 정치인들은 정치인 박근혜의 동료이면서, 박근혜 정권을 탄생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기여하지 않았나. 그런 이들이 단순히 '원로'라는 이유로, '노인'이라는 이유로 정국의 어떤 방향타를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박 대통령 하야를 촉구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 번 더 꼬아 본다면, "참석자들 간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개헌'에 힘을 싣기 위한 모임은 아니었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비상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힘은 이 나라 주인인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나옵니다.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일부 정치세력의 국정농단은 단죄하되, 국정운영이 정상화되도록 힘을 모아줘야 합니다. 비상사태를 극복할 초당적 거국내각이 구성되도록 국민여러분이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2일, '국가 안보와 민생 안정을 바라는 종교·사회·정치계 원로들' 22명이 발표한 시국선언 내용 중 일부다. 이들 중 박관용·김원기·임채정·김형오·정의화 전 국회의장과 김덕룡 전 의원 등의 이름은 "내년 4월 하야"를 주장한 원로 모임 참석자와 겹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야나 탄핵으로 국정의 공백을 초래하는 것은 국가의 불행"이라면서 개헌에는 크게 무게 중심을 두지 않았다. 무엇이 이 '원로'들을 움직인 걸까. 하루하루 급변하는 국정 난맥상과 폭락한 박 대통령의 지지율 때문일까.

다시,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2월 23일,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 후 김 전 총리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2월 23일,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 후 김 전 총리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지난 14일, 김종필 전 총리가 <시사저널>과 나눈 인터뷰가 큰 파장을 낳았다. 시기도 시기였지만, 그의 "박근혜 대통령은 5천만 국민이 달려들어 하야하라고 해도 절대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분명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사촌형부이기도 한 김 전 총리가 고 육영수 여사를 비롯해 박 대통령의 내밀한 과거나 성향을 말했기에 파장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동지라 평가받는 그가, 유신정권에서 권력의 근저에 있던 그가, 반성은커녕 박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선 데 대해서는 발언 내용이나 진위와는 별개로 비난이 쏟아졌다. 채현국 이사장의 말을 살짝 빌려 바꿔본다면, "해방된 뒤 이승만이 속이는 대로 살았으며, 박정희가 속이는 대로 사는데" 일조했던 인물이 또한 김종필 전 총리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사회 '원로'를 자처하는 '노인'들에 대한 '불신'이 쌓여가는 시대다. 그것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비롯해 박근혜 대통령의 현재를 만든 원로급 인사들에 대한 불신이기도 할 것이며,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데 일조한 세대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기도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고 했던 채현국 이사장의 충고는 아직도 유효할 듯 싶다.


태그:#채현국, #박근혜, #박희태, #원로, #박근혜
댓글50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