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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들이 맹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도 말세의 한 작태일 것이니"
(셰익스피어, <리어왕>)

최근 어떤이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박근혜가 퇴진하지 않고 임기를 마쳤으면 좋겠다." 그 까닭인 즉슨, 왕도 대통령도 없거나 무력해보이는 지금 같은 시기야말로 행복한 시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주권자의 기묘한 역설을 떠올린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조롱의 대상이 된 '박근혜'는 언뜻 법과 질서의 불능,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상태(destituent)를 지시하는 듯도 하다.

확실히 우리는 일종의 승리감과 확신에 가득차 있다. 이 나라의 대부분의 언론이나 정당이, 또 사람들이 '우리편'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박근혜'는 거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만자라는 사실이 있다. 이 둘이 그 승리감의 원천이다. 100만 명이 모였던 서울 도심에서, 우리는 주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 대 국민의 싸움에서, 늘 패배하던 국민이 압도적인 우세로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승리 그리고, 누군가의 패배

다양한 가면, 피켓 선보인 민중총궐기 거리행진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던 노동자, 농민, 시민 수만명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중태인 백남기 농민이 입원한 대학로 서울대병원까지 가면을 쓰거나 직접 준비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던 노동자, 농민, 시민 수만명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중태인 백남기 농민이 입원한 대학로 서울대병원까지 가면을 쓰거나 직접 준비한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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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취된 승리감 속에 중요하게 간과되는 것이 있는데, 이 같은 승리들이 바로 우리의 패배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4월 있었던 총선을 "유권자의 승리"로, 또는 현 시국을 특정 언론사로부터의 승리로 그리려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니, '우리'가 언제 패배했냐고? 세월호로부터 "이윤보다 인간"인 나라를 '인간이 절감해야 할 비용이자 재료가 아닌' 나라를 만들려는 투쟁, 비정규직 확대로부터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 수천 번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수만 번 잘려나간 사람들의... 이들의 드러나지 못한 패배는, 표를 위해 여성을 미디어 상품화하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한 선거를 '승리'라고 반복하여 되뇌이는 이들의 눈과 귀에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리고 다시 집에서 나올 때, 어쩌면 돌아갈 곳조차 사라져갈 때, 패배는 매번 경험되는 무엇이다.

스스로가 시대의 물결을 타고간다는 생각만큼 우리를 쉽게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 모든 미디어적 스펙타클의 조명과 함께 '박근혜'와의 주권적 싸움에서 승리해 나간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잘' 작동하고 있는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장기간의 철도파업 중에도 전철은 대체인력을 고용하여 불안 속에 굴러가고 있고, 최저임금은 여전히 그리고 내년에도 6000원 남짓이며, 사람들은 궁핍 때문에 삼각김밥을 찾고 보일러 대신 전기담요를 켜고, 그에 못이겨 때때로 삶으로부터의 출구를 찾곤 한다. 그리고 체념적인 어투로 말하자면, 이것이 원래 세상이 굴러가던 방식 그대로였다.

상속자들

자,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진실'이라고 소리쳐대는 것이 밝혀지기 전 3년 넘게 이 국가가 잘 작동해왔다는 것을 알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최순실'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그리고 노무현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가는 바로 지금과 같이 잘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늘 땔감과 윤활유가 필요한 법이고, 그 엔진에 쏟아부은 것은 우리의 매일매일이었다. 이 땅에 군림하는 왕은 변화했지만, 통치는 변화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일자리의 양분 즉 비정규직화를 공식화했고,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 확대를 가속화하고 연금을 대폭 깎았다. 우리가 받게 될 연금을 깎았던 장관 유시민은 정의당에 있고, 기업의 악의적인 노동조합파괴의 주요한 수단 중 하나인 복수노조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추미애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 있다.

이명박 정부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훌륭한 상속자들에 불과했다. 그동안 여성은 일-가정 양립이라는 미명 아래, 일-가정의 양측 노동을 동시에 저렴하게 분담 없이 수행하도록 강요 받았고 이를 위한 비정규직 일자리 중 일부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라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성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절반에 달하고, 동시에 맞벌이의 경우에도 여성이 5배나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을 쓰는 현실은 그로부터의 필연적인 귀결들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

우리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아주 흔한 대답을 마주하게 된다. 그 문제들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서, 다른 대안은 없다고. 우리는 다시 질문한다. 이 국가의 최고주권자라고 불리는 이와 대등한, 아니 압도적인 싸움을 벌이려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예외가 된 박근혜, 그리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지배의 상태는, 지배의 특정한 결함이나 공백을 그 지배의 예외적 상태라고 공언함으로써, 그 결함을 자신이 아닌 자신 바깥의 특성으로 만들고, 그 지배를 이어나간다. '박근혜'라는 예외는, 이 땅에 미치는 지배의 상태에 있어 '실수'나 '일탈'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어떤 이들은 계속해서 주장한다. 그리고 10년 전으로부터 온 '군림하는 자'를 세워 통치할 것을 요청하고, 그렇게 승리의 역사를 재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역사로부터 온, 우리들의 패배, 그 역사들은 다르게 주장한다. 그것들은 '단지 박근혜만을 군림의 자리에서 제거함으로써 되돌아갈' 그 정상적인 상태가 바로 우리들의 삶을 담보로 한 예외상태였다고 증언한다. 근래에 '헬조선'이나 청년실업과 같은 말이 크게 떠돌았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은 말로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되돌아 갈 '좋은 시절'이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박근혜'를 한없이 예외로 만드는 담론 끝에 결정화되는 것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열망이다. 따라서 집회 현장에서 법과 질서에 대한 강박이 만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물질과 같은 박근혜' 이외에 어떤 것도 찾지 못하게 되며, '무엇이 박근혜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도, '무엇이 박근혜가 탑승한 역사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도 던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보호되는 그것은 누구의 사회인가? 지금 이대로, '어떤 이들의 승리, 그러나 우리의 패배인 역사'를 써온 지배는 계속 이어갈 만한 것인가?

물론 박근혜는 분명히 퇴진해야 하며, 박근혜와의 정경유착을 통해 '승리의 역사'를 구가한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과 정부 관계자들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고 처벌 해야 한다. 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투쟁을 짓밟고 살인까지 저지른 정권과 경찰도 처벌 받아야 하고, 집회에 관한 지금과 같은 억압 역시 철폐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으로부터 우리는, 잠시 멈춘 그들의 역사를 재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쓰여질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구체제의 구성원인 그들이 착취와 불평등과 차별 그리고 빈곤이라는 이름의 '승리'를 상속하려고 할 때, 우리는 평등과 자유 그리고 해방이라는 이름이 묻힌 '패배했으나 승리할 싸움'을 상속하면서. 우리의 삶은, 우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자들이 벌이는 궁중암투의 패로 소모하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다.

'우리'가 주권자임을 믿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는 '광인들'이 '맹인들'을 이끈다고 전해진다. '최순실'을 비롯한 소수의 탐욕스런 비정상인들이 정부 관료와 기업들을 잘못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 반대다. 정부 관료와 기업의 반사회적 성격과 유착은, 국가적 실패와 삶의 탄식들이 형성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었다. 우리의 삶이 파국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이익과 성과들을 챙겼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 있다. 근본적 대안이나 그에 따른 큰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을 꾀는 광인들의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분명 그러한데,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추진하는 일은 광인들이나 하는 비웃을 만한 짓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광인이 되기를 주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바로 그 광기가 품은 이성을 믿는다면, 무엇보다도 옆에 있는 '우리들'이 그 생물학적이거나 사회적인 특성과 상관 없이 틀림없이 '주권자들'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광인이 되어 새 시대의 길을 그려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되찾아올 삶의 주권은, 박근혜를 위시한 상속자들 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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