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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귀촌했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여주에 사는 동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근처에 싸게 나온 땅이 있는데 보러 오겠느냐고. 일단 가본다고 했지만 맨땅에다 집 짓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편 은퇴 후에 서서히 알아봐야지, 막연할 생각 뿐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무심코 인터넷 검색창에 '여주 부동산'을 찍어보았다. 어느 부동산 블로그가 뜨면서 매물 사진들에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 실물을 보는 듯 그림이 잡혀왔다. 집 몇 채를 골라잡았다. 희망이 치솟았다. 우리 아파트를 팔아 300여 평이나 되는 땅을 살 수 있다니.

부동산에 가서 우리 사정을 설명했더니 1순위로 찜해 놓은 집을 권했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그나저나 아파트를 어떻게 팔지?' 몇 년 동안이나 팔리지도 않던 아파트였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잠시 보류시켜 놓은 상태였다.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 걸까... 여기서 살고 있다.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 걸까... 여기서 살고 있다.
ⓒ 송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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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부풀고 달아올랐다. 다짜고짜 지인들에게 집 사진을 전송하며 통사정했다. 각자 믿는 신의 이름으로 빌어달라고. 꼭 우리 집이 되게 해달라고. 여러 사람들의 기도가 통했는지, 간절한 소원을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었는지는 몰라도, 나흘 만에 계약이 성사됐다. 이틀 후 주말에 원하는 집을 계약했다.

일주일 만에 집을 팔고 사다니! 기적이었다. 땅 보러 오겠냐고 했던 친구는 어이없어 했다. 시세도 모르고 바가지나 쓴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동창 카톡방에는 이런 글을 올렸다.

"얘들아, 정순이가 땅 보러 오랬더니 글쎄, 고구마 사듯이 집을 한 채 턱 사놓고 올라갔다."

칠흑같은 촌의 밤... 안착한 기분이다

두어 달이 경황없이 지나갔다. 큰딸의 결혼식을 치렀고 작은 딸은 방을 얻어 분가시켰다. 앞뒤 잴 것 없이 저질러 놓고 보니 그제야 심란해하는 작은딸이 보였다. "나는 어떡하라고"라는 말과 함께.

이삿짐을 정리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누웠다.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적막했다. 낯선 오지에 펜션을 얻어든 느낌이었다. 그동안 이사를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열한 번째까지 헤아리다 잊어버렸다. 이전 아파트에서만 내 집이랍시고 13년이나 살았다. 넌더리를 내면서도 별 도리 없어 살아냈다. 이제는 편안하다. 격랑의 바다를 표류하다 항구에 안착한 기분이다.

전에 살던 지역은 내 고향이다. 신도시로 변해 고향의 흔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을 보냈고 취학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결혼 후에는 서울에서 버틸 형편이 못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30년 이상을 살아온 고향이다. 그런데 어떻게 간단히 떨쳐버릴 수 있었을까. 오랜 지기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작별을 아쉬워하는데, 나는 어찌 일말의 미련도 없이 훌쩍 떠나올 수 있었을까.

우리집 터앝(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 소원이 이뤄졌다.
 우리집 터앝(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 소원이 이뤄졌다.
ⓒ 송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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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곳에서 땅 밟으며 살고픈 마음이 더 절실해서였을까. 조그만 밭을 얻어 푸성귀를 일궜는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다녀야 했다. 잡초를 뽑거나 호미질을 하다보면 잡념도 사라지고 마음이 말갛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무아지경이었다. 그때의 소원이 오직 '터앝'(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이었다. 내 집 울타리 안에 조그만 밭이 있어 아무 때고 호미질 할 수 있는 곳. 아파트 생활은 견디기 힘든데 마당 있는 집은 언감생심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데다 수면장애가 심한 나는 속수무책으로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여보 마늘 좀 찧어줘요. 이제 쾅쾅 찧어도 돼. 의자를 마구 끌어당겨도 괜찮아."

선심 쓰듯 흔쾌한 명령이다. 마늘을 찧으려면 플라스틱 절구통 아래 방석을 몇 겹 받치고도 살살 찧어야만 했다. 식탁의자에 앉으면서 의자를 끌어당기면 나도 모르게 잔소리부터 튀어나갔다. 살짝 들어내 앉으라고. 문 여닫을 때도 살살, 발걸음도 살살.

약간은 심심하고 지루했던 긴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이 됐다. 복수초를 시작으로 크로커스, 할미꽃, 수선화 등 온갖 꽃들이 피어났다. 꽃을 좋아하고 아끼던 전 주인 덕분에 갖가지 꽃들의 향연을 거저 즐겼다. 매일 말랑한 흙을 밟고 만지며 꽃길을 걸으니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바로 지금인가 싶었다. 그동안의 간난신고를 상쇄하고도 넘칠 만큼의 충만감이었다.

귀촌한 남편은 늘 분주하다.
 귀촌한 남편은 늘 분주하다.
ⓒ 송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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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손재주가 많은 남편은 종일 안팎으로 들락거리며 종종걸음 친다. 닭장을 짓고 여러 번 병아리들을 부화시켰다. 암탉이 품어 낳은 병아리들도 어느새 닭으로 자라났다. 어미 날개 속에서 얼굴만 삐죽 내밀고 있는 병아리들은 보고 또 봐도 새롭고 신기했다.

남편은 말이 많아졌다. 병아리들을 한 마리씩 저울에 올려놓고는 몇 그램이라느니 아주 잘 먹는다느니 떠벌린다. 나는 "나도 잘 먹는다고! 내 몸무게는 궁금하지도 않지?" 하며 비아냥거린다. 밥 먹을 때나 술 마실 때 외에는 입도 떼지 않는 사람인데 말문이 터졌다. 궁금해 하지도 않은 사항들을 자상하게도 알려준다. 어제는 달걀을 쉰여섯 개나 넣을 수 있다며 큰 부화기를 만들어놓고는 흐뭇해한다.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

많은 지인들이 다녀갔다. 인사치레로 오기도 하고 전원생활이 궁금해서 찾아오기도 한다. 귀촌의 꿈은 품고 있지만, 막상 떠나자면 이런저런 상황으로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귀농귀촌인의 인터넷 카페를 기웃거리며 알아보곤 했으니까. 만사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 결국 우연에 끌려 이곳으로 왔다. 운이 좋았다.

마음에 꼭 드는 시골스러운 마을이다. 언덕 같은 뒷산은 남의 종산이라 오가는 사람도 없이 고즈넉하다. 집앞 개천에는 온갖 풀들이 뒤섞인 채로 자연스럽다. 나는 지금 다락방 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동네를 눈으로 쓰다듬고 있다. 근래에 만든 다락방이다. 세찬 바람 한 줄기가 나뭇잎들을 휘몰아 간다. 어제 다녀온 도시는 단풍색이 화려하던데 여기는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날씨다. 11월 중순 김장철이다.

고즈넉한 풍경.
 고즈넉한 풍경.
ⓒ 송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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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는 조카네 가족이 장모님을 대동하고 김장하러 오기로 했다. 조카의 장모님과 어린 두 딸은 우리 집에만 다녀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두 딸이 생떼를 쓸 때마다 큰일 났다고, 여주 할머니댁에 못가겠다고 을러대면 냉큼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진다니 여주 할머니는 힘이 세졌다.

어느 시인은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면서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 그곳이 고향'이라고 했다. 나는 정처 없이 떠돌고 악머구리 끓듯 시끄럽던 내 마음을 받아주고 편히 쉬게 해주는 '여기'가 고향 같다.

엄마의 예언대로 말년 운이 좋을 모양이다. 신산스러운 딸의 생활이 안타까웠는지, 턱이 잘 생겨 말년 운은 좋을 거라며 위안하곤 하셨다. 관상을 좀 볼 줄 안다는 엄마의 지론에 따르면 이마는 초년이고 눈과 코는 중년이며 턱이 말년 운이라고 했다. 그러니 난 턱만 믿고 살기로 했다. 남편한테도 내 턱만 우러러보며 따라오라고 흰소리 쳐댔다. 곧 환갑이 다가온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말년의 시작인가. 새로운 시작이다.


태그:#귀촌, #시작, #농촌, #여주,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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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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