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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가 펴낸 <대구 경북 친일 행적>의 표지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가 펴낸 <대구 경북 친일 행적>의 표지
ⓒ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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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지부장 오홍석)가 대구 경북 친일파들의 행적을 파헤친 <대구 경북 친일 행적>을 펴냈다(256쪽, 비매품).

지난 11월 3일 발간된 이 책은 '대구 경북 지역 친일 인명 사전 수록자 206명에 대한 기초 정보와 지역별 분포', '주요 친일 인물 72명의 개인별 행적에 대한 해설', '친일파를 옹호하는 열 가지 궤변', '친일 인명 사전, 이것만은 꼭 알아야', '친일 인명 사전 Q&A'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책은 부록으로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의 <종북 놀음과 '박정희 혈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건국절' 주장은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교과서의 사유화이자 온 국민의 국정화이다>, 여은경 언론인의 <'대구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맥락과 편향>, 허종 충남대 교수의 <자신의 제자까지도 고문한 친일 경찰, 서영출>, 임종금 경남도민일보 기자의 <무법천지 시대 희대의 악인 이협우> 등을 실었다.

친일파, 대구 출생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달성, 상주, 안동 순

대구 경북 일원 친일파들의 확인된 출생지를 보면 대구가 19명으로 가장 많고, 달성, 상주, 안동 각 7명, 문경 6명, 예천, 성주, 김천(금릉), 영주(영풍) 각 5명, 칠곡, 고령, 선산, 영천 각 4명, 경산, 영일, 의성, 경주(월성) 각 3명 순으로 이어진다. 그 외 청도, 봉화 각 2명, 영덕, 청송 각 1명의 분포를 보여준다. 대략 인구가 많은 곳에 주요 친일파도 많이 태어난 이 수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 경력별로는 군수가 약 57명, 검사, 판사, 고등경찰이 약 46명으로 가장 많고, 그 외 일제의 허수아비 대의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자가 약 26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중추원 경력을 가진 자 중에서는 부의장까지 지낸 박중양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박중양은 1906년과 1907년에 걸쳐 대구읍성을 파괴한 인물이다. 당시 외국인은 성내에서 상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법 개정까지 할 수는 없었던 대구 거주 일본인들은 대구군수 박중양에게 읍성을 붕괴시켜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 증대를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중양의 대구읍성 파괴 신청을 받은 조선 조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박중양은 '이토의 수양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일파답게 임의로 성벽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상식적으로 박중양은 참형에 처해질 만한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이토라는 '빽'을 가진 박중양은 평안북도 관찰사로 승진했고, 다시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금의환향'했다. 박중양은 해방 이후에도 "대구가 가장 살기 좋다"면서 대구에 주저앉아 살았다.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중 한 명인 박중양은 금호강 하류의 야산 침산을 사유지화한 후, 산에 봉우리가 다섯 개 있는 데 착안하여 이름을 오봉산으로 바꾸었다. 그 후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의 활동에 힘입어 오봉산이라는 이름은 다시 침산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침산 정상에 있는 침산정의 저물 무렵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도 산 아래 오거리는 여전히 '오봉 오거리'로 불리고 있다.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중 한 명인 박중양은 금호강 하류의 야산 침산을 사유지화한 후, 산에 봉우리가 다섯 개 있는 데 착안하여 이름을 오봉산으로 바꾸었다. 그 후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의 활동에 힘입어 오봉산이라는 이름은 다시 침산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침산 정상에 있는 침산정의 저물 무렵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도 산 아래 오거리는 여전히 '오봉 오거리'로 불리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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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은 대구 북구 침산을 사유지로 만들었다. 침산은 신천과 금호강의 두물머리 경치를 발치에 두고 있는 명승지로,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작은 야산이다. 침산을 차지한 박중양은 산 이름을 오봉산으로 개명했다. 그 이후 대구사람들은 침산을 오봉산이라 불렀다.

박중양이 1959년 '자연사'하자 그 후손들은 침산에 '일소대'라는 이름의 박중양 묘역을 조성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1996년 3월 7일, "침산공원 내 친일파 박중양 묘소 기념비 '일소대' 철거 요청"을 대구시에 제출했다. 그리고 8월 15일, 일소대 앞에 '친일파 박중양 친일 행위 안내판'을 설치했다. 그러자 박중양의 후손들은 스스로 일소대를 철거하고 무덤을 이장해갔다.

친일파 박중양의 묘소 기념비를 철거한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대구 경북 친일 행적>은 특히 고원훈, 곽종원, 권상로, 권혁주, 김구현, 김동화, 김두하, 김문집, 김병태, 김성범, 김시두, 김영호(의성), 김우현(영풍), 김원근, 김장섭(영일), 김재환(대구), 김찬욱, 김한목, 남학봉, 문명기, 박을수, 박일경, 박정순, 박정희, 박중양, 박해령, 백년설, 서병조, 소진은, 손홍원, 신경균, 신기석, 신봉균, 신현구(달성), 양재하(달성), 엄민영, 오국영, 오완수, 유재기, 이각종, 이구범, 이상호, 이승한(영주), 이완종, 이용구, 이인기, 이종태(김천), 이충영, 임문석, 장기상, 장덕조, 장도환, 장상철, 장우식, 장지연, 장직상, 장철수, 장혁주, 정교원, 정충원, 정해붕(대구), 조진만, 진태구, 천규문, 최명하, 최봉달, 최석현, 최항묵, 최해필, 현석호, 현제명, 황종률(대구)의 친일 행적을 개인별로 소개하고 있다.

이들 중 뒷날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일진회 회장 이용구, 여러 대의 비행기를 일본 군대에 헌납한 문명기, 징병에 적극 지원하자는 내용의 <혈서 지원> 등을 부른 <나그네 설움>의 대중가요 가수 백년설이 특히 유명하다. 현제명은 음악가, 징용 찬양 영화 <감격의 일기> 등을 만든 신경균은 영화감독이다. 일본 국가를 아악으로 편곡한 이종태는 1966년 국방부 국립묘지관리소장을 역임할 때 보국훈장을 받았고, 사망 후에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고향 사람 200명 살육하고 국회의원 3선 역임

임종금의 <무법 천지 시대 희대의 악인 이협우>도 우리 현대사의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보여준다. 경주 청년 이협우는 고향에서 일제의 면서기를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대구에서 10.1 사건이 일어나자 이협우는 우익단체의 핵심에 섰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을 아우른 내남면 대한청년단장이 된 그는 현직 경찰을 부하로 거느렸다.

1948년 3월 15일, 이협우는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주민 정우택을 살해한다. 이협우 일당은 유칠우와 유찬조를 남로당원이라며 총살했고, 이어 그 가족 6명을 불에 태워 죽인다. 그런 식으로 이협우 일당은 1950년 8월까지 169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이는 4.19 직후 유족회에 공식적으로 신고된 인원일 뿐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협우는 1950년 5월 30일 대한청년단 후보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된다. 그해 7월 22일, 이협우 일당은 노곡리에서 최현호 씨의 일가친척 22명을 학살한다. 8월 11일에는 망성리에서 권씨 일가 45명을 죽인다. 그러나 이협우는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 당선되고, 자유당에 입당한다.

1958년 선거 때, 이협우는 권총을 들고 다니며 선거 운동을 했다. 이협우는 42.81%나 득표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유족들은 이협우와 그의 친척 동생 이한우를 살인 등의 혐의로 대구검찰청에 고소한다. 그러나 1961년 5.18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유족들은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구속된다. 1963년 5월 15일,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거친 이협우는 자유의 몸이 된다.

"식민지 역사 박물관 함께 세워요!"


<대구 경북 친일 행적>은 '친일파에게 민족은 없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오홍석 대구지부장은 "친일의 부끄러운 기록, 해방을 일궈낸 독립운동의 역사, 역사왜곡에 맞서온 시민들의 투쟁,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힘써온 한일 시민들의 연대를 우리는 제대로 기록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민문연은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라면서 "대구지부도 <대구 경북 친일 행적> 발간을 계기로 북콘서트를 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운동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문연의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운동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07년부터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운동을 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시민의 힘으로 일궈낸 과거 청산의 역사를 기록하며,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역사교육 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 설립 취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시민들의 기증과 자체 수집을 통해 3만여 점에 이르는 고서적, 고문서 등 다양한 박물 자료를 수집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자료를 기증, 기탁, 대여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모으고 있다. 어떤 자료를 어떻게 모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과 전화 02)969-0226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건립 운동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성금 액수는 참여자가 자유의사로 정하면 된다. 특히 10만 원 이상을 내면 발기인이 되며, 박물관 건물에 발기인 명판을 부착하고, 평생 무료 입장권(가족 포함)을 부여하는 등 혜택을 준다. 박물관 개관 예정 시기는 2017년 8월이다.

덧붙이는 글 | <대구 경북 친일 행적>에 대한 문의는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053)753-0226



태그:#민족문제연구소, #오홍석, #식민지역사박물관, #대구경북 친일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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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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