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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두 달을 지냈다. 내 주소가 생겨서 인터넷 쇼핑도 하고, 한국에서 소포도 받았다. 몰타에서는 정말 현지인처럼 지냈다. 무시무시한 몰타의 햇볕 때문에 생활뿐만 아니라 외모도 현지인처럼 되었다. 어학원에서 처음 만난 한국 학생들 누구도 나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햇볕이 내리쬐는 큰길을 피해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이어진 지름길을 찾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즉, 떠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음 목적지는 독일이다. 그토록 기대했던 북유럽 캠핑카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유럽에서 물가가 가장 저렴한 독일에서 캠핑카를 빌리고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독일로 가기 전에 영국을 경유해야 했다. 이유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가입한 '솅겐 조약(Schengen agreement)' 때문이다. 이 조약에 의해 솅겐 비 가입국인 대한민국 국민은 솅겐 지역 내에서의 체류 기간이 제한되어 있다. 일반적인 규칙에서는 최초 입국한 날부터 헤아려 180일 이내에 최대 90일간의 체류가 인정된다. 나는 그리스 여행을 시작으로 몰타에서 두 달간 어학연수를 했기 때문에 체류 기간 90일을 거의 다 소진했다.

몰타의 학생비자는 솅겐 지역의 체류 일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몰타에서 머무는 기간을 연장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학연수가 끝나고 유럽 여행을 계속 이어가는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기간 유럽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 솅겐조약 때문에 여행 일정 짜는 것이 늘 복잡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늘 화두였다. 과거에는 비 솅겐 지역으로 이동한 후 다시 유럽으로 들어오면 자동으로 90일 여행 비자가 발급됐지만, 지금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솅겐 가입국 중 솅겐 조약보다 '양자사증면제협정'을 우선 적용하는 나라를 이용하면 된다. 양자사증면제협정이란, 협정을 체결한 양국의 국민이 상대 국가에 1회 입국 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을 60일, 90일 등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관광비자, 무비자 등이 그것이다. 독일은 솅겐 가입국이지만 출국 시 체류 기간을 계산할 때 양자사증면제협정을 우선 적용한다. 유럽 체류가 90일이 지났더라도, 독일에 입국한 지 90일이 넘지 않으면 출입국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솅겐 조약에 따른 90일을 거의 다 소진한 시점에서 영국으로 갔다. 솅겐 지역 내에서는 국가 간 이동 시 여권에 출입국 기록을 하지 않아 비 솅겐 국가인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독일로 입국해야 여권에 입국 도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독일 입국일로부터 90일간 체류를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독일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솅겐 조약 가입국이기 때문에 90일간 자유롭게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출국도 독일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출국을 하면 당연히 독일의 양자사증면제협정을 우선 적용받을 수가 없다. 그때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꼭 알아둬야 할 솅겐 조약과 양자사증면제협정

독일에서 캠핑카를 빌려서 한 달간 북유럽 3개국을 여행하고, 남은 두 달은 서유럽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루트 덕분에 계획에 없던 런던 여행도 포함시킬 수 있었다. 또 몰타에서 영국으로 가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가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서 갔기 때문에 취리히 시내 관광도 즐겼다. 덕분에 몰타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5일이 걸렸지만,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정신없이 복잡했던 일정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문제가 생겨버렸다. 런던에서 탄 벨기에 항공 비행기는 베를린으로 가기 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번 갈아타야 했다. 시간은 많고 예산은 빠듯한 여행자에게 경유란 일상과 같다. 브뤼셀에서 베를린행으로 갈아타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허걱! 입국 수속을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유편은 공항에 내려 수하물 검사만 하고 바로 다음 비행기에 탄다. 경유 국가에 입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국 심사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솅겐 지역은 달랐다. 벨기에서 잠깐 경유를 하더라도 벨기에를 솅겐 지역 최초 입국 국가로 인정하고 입국 심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벨기에에서 입국 심사를 해버리면 독일에 입국할 때에는 입국 심사를 받지 않는다. 입국 심사를 받지 않는 것은 모든 여행객이 바라는 바겠으나, 독일에서 출국할 예정인 나는 '양자사증면제협정' 우선 적용을 위해 독일의 입국 심사를 반드시 받아야 했다. 그게 독일 입국일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벨기에를 거쳐 독일 베를린 테겔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벨기에에서 독일로 왔기 때문에 모든 승객은 아무런 입국 심사 없이 공항 내로 들어왔다. 수하물을 찾아들고 공항 직원에게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문의를 하니 이 사람들은 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유럽 내 이동이기 때문에 입국 심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밖으로 나가란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밖으로 나갔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쪽에서도 이미 벨기에에서 입국 심사를 했는데 대체 왜 그러냐고 되묻는다. 우리말로 설명해도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영어로 하려니 막막했다. 어쨌든 입국 도장이 꼭 필요하다고 했더니 공항 내 경찰서로 가보란다. 경찰서는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입국 도장을 받지 못하면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솅겐 조약을 어기고 체류하다가 출국한 사람들의 경우를 알아보니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었다. 각국 출입국 심사관에 따라서 훈계로 끝날 수도 있지만 2000유로 벌금을 낸 예도 있었다. 강제 추방 형식으로 차후 유럽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예 양자사증면제협정 우선 적용이 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해당 문서를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영문 문서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입국 도장을 받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이 허사였다. 반드시 여권에 도장을 받아야 했다.

이번엔 경찰서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를 하는 경찰관들이 근무하는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커다란 철문이 닫혀 있고, 무장한 경찰들이 경찰견을 데리고 들락거리는 무서운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법 체류가 더 무서웠다. 벨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덩치가 백두산만 한 경찰관이 나왔다. 상황을 설명을 쭉 듣더니 'I can't speak English(나는 영어를 못해요).'란다. 그렇게 경찰서 앞에 서서 죄인마냥 기다리니 영어를 할 줄 아는 경찰관이 나왔다. 여차여차 설명을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You don't need stamp(너는 도장이 필요 없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보니 설명도 어렵고 그냥 무조건 방금 도착했는데 입국 도장이 필요하다고 제발 도와 달라고 빌었다. 경찰관이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살펴보며 몇 번을 사무실로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드디어 벨기에 입국 도장 옆에 같은 날짜로 베를린 입국 도장을 찍어 주었다. 스탬프에 선명하게 입국 날짜가 찍힌 것을 확인하고 "Danke schön(고맙습니다)."을 몇 번이나 외쳤다. 독일 출국 시 양자사증면제협정을 적용 받을 근거가 생긴 것이다.

핀란드행 비행기 탑승 거절 당한 지인의 사례

다음날 베를린에 있는 한국 영사관을 찾아갔다. 몰타에는 한국 대사관이 없기 때문에, 몰타에서 처리할 수 없던 일들을 챙겨 난생처음 외국에 있는 대사관(정확히는 영사관)을 찾아갔다. 몇 달 만에 보는 한글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영사관에서 근무하는 분에게 나의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다. 유럽 내에서는 무조건 솅겐 조약을 따라야만 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발행한 문서를 보여줘도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행객 처지에서는 외우기도 어려운 '양자사증면제협정 우선 적용 국가'라는 긴 단어를 채 말하기도 전에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유럽 체류일이 90일을 초과하면 불법 체류니까 얼른 나가란 말만 들었다. 유럽 체류에 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대한민국 영사관에 문의했는데 결국 마음만 상하고 나왔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 떠올랐다. 정말 불친절했다. 불친절함을 떠나서 양국의 비자 협정에 관한 문의인데 무조건 모른다는 대답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주된 업무 아닌가? 영사관을 나와 생각나는 육두문자를 모두 내뱉었다.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각국 영사관 게시판을 통해서도 이와 관련한 내용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래도 캠핑카를 타고 북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비자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독일에 있는 영사관에서도 안 된다고 하는데 출국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북유럽 캠핑카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왔는데 급하게 한국으로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서둘러 출국 준비를 하고 테겔 공항 출국장으로 향했다. 한 달 후에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비행기 표를 들고서 '이대로 영원히 유럽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불안해했다.

출국 심사대에 섰다. 여권을 내밀었다. 보통은 솅겐 조약 때문에 심사관이 최초 유럽 입국 국가와 날짜를 물어본다. 그리고 날짜 계산을 한 후에 문제가 없으면 스탬프를 찍어준다. 이번에도 질문에 답할 준비(솅겐 조약과 양자협정에 관한)를 하고 긴장한 채 서 있는데 심사관은 그런 내 기대를 무너뜨리며 무심하게 쿵! 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빠지고 한숨이 나왔다. 무조건 안 된다고 했던 영사관 직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양자 사증 면제협정 우선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 출입국 기록이 반드시 필요하다.
 양자 사증 면제협정 우선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 출입국 기록이 반드시 필요하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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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솅겐 국민의 유럽 체류에 관련해서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대답이 달랐다. 대체로 출입국 심사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대답을 많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한 달 후 다시 독일로 입국할 때도 문제였다. 180일 이내에 최장 90일 체류라는 솅겐 조약에 따르면 나는 마지막 출국일로부터 180일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입국(정확하게는 유럽 입국)이 거절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역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한 달 후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입국 심사관은 나에게 "90일 이상 머무르면 안 되는 것 알지?" 하고 물었다. 적어도 독일 출입국 심사관은 솅겐 조약과 양자사증면제협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독일 영사관에서 만났던 한국 직원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번 경우에도 나는 유럽 여행 후 출국은 반드시 독일에서 해야 한다.

최근에 한국에서 솅겐 조약과 관련하여 다른 이야기를 들어서 이 글에 보태야겠다. 몰타에서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6개월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는 다시 유럽 여행을 위해 핀란드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비행기 티켓을 사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탑승 수속에서 문제가 생겼다. 솅겐 지역 마지막 출국일로부터 180일이 경과되지 않았기 때문에 핀란드행 비행기에 탑승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준비하면서 비자 문제는 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였다. 특히 유럽을 장기간 여행할 때는 여행 일정을 계획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래 표는 솅겐 조약 가입국과 양자 사증 면제협정 우선적용 국가 명단이다. 여행할 국가의 비자 정책을 미리 확인하고 행복한 여행을 준비하자!

유럽 여행을 준비할 때에는 솅겐조약 우선국가와 양자사증면제협정 우선국가를 꼭 확인하자.
 유럽 여행을 준비할 때에는 솅겐조약 우선국가와 양자사증면제협정 우선국가를 꼭 확인하자.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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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솅겐 조약 관련 안내(www.0404.go.kr/consulate/visa_treaty.jsp)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유럽여행, #솅겐조약,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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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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