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개업 축하 난에 적혀있을 법한 흔한 성경 구절이다. 하지만 <구르미 그린 달빛>(아래 <구르미>)의 시작과 끝을 표현하는 데 이만한 문구가 또 있을까? 첫 회 시청률 8.3%(닐슨코리아). 쟁쟁한 경쟁작에 밀려 동시간대 꼴찌로 시작한 <구르미>는 3회 만에 같은 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월화병'도 없애줬다는, '화초 저하 앓이'가 시작됐다.

26일 서울시 종로구 한 카페에서 '화초 저하' 박보검(23)을 만났다. 그는 <구르미>를 "달만 봐도 생각날 것 같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찬란한 작품이었다"고 표현했다.

첫 주연, 첫 사극

박보검, 응답하라 저주가 뭐에요?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보검은 <구르미 그린 달빛>을 "달만 봐도 생각날 것 같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찬란한 작품이었다"고 표현했다. ⓒ 이정민


박보검, 응답하라 저주가 뭐에요?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물음표가 많았던 박보검의 캐스팅. 하지만 그는 모든 우려를 놀라움으로 바꿔놓았다. ⓒ 이정민


<구르미>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박보검 캐스팅에 물음표가 더 많았다. 지긋지긋한 '<응답>의 저주'를 차치하고라도, 경쟁작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의 꽃미남 8황자와 홀로 맞서기에, '박보검' 이름 세 글자는 너무도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전작 <응답하라 1988>을 통해 박보검의 스타성과 연기력이 어느 정도 증명되기는 했지만, 첫 남자 단독주연, 게다가 첫 사극이었다.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딱 그만큼 책임감도, 압박감도 커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자꾸 "혼자 뭔가 해보려 하기도 했다"고. 부담을 떨치지 못하니 자연스러운 연기도 어려웠다. 그때 <응답> 첫 회 방송 전, 신원호 감독의 말이 떠올랐단다.

"신원호 감독님이 젊은 배우들 모아두고 '모두가 주연이다. 각자의 히스토리가 있으니 모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더라고요. '아 그래, 내가 혼자 뭘 이끌려고 하니 부담돼서 신경이 쓰인 거구나!' 싶었죠.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 저 혼자 뭘 해야 하는 게 아닌데…. 그때부터 부담감을 덜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영의 고단한 삶... 표현하기도 고단했다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왕세자 이영의 삶에는 걸림돌이 너무 많았다. 20부작 드라마 안에서 왈가닥 왕세자가 의젓한 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만 담아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정치도 사랑도, 어느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다. 이영의 삶이 고단한 만큼, 그를 표현해야 하는 박보검도 고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대본 읽을 때부터 기존 왕세자 캐릭터와 다른 이영의 모습이 너무 매력 있었어요. 색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렵더라고요. 장난기 있는 모습과 까칠하고 도도한 모습을 오가야 했는데, 캐릭터 구축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구르미> 원작 소설 속 세자 이영은 드라마보다 더 도도하고, 까칠하며, 시니컬하다. 박보검은 그런 소설 속 이영의 모습이 매력 있어 "왜 이 멋진 모습을 후반부에 보여주려고 하시지?" 싶어 묻기도 했다고. 이때 감독·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도하면 지루하다. 다양한 매력도 보여주고, 이영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시청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답했단다.

박보검은 이외에도 틈나는 대로 감독, 작가와 만나 이영을 연구했다. 뒤늦게 캐릭터에 대해 감을 잡으면서 초반 분량을 재촬영하기도 했다고. 박보검은 "재촬영하지 않고 그대로 나갔더라면 재미없었을 것"이라며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장르가 박보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던 연기 뒤에는, 박보검과 제작진의 이런 노력이 숨어있었다.

저하를 울컥하게 만든 남자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보검은 틈나는 대로 감독, 작가와 만나 이영을 연구했다. 뒤늦게 캐릭터에 대해 감을 잡으면서 초반 분량을 재촬영하기도 했다고. ⓒ 이정민


박보검은 내내 '감사하다', '행복했다'며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그런 그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힌 순간이 있었다. 드라마 안팎에서 환상 호흡을 자랑했던, 장 내관(훈남, 이준혁 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준혁)형에게는 유쾌한 에너지가 많아 현장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며 장난스레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까지 했다. 그는 "연기적으로도 많은 조언을 받았다"고 말했다.

"형이 '내가 너를 어릴 때부터 업어 키웠을 거 아니냐.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겠냐'고 하더라고요. 훈남이는 말하지 않아도, 세자의 눈빛만 봐도 다 알아들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장 내관에게 더 정이 가고 애틋해지더라고요.

8회에 제가 대리청정하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힘내시라' 한마디만 하면 될 걸, 장 내관은 옷을 입혀주면서 이런저런 걱정을 막 해요. 그러곤 '어떤 일이 있어도 잘 해내실 거라'고 말하는데, 정말 훈남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울컥했죠. 세자가 끝까지 믿을 사람은 장 내관과 병연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처음과 끝을 장 내관과 함께한 셈"이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장 내관이 '주상전하 납시오'하면 제가 곤룡포 입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빨간 곤룡포를 입으니 힘들었던 지난 감정들이 밀려오더라고요. 형도 '다 키운 아들 보내는 것 같다'고 눈시울을 붉히는데, 저까지 울컥했죠.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장 내관의 발걸음, 그 마음이 느껴지는 거예요. '아, 내가 정말 좋은 사람들이랑 진심을 다해 연기했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한복 맵시, 특별히 신경 썼다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보검은 인터뷰 내내 "감사했다", "행복했다"고 했다. 가장 많은 호흡을 맞췄던 장 내관(이준혁 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 이정민


박보검은 멋진 이영 역할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거문고·액션·승마도 배웠지만, 그가 특별히 신경 쓴 것은 바로 '한복 맵시'였다. 스태프들과 "어느 한복 전문가가 봐도 맵시를 잘 살렸다 할 정도로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까지 했었다고. 유난히도 더웠던 올여름, 겹겹이 입는 한복은 때로 땀복처럼 느껴졌지만, 멋진 한복 태를 위해, 옷매무새 하나에도 신경을 썼단다.

"촬영할 땐 솔직히 덥고 힘들었죠. 근데 한 팬분이 팬카페에 '나중에 세자 옷 벗을 때, 많이 아쉽고 섭섭할 것 같다. 입는 동안 즐겁게 촬영했으면 좋겠다'는 댓글을 남겨주신 걸 봤어요. 정말 그렇잖아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예쁜 한복 입어보겠나 싶더라고요."

한복 디자이너는 박보검에 맞춰 멋스러운 한복을 만들어줬고, 박보검은 그 멋진 한복이 구겨질세라 이동할 때마다 걸음도 조심했다. 스타일리스트는 일일이 따라다니며 각을 잡아줬단다. '화초 저하'의 멋스러움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디자이너 선생님은 멋진 한복을 만들어주셨고, 스타일리스트 분은 매무새를 다듬어주셨죠. 피곤해서 얼굴에 뾰루지라도 하나 나면 조명 감독님, 보정팀, 메이크업팀 모두 나서서 지워주셨죠.

또 감독님, 촬영 감독님이 너무 아름답고 멋진 영상을 만들어 주셨어요. 한 장면 캡처해 글귀만 넣어도 포스터가 될 정도로 너무 예뻤잖아요. 장면 하나하나, 모든 스태프의 마음이 담겨 있어 더 애착이 가요. 제 인생에, 제 필모(그래피)에 <구르미>를 더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해요."

<구르미> 그린 배우 박보검의 앞날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르미 그린 달빛> 촬영에 앞서, 박보검이 가장 신경쓴 것은 '한복 맵시'였다. 더운 날씨에 겹겹이 입은 한복이 땀복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예쁜 한복을 입어보겠나" 싶어 최선을 다했다고. ⓒ 이정민


스물셋의 나이. 여전히 박보검에게는 소년미가 가득하다. 앳된 얼굴과 귀여운 인상은 배우 박보검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고민이 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아직 저는 많은 작품을 해보지 못했고, 경험도 부족해요.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자다움도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일부러 흉내 낸다고 하면, 오히려 어색하지 않을까요? '소년소년', '청년청년'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때, 많이 보여드리려고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교복도 입어보고 싶어요. 영화 <나의 소녀시대> 같은, 풋풋함, 싱그러운 10대를 연기하고 싶어요."

박보검은 아직 차기작을 선택하지 않았다. <구르미>를 통해 연기력은 물론 스타성까지 입증한 그이니만큼, 작품 선택의 폭도 지금보다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어디 교복 입는 10대 역할뿐이겠는가. 이쯤 되면 배우 박보검의 연기 인생에 있어, '구르미'가 그린 것은 쓸쓸한 달빛이 아니라 찬란한 햇빛이다.

"저는 언제나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 그런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꿈이 하나 더 생겼어요. 스태프분들이 너무 좋고 감사해서, 이분들과 또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졌어요. 스태프들이 또 만나고 싶은 배우요. 2016년 여름의 제 청춘을 <구르미>에 담을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KBS 2TV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 역의 배우 박보검이 2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올해 나이 스물 셋. 배우 박보검에 얼굴에는 여전히 소년미가 가득하다. 배우로서 고민이 되진 않느냐는 질문에 "시간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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