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기사 한눈에

  • 참된 세상을 만들자는데 감시의 대상이 된다면 나 또한 얼마든지 블랙리스트에 올려라, 사랑하는 자식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애비 인들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룰루랄라 음악협동조합에 소속된 '나무밴드'의 싱어로 활동했던 송인효. 군에 입대하기 전인 2015년 세월호 참사 추모제에서 노래 부르고 있다.
 룰루랄라 음악협동조합에 소속된 '나무밴드'의 싱어로 활동했던 송인효. 군에 입대하기 전인 2015년 세월호 참사 추모제에서 노래 부르고 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검열을 목적으로 청와대에서 문화예술계 9473인의 블랙리스트 명단을 작성하여 문화체육관광부로 전달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당연히 산속에 박혀 살고 있는 내 이름은 없었다.

그 블랙리스트에는 내가 알고 지내는 글쟁이들, 친구를 비롯해 선후배들의 이름이 수두룩했다. 명단에 올라와 있는 내가 아는 글쟁이들은 대부분 한국작가회의 사람들이다. 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송인효'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송인효는 나의 큰 아들이다. 개인 이름과 함께 녀석이 활동했던 두 군데의 음악 단체, '나무 밴드'와 '시수까스게리야라이녠 밴드'가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녀석은 세 차례에 걸쳐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것이다. 스페인어로 '깡센 서민'이라는 뜻을 지닌 '시수까스게리야라이녠 밴드'는 이미 해체된 밴드임에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녀석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 동기는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과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할 그 무렵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 참담한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홀로 인도를 떠돌고 있었다. 북인도 코사니에서 사귄 인도 친구는 당시 인도 신문에 연일 보도되고 있던 세월호 관련 기사를 모아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인도 친구가 한탄스럽게 물어왔다.

아들에게 온 뜻밖의 메시지

인도 신문에서도 연일 보도했던 세월호 참사 기사.
 인도 신문에서도 연일 보도했던 세월호 참사 기사.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체 한국 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독재자의 딸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 있었듯이 한국 또한 일본의 식민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독재자는 일본에 목숨 걸고 충성을 다했던 친일 매국노였습니다. 그런 딸이 대통령을 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어떻게 매국노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
"......."

나는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혀 그에게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매국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 아무리 부정을 하려 해도 그 나라가 바로 나의 조국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뼈를 묻을 내 조국이었다.

인도에서 네팔로 들어갈 무렵에는 네팔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심 카드를 갈아 끼우지 않아 한국의 모든 소식이 끊겼다. 하여 한국의 소식은 물론이고 인효와 틈틈이 주고받던 메시지도 끊겼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네팔을 헤매고 다니다가 다시 네팔 국경을 넘어 인도로 들어오면서 한국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최소한의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정부로 인해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던 녀석의 근황이 궁금했는데 녀석으로부터 뜻밖의 메시지를 접했다.

"나 이틀 동안 유치장에 있었어."
"왜? 무엇 때문에?"
"서울 집회 갔다가 붙잡혀 들어갔어."
"다친 데는 없고 몸은 괜찮은 겨?"
"응."
"집회 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
"응. 유치장에서 지내면서 이틀 동안 조사받고 나왔어."
"너 맨 앞에 있다가 잡혀 들어 간 거지?"
"그렇지 뭐."

나는 녀석에게 시위대의 맨 앞에 나서지 말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폭력은 쓰지 마라'는 메시지를 날렸다.

녀석은 아픈 세상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자 하는 싱어송라이터다. 종종 세월호 참사 집회에 나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곤 하던 녀석이 2015년 4월 또 다시 경찰에 잡혀 들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맨 앞에 서 있다가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고 있는 그 시간 나는 지리산에 박혀 인터넷을 통해 '오마이뉴스'의 세월호 참사 집회를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 광화문으로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녀석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녀석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차벽 맨 앞줄에 여학생들을 배치했는데 그 여학생들 사이에 녀석의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나름 그 여자 친구를 지켜주겠노라 맨 앞줄로 나서다가 경찰에게 머리채를 잡힌 것이었다.

그렇게 녀석은 두 차례 걸친 시위 경력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것이다. 송인효. 나이 올해 스물 둘, 녀석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온 것을 보며 이 추악한 정부가 뭔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했다. 우리 시대의 블랙리스트는 추악한 권력에 맞섰다는 증표가 아니던가.

블랙리스트는 우리 집안의 내력

블랙리스트는 우리 집안 내력이다. 작은아버지는 일제에 고문을 당하고 일제와 맞서 싸웠던 광복군(광복군 제 2지대 소속)이었다. 당시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집안에 들이닥쳐 들쑤셔댔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고등계 형사들이 불시에 들이닥칠 때마다 오히려 안심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항일투쟁(광복군에 입대하기 전에 중국 신사군에서 항일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을 벌였던 작은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고등계 형사들이 들이닥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관련기사: 어느 광복군의 못다부른 노래).

해방 후에도 우리 집안의 고난사는 계속되었다. 작은아버지를 잡겠다고 난리치던 고등계 형사들이 집안에 다시 들이닥쳤던 것이다. 민족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지인 대전 산내면에서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큰아버지 때문이었다.

큰아버지는 좌익이었지만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총살시키려 했던 우익 쪽 사람들을 여럿 살려냈다고 한다. 하여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그 마을의 산 밑 오두막집에서 평생을 살다가 세상을 뜨셨다. 만약 인민위원장 직함으로 사람들에게 해악을 입혔다면 어떻게 그 마을에서 평생을 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1987년 6.10 민중 항쟁 당시 우리 집안에 또다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당시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늦깎이로 대학에 다니면서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다. 매일 밤마다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 철폐 하라, 독재 타도 하자'는 대자보를 쓰고 화염병을 만들었다.

겁 없는 특수부대 출신이었던 나는 맨 앞에 서서 화염병과 돌멩이를 수없이 던졌다. 전대협 결성 당시 충청지역 대학생 연합회의 대표 중에 한 명이었던 나는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그 바람에 우리 집안에 또다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블랙리스트에 오를 당시 내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으니 스물 둘에 블랙리스트에 오른 송인효 녀석이 우리 집안의 기록을 깬 것이다.

우리 집안이 3대에 걸쳐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여전히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거꾸로 가고 있는 한국의 참담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혈기왕성한 송인효 녀석은 화염병이나 돌멩이를 던져가며 싸운 것도 아니다. 다만 참된 세상, 아픈 세상을 노래해 가며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가두는 것도 부족해 벌금을 물리고 붉은 낙인까지 찍는다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송인효 녀석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공항에서 포옹을 하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 이제 너희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겠다."

하지만 녀석은 지 애비가 그랬듯이 스무 살이 되면서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그것도 남한은 대북 확성기를 가동하고 북한은 남한을 타격하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던 일촉즉발의 시점에 전방에 있는 훈련소로 입대했다. 입대하던 날 녀석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내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랬지, 우리 때는 통일될 가능성이 커서 군대 안가도 될 거라고..."
"그랬지..."

군 생활을 하고 있던 녀석에게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약식 명령서가 날아왔다. 2015년 4월 18일 세월호 집회 건으로 피고인 송인효 외 6명에게 벌금 100만 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2015년 4월 18일 세월호 집회 건으로 피고인 송인효 외 6명에게 벌금 100만 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군 복무중인 아들에게 날아든 100만 원 벌금 통지서

나는 울화통이 터져 전화를 걸어 건조한 목소리의 법원 담당자에게 따져 물었다.

"뭔 죄를 지었길래 100만 원씩이나 냅니까?"
"사건 번호 옆에 일반교통방해라고 적혀 있잖아요."
"교통방해죄로 벌금을 100만 원이나 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벌금 내는 게 억울하면 정식재판을 청구하라는 것이었다. 100만 원은 한 달에 40만 원 정도의 원고료로 근근이 생활하는 나로서는 큰돈이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전화를 걸어 사정 얘기를 했더니 인효가 군복무 중이라서 군사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재판을 받게 되면 당사자가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머리채까지 잡혀 끌려가고 거기다가 이틀씩이나 유치장 신세를 진 것도 억울한데 한두 푼도 아닌 100만 원의 벌금까지 내라는 것이 천부당만부당했다. 끝까지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군 병원을 오가는 녀석에게는 분명 큰 부담이었다.

만약 녀석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가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에게 들은 바로는 녀석의 군 생활은 내가 겪었던 시절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선임병들과 내무반을 따로 쓰고 일과 후 텔레비전을 맘대로 볼 수 있고 공중전화를 통해 언제든지 외부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 거기다가 군부대에서 노래방을 이용할 수 있고 치킨까지 시켜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군 생활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군사재판은 분명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심적 부담을 잘 알고 있다. 군 생활을 할 때 미군과의 마찰로 더블백을 싸들고 영창 대기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심적 압박감이 몰려왔다. 나는 결국 녀석에게 알리지 않고 지리산에서 고사리 일당벌이로 어렵게 모은 돈과 원고료를 탈탈 털어 벌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화염병은 물론이고 돌멩이조차 던져 본 적이 없다. 다만 아픈 세상을 노래하고 그 아픈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뿐이다. 문화예술가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나라, 상식이 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인 것이다.

나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저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된 세상을 만들자는데 감시의 대상이 된다면 나 또한 얼마든지 블랙리스트에 올려라, 사랑하는 자식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애비 인들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얼마전 배낭에 기타 둘러메고 인도로 떠난 녀석이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존자의 법문을 듣고 찍은 단체 사진을 보내왔다. 달라이라마 존자 바로 뒤에서 고개 내민 녀석이 송인효다.
 얼마전 배낭에 기타 둘러메고 인도로 떠난 녀석이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존자의 법문을 듣고 찍은 단체 사진을 보내왔다. 달라이라마 존자 바로 뒤에서 고개 내민 녀석이 송인효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송인효. 내면 깊숙한 울림으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자 하는 녀석에게 블랙리스트라니...
 송인효. 내면 깊숙한 울림으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자 하는 녀석에게 블랙리스트라니...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송인효 녀석은 얼마전 기타를 걸쳐 메고 홀로 인도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다람살라에서 자비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달라이 라마 존자의 법문을 듣고 함께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평화를 갈망하는 외국인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산 깊은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사진들도 보냈다. 내면 깊은 소리를 들어가며 아픈 세상을 노래하고자 하는, 이런 녀석에게 블랙리스트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한국의 참담한 현실이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대신 노래판에 뛰어든 송인효는 졸업하던 해인 2014년 제1회 인천 평화 창작가요제 최연소로 본선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 '노래하는 건'을 부르기도 했다.

▲ 송인효 작곡 작사 노래, '노래하는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대신 노래판에 뛰어든 송인효. 졸업하던 해인 2013년 제1회 인천 평화 창작가요제 최연소로 본선 무대에 올라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 '노래하는 건'을 부르기도 했다. 손전화기로 찍은 동영상이라서 상태가 좋지 않다. .
ⓒ 송성영

관련영상보기


노래하는 건(송인효 작곡 작사 노래)

세상은 참 아픈데 노래하는 건 너무 쉬워
세상은 또 이렇다 저렇다는데 말은 쉬워

위로 하는 내가 부끄러울 때
같이 가자 못하면서~
나 살길만 찾아가면서~

세상은 참 아픈데 노래하는 건 너무 쉬워
세상은 또 이렇다 저렇다는데 말은 쉬워

아픈 세상 슬픈 세상 앞에
부끄러울 때
같이 가자 못하면서~
나 살길만 찾아가면서~

행복한 세상 행복한 나
참된 세상 참된 나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세상은 참 아픈데 노래하는 건...

'세상은 참 아픈데 노래하는 건 너무 쉽다'며 '나 살길만 찾아' 가지 말고 '행복한 세상 참된 세상 함께 가자'는 녀석의 노랫말은 광복군이었던 작은 할아버지가 꿈꾸었던 세상이었고 인민위원장이었던 큰 할아버지가 꿈꾸었던 세상이었고 또한 지 애비인 내가 꿈꾸었던 세상이기도 하면서 평화를 갈망하는 이 시대의 블랙리스트들이 꿈꾸는 세상이기도 할 것이다. 


태그:#블랙리스트, #송인효, #세월호 참사, #일반 교통방해죄, #노래
댓글1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7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이 정도면 마약, 한국은 잠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