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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해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환각'의 어린 시절

리틀앤젤스 1973년 유엔본부 공연 장면.
 리틀앤젤스 1973년 유엔본부 공연 장면.
ⓒ 리틀앤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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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각으로 10월 5일, 북한에서 돌아온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짐을 꾸려 집을 떠난다. 일생을 살면서 정말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일이다. 내가 어쩌다 민족과 조국에 눈을 뜨고 이렇듯 하루가 멀다 하고 무시무시하다는 북한땅을 찾으니 말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내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난 리틀앤젤스 단원으로 매년 수개월씩 전 세계를 다니며 공연했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들의 궁전에 초대받고 자리를 함께했다. 또래의 아이들은 나를 엄청 부러워했지만, 나는 오히려 공부를 하며 쉬는 시간에는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그러다 가끔 주말에는 김밥을 싸들고 가족과 함께 창경궁에 가는 내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긴 공연 여행 중, 타국의 호텔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엄마가 보고 싶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위에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 "Korean Angels! Wonderful Korea!(코리안 앤젤스! 원더풀 코리아!)"라는 관중들의 함성을 들을 때면 모든 피로와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막 내리는 무대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펑펑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당시 나는 영광스러운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구 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린이라고 생각했다.

1974년 리틀앤젤스 시절 이탈리아 대통령궁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다.
 1974년 리틀앤젤스 시절 이탈리아 대통령궁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다.
ⓒ 리틀앤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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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시절의 코리아는 내가 환상 속에 알고 있던 그런 영광스러운 나라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나라는 둘로 갈라져 가족이 생이별했다. 그것도 모자라 헤어진 형제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아비규환의 불행한 나라였다.

그 불행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피눈물을 흘린다. 그러다 마침내 피멍울이 든 가슴을 부여잡고 그리움에 차마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

탈북 여성을 위해 외신기자로

나는 이번 북한 여행을 '외신기자'의 자격으로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북한 당국에 요청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피상적인 이유는 남편 때문이었다. 2013년 9월 북한여행 당시, 우리는 북한의 '로농적위군' 열병식을 구경했다. 그러나 참관자들에게 카메라의 지참이 허용되지 않았다. 핸드백은 물론 담배와 라이터 등 소지품을 일체 가지고 갈 수 없어 차 안에 놔두고 내려야만 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마치 공항에서처럼 검열관의 금속탐지기로 한 사람 한 사람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그 당시 사진을 찍고자 들뜬 마음으로 따라나선 남편이 사진을 찍지 못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카메라는 오로지 기자들에게만 허용됐다. 그런 이유로 북한 열병식의 사진을 꼭 찍고 싶어하는 남편을 위해 내가 외신기자의 자격으로 갈 수 있게끔 유엔의 북한대표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외신기자로 가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울에 살고 있는 탈북여성 김련희씨의 가족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오른 <한겨레> 기사를 통해 알게 된 김련희씨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8월 3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탈북자 김련희씨가 참석한 가운데 김씨의 북한 송환을 촉구하는 종교인 기자회견이 열었을 당시. 김씨는 지난 2011년 6월 중국에 해외여행 갔다가 남한에 가서 몇달만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꾀임에 빠졌다며, 부모님과 자식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 "가족이 기다리는 북한으로 돌려보내주세요" 지난 8월 3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탈북자 김련희씨가 참석한 가운데 김씨의 북한 송환을 촉구하는 종교인 기자회견이 열었을 당시. 김씨는 지난 2011년 6월 중국에 해외여행 갔다가 남한에 가서 몇달만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꾀임에 빠졌다며, 부모님과 자식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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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민인 김련희씨는 평소 앓고 있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식으로 여권을 얻어 중국의 친척을 찾아갔다. 돈이 없으면 중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탈북 브로커를 만난다.

한국에 가서 몇 달만 일하면 치료비를 마련해 중국으로 다시 올 수 있다는 말에 그녀는 브로커에게 북한 여권을 맡기고 한국행을 택한다. 그러나 뒤늦게 '이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온 힘을 다해 북송을 요구한다. 한국 정부가 이를 불허하는 속에서 그녀는 북녘의 가족을 그리며 오늘도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호소한다."

지난 6월 북한여행 때 외국인은 북한에서도 페이스북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이번 여행 때 외신기자 자격으로 취재를 핑계삼아 김련희씨의 가족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북녘의 가족을 애타게 그리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페북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나누게 할 작정이다.

심양의 북한 영사관에서 발급 받은 일반 비자.
 심양의 북한 영사관에서 발급 받은 일반 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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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에 봉착했다. 북한 당국은 내가 기자가 아니라면서 외신기자 자격을 거부했다. 나는 북한 당국에 "나는 비록 개인 기고가이지만 <오마이뉴스>라는 한국 뉴스매체의 '시민기자'입니다"라면서 간곡히 요청했다. 북한 당국은 '이곳에 와서 무엇을 취재하려는지 말해달라'고 한다. '열병식 취재'라고만 답하고 탈북여성 김련희씨 가족과의 만남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답을 주지 않고 일단 평양에 가라는 답만 돌아온다.

어차피 둘째 수양딸 출산준비를 마련해 가는 길이니 외신기자 자격을 거부당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일단 방문목적의 비자를 받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쨌든 도착해서 다시 한 번 우겨 볼 작정이다.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

심양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한항공 라운지에서.
 심양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한항공 라운지에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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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2015년 10월 7일 새벽녘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내 모국에서만 맡을 수 있는 내음이 새벽 공항 안에 한가득이다. 한걸음에 달려가 만날 수 있는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뵐 수가 없다. 모국의 내음 속에 묻어나는 어머니의 체취를 맡으며 마음을 달랜다.

한국 입국이 금지된 나는 인천공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북한행 고려항공을 타기 위해 중국 심양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린다. 대한항공 라운지에 앉아 창 너머 저 멀리 바라보니 희미한 빛이 새날을 밝히고 있다. 저 푸근한 빛 넘어 계시는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어머니, 저 지금 인천공항에 있어요. 대한항공 라운지에서 중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요. 어머니, 건강은 괜찮으세요? 언니는요? 뵙지 못하고 가는 이 딸을 용서하세요.

어머니, 전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행복합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예수님이 저를 향해 진정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도요.

지난날의 이기적이고도 교만했던 제 삶도 회개하며 반성했어요. 그러고 나니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영혼의 샘이 이젠 감사와 기쁨으로 차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해요. 그러니 어머니, 제발 어머니도 저에 대한 무거운 아픔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제 마음은 늘 어머니와 함께 있어요."

막상 메시지를 보내려니 망설여진다. 어머니의 답장이 상상된다.

"은미야, 니 또 북한에 가나? 아이구 마~, 주여!."

눈물이 뿌옇게 시야를 가린다. 집에도 못 들어 오고 또 북한에 가는 나를 보며 괴로워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차마 메세지를 보낼 수가 없다. 그만 지워 버렸다.  

셋째 북한 수양딸 

심양공항의 북한 고려항공 카운터에서.
 심양공항의 북한 고려항공 카운터에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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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도착해 북한 고려항공 카운터로 이동한다.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고 있는 북한 주민들 그리고 해외동포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체크인을 마치고 게이트 앞에 앉아 탑승을 기다린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둘째 수양딸 출산준비물을 전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탈북여성 김련희씨의 가족을 만나 그들과 김련희씨를 메신저로 연결해 대화를 나누도록 해주는 일이다. 나는 김련희씨 가족과 만날 수 없을까봐 걱정하고, 남편은 북한 정규군 열병식 사진 촬영을 못하게 될까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평양행 고려항공 

고려항공 승무원의 모습.
 고려항공 승무원의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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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들어서니 승무원들이 인사를 한다. 나도 "안녕하세요" 대신 북한식으로 응답한다. "안녕하십니까."

빈 좌석이 하나도 없다. 특히 10월은 북한노동당 창건일이 껴있어 여러 가지 볼 만한 행사가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때다. 나의 첫 북한 관광도 10월이었다. 당시 온 도시를 뒤덮고 있는 붉은 깃발을 보고 얼마나 섬뜩했는지 모른다. 붉은 바탕에 노란색으로 붓과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는 조선로동당 깃발이다. 이 깃발들이 무리를 지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아마 지금쯤 평양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세관 통과를 기다리며.
 평양 순안공항에서 세관 통과를 기다리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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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담당 안내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계시는 동안 안내를 맡은 최경미입니다. 반갑습니다. 조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북한에 적어도 세 명의 수양딸을 둘 마음이었는데, 안내원 최경미를 보는 순간 나의 세 번째 수양딸이 될 것을 직감했다. 내가 북한에 수양아들 대신 수양딸들을 두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엄마들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의 마음에는 남과 북이 따로 없고, 이 모성이야 말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분단이라는 허구의 올가미를 풀어헤치고 나는 이들과 작은 통일을 이뤄 살아갈 것이다.

"탈북자요?"

안내원 최경미(왼쪽)와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안내원 최경미(왼쪽)와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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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나눈 뒤 내가 물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 다닐 텐데 어떻게 부르면 좋겠어요?"
"자식같은 아인데 그냥 '경미'라고 부르십시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말씀도 편하게 하십시요."

이것이 바로 북한 동포들의 정서다. 거리낌 없이 자신을 낮추고 순식간에 친해진다.

나는 지난 6월 이곳에서 쓰던 심(SIM)카드에 요금을 적립하기 위해 경미와 함께 공항에 있는 고려린크(Link) 영업소로 갔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이 이미 긴 줄을 형성하고 있다. 내 차례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린 것 같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식당으로 가 경미와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한다. 쇠고기 석쇠구이와 육회를 안주로 대동강 맥주를 마시며 나는 경미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경미, 이번에 내가 머무르는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가능할까?"
"양딸들 만나시는 건 알고 있는데 또 누가 있습니까?"
"응, 있어."
"오데 사는 누굽니까?"
"평양에 살고 있을 텐데 이름은 모르고…, 지금 남쪽에 살고 있는 탈북자의 가족이야."
"남조선에 살고 있는 탈북자요?"

순간, 경미의 얼굴이 굳어지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응. 김련희라는 여성인데 지금 남녘에 살고 있어. 그분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
"오시기 전에 요청을 하셨습니까?"
"아니."
"아~, 네~. 알겠습니다. 일단 보고를 하겠습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 련, 희."

경미는 수첩을 꺼내 '탈북자 김련희 가족'이라고 적는다. 냉면으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내일 아침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남편과 나는 자기 전 산책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오른쪽으로 탈북동포 김련희씨가 꿈에도 그릴 평양역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질녘 평양역의 모습.
 해질녘 평양역의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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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평양, #북한, #탈북자, #김련희,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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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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