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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국무총리는 지난해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국어를 제 2외국어로 채택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한국어를 보전하고 발전시켜야 할 정부나 공공기관이 외국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정책이나 시설을 국민들에게 알릴 때 사용하는 공공언어가 대표적이다. 한글날 570돌을 맞아 공공언어의 외국어 남용 실태를 집중 취재했다. - 기자 말

9월 26일 1호선 종로3가역 한 쪽 벽에는 "3,6,7,8번 출구로 가실 분은 E/S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는 안내표가 붙어있다.(왼쪽) 인터넷 중독 예방 상담센터인 '아이윌센터'의 홈페이지 첫 화면.(가운데) 3호선 도곡역에 비치되어있는 인명구조용 트로리.(오른쪽)
 9월 26일 1호선 종로3가역 한 쪽 벽에는 "3,6,7,8번 출구로 가실 분은 E/S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는 안내표가 붙어있다.(왼쪽) 인터넷 중독 예방 상담센터인 '아이윌센터'의 홈페이지 첫 화면.(가운데) 3호선 도곡역에 비치되어있는 인명구조용 트로리.(오른쪽)
ⓒ 윤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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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거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난 9월 26일 오후 3시, 서울지하철 종로3가역. 송영화씨(55,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는 역사 벽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불만을 터트렸다. "3, 6, 7, 8번 출구로 가실 분은 E/S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안내문에 나오는 영어 표현 'E/S'는 에스컬레이터를 줄여 쓴 말이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이 씨는 번잡한 역사 안에서 한참을 헤매야 했다.

#2. "아이윌센터요? 그게 뭐예요? 아이를 위한 센터인가요?" 지난 9월 29일 오후 5시, 서울시내에서 만난 고등학생 3명은 '영어로 된 시설 이름 아이윌센터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모르겠다"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윌(I WILL)센터'는 서울시가 만든 인터넷중독 예방상담시설이다. "나라의 힘인 청소년을 인터넷 중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며 지난 2007년부터 여섯 곳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영어 이름 때문에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는 청소년이 있다면 제 효과를 다 기대할 수 있을까?

#3. "이런 것조차 영어로 써야 하나요?" 지난 9월 30일 오후 5시, 서울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서 김정은씨(25,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가 '인명구조용 트로리'라는 장비의 안내문을 보자 혀를 찼다. '인명구조용 트로리'는 비상시 지하철 레일로 인명을 대피시키는 장비다. 그러나 트로리라는 영어 표현을 보고 이것이 어떤 장비인지 아는 승객이 몇이나 될까? 김정은씨는 "일반 시민들이 보고 쓰라고 설치해 놓은 것일 텐데, 이름을 그렇게 알기 어렵게 써 놓으면 그게 뭔지 몰라 급해도 함부로 안 쓰려고 할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보도자료 한 건 당 외국어는 얼마나 나올까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같은 공공기관의 영어표현 사용은 안내문이나 시설 명칭에만 많은 게 아니다. 중요 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드는 공식 보도자료에도 부지기수다.

"부트 캠프를 거쳐 결선대회를 치르게 한다."(미래창조과학부 보도자료. 2016.09.19.)
"복지서비스를 One-Stop으로 의뢰함으로써, 보다 쉽게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용노동부 보도자료. 2016.09.19.)
"'전기차-이차전지 융합 얼라이언스'를 구성하였다."(산업통상자원부 보도자료. 2016.09.21)

미래창조과학부 9월 19일 보도자료(왼).  고용노동부 9월 19일 보도자료(오)
 미래창조과학부 9월 19일 보도자료(왼). 고용노동부 9월 19일 보도자료(오)
ⓒ 윤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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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용어도 상황은 같다. 저소득층 아동을 지원하는 '드림스타트', 약물을 복용한 임산부들을 위한 '마더세이프', 결혼이민자들의 정착 생활을 돕는 '해피스타트' 등 우리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인데도 외국어로 표현한 용어가 많다. 자세한 설명없이 정책 이름만 듣고 이 정책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 국민들은 많지 않다. 

우리말 우리 글 지키기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는 '정부 각 기관이 보도자료를 만들 때 사용하는 외국어가 2015년의 경우 보도자료 한 건당 평균 7.27회'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했다. 한글문화연대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외국어 남용의 문제점을 여러 해 동안 지적해왔지만,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라면서 안타까워했다.

잘못된 공공언어 사용의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전문가 중에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외국어 사용이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하는 이가 많다.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는 '외국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권리가 서로 달리 충족되는 점'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외국어 능력이 부족한 국민의 알 권리가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건범 대표는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사이에 층이 생겨 결국 국민적인 분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국민들의 경제적 피해도 상당하다. 2010년 국립국어원은 현대경제연구원에 의뢰해 공공언어로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손실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국민들은 현재 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어려운 용어로 인해 매년 284.5억 원의 불편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언어가 개선돼 이런 불편을 해소할 경우 총 5516억5000만 원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를 얻는다.

공공언어 개선을 위한 제도는 있어도 '유명무실'

지난해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열린 '2015 한글문화큰잔치 전야제' 행사 당시 모습. 한글 창제와 반포에 대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열린 '2015 한글문화큰잔치 전야제' 행사 당시 모습. 한글 창제와 반포에 대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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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만들어져 11년째 시행 중인 국어기본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국어의 발전과 보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법 제 4조)"고 규정해두고 있다. 또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어발전기본계획(법 제 6조)'을 세우고, 정부가 '2년에 한 번씩 시행결과를 국회에 보고(법 제 8조)'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주관할 정부 각 부처나 지방자체단체의 국어책임관 조차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공공언어로 외국어가 사용되지 않도록 역할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누가 국어책임관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보도자료에 외국어를 사용한 정부 한 부처의 관계 공무원과 전화통화를 한 내용이다.

기자 : "국어책임관이신가요?"
A : "음. 제가 국어업무는 담당하고 있는데 국어책임관은 아닙니다. 아마 대변인님이 국어책임관인 것 같은데…. 보통 다른 부처는 대변인으로 되어있지 않나요?"
기자 : "부처마다 다릅니다. 그런 데도 있고 아닌 데도 있습니다."
A : "국어책임관은 항상 그 직책명이 정해져있거든요. 문체부에서 '국어책임관'을 하라고 되어있어서요."
기자 : "네, 맞습니다. 그럼 현재 부처에서는 대변인이 국어책임관인가요? 전화 받으신 분은 어떤 직책이신지?"

A : "아니요. 저희는 국어책임관인 대변인은 없고. 각 부처마다 보통 대변인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주무관입니다."
기자 : "그럼 그 부처의 국어책임관은 누구인가요?"
A : "보통 홍보담당관이 과장님이시구요. 그 다음에 잠시만요…. 국어책임관.. 헷갈리는데 국어책임관... 국어책임... 과장님이신가. 아! 국어책임관 저희 과장님 맞으시네요!"
기자 : "어떻게 아셨어요?"
A : "명단에 보니까 그렇게 나와 있네요. 국어책임관이 대변인인지 과장님인지는 다시 확인해봐야겠네요~ 정확히 더 알아볼게요. (...) 아 국어책임관 대변인 맞으세요~ 찾아보니 대변인이 국어책임관이시네요."

통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홍보담당관실 국어 업무 담당 주무관임에도 국어책임관이 누군지를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국어책임관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라면 이 부서가 작성하는 보도자료가 순우리말로 작성되길 기대하기 어렵다.

위에서부터 '솔선수범' 해야

국어책임관은 소속기관에서 만드는 모든 공문서(보도자료 포함)가 우리 말 우리글로 작성되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국어기본법 제3조 시행령에 따른 것이다. 현재 중앙행정기관(소속기관 포함) 496명, 지방자치단체 243명 등 총 739명의 적지 않은 수의 국어책임관 이 지정돼 있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가 2014년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공공언어 인식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공무원이 많았다.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소속 기관에서 공공언어를 개선하기 위해 기관 내에 담당자를 배정했다"는 질문에 16.6%만이 응답했다.

국어책임관이 유명무실한 제도로 변해버린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는 "윗사람들의 적극적인 의지 부족"을 꼽았다. 이어 "밑에 있는 공무원 한 두 명만으로는 외국어 남용을 막기 힘들다"고 말했다. 국어책임관이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서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장관이 얘기하고 대통령이 얘기해야 외국어 남용이 많이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다음 기사에 이어집니다)


태그:#한글날, #공공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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