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윤여정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서 있곤 했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영화 <장수상회>와 <계춘할망>에서 그는 배우 윤여정으로 오롯이 분했다. 동네 이웃 노인에게 매번 상냥하게 대하는 고운 모습이든(<장수상회>), 호탕하면서도 남에겐 까다롭게 구는 꼰대의 모습이든(<디어 마이 프렌즈>) 더이상 윤여정은 누군가의 엄마 혹은 할머니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이 맥락이 최근작 <죽여주는 여자>까지 이어진다. 다만 조금 비극적이랄까. 한국전쟁을 겪으며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를 전전하는 '양공주'로 살다 아이를 입양 보냈고, 늙어서는 종로 인근을 배회하는 노인을 상대하는 '박카스 할머니'가 됐다.

윤여정도 처음엔 그랬다. <여배우들>(2009) 전후로 친해진 이재용 감독이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대뜸 나온 말이 "나 보고 이걸 하라는 말이냐"였다. 물론 이재용 감독도 만만치 않다. "그럼 하시라고 드렸지 누굴 추천받으려 보냈겠어요?"라 응수하며 이 감독은 치밀하게 짜놓은 소영 캐릭터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로 미끼에 걸려들었다.

누군가의 화양연화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윤여정의 경험상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작품 중 하나다. 사회 안전망 바깥으로 내몰린 한 노인의 삶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인터뷰를 통해 들어보자. ⓒ CGV아트하우스


이 작품을 하면서 윤여정은 반복적으로 힘듦을 토로했다. "나 살기도 힘든데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삶을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은 곧 촬영 중 몇 번의 탈진으로 돌아왔다. 화양연화를 박제한 듯 청재킷을 입고 종로 3가를 거니는 소영은 생업을 가질 수 없어 거리로 내몰린 현재 한국의 많은 노인을 상징한다. 연기하지 않았으면 애써 신경 쓰지 못했을 또래의 삶이 윤여정 안으로 들어왔다.

"음, 따로 박카스 할머니들을 만나진 않았다. 그냥 멀리서 몇 번 바라보고 그런 적은 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이 여자라는 가정을 했다. 보통 그렇게 작업을 해. 소영은 자신의 아이를 입양 보냈을 때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거다. 그 죄의식을 평생 못 버리니까 길 가는 고양이든 코피노(한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로, 영화에서 주요 사건의 촉매기도 하다- 기자 주) 아이든 끌어안는 거지.

야외 촬영은 괜찮았는데 성매매 현장을 찍는 그 좁은 여관은 잊을 수 없다.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있다. 비위가 약해서 뭘 먹지를 못했어! 예산이 적으니 그 안에서 라면을 먹는데 겨우겨우 삼키곤 했지. 그런데도 이 감독은 아주 치밀하다 못해 잔망스럽게 주문해! 바지 벗기고 주사 놓는 장면을 몇 번을 찍었지. 그러다 구토를 했고, 악을 쓰고 뛰쳐나왔어. 더는 못하겠다고. 영화 하면서 그렇게 악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감독이 그러더라(웃음).

난 두 달을 찍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인생이 뭘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은 어차피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 할머니들도 나처럼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었지 않나. 축복받으며 태어났는데 삶의 끝으로 내몰린 직업을 가졌다. 손가락질받고."

잠시 윤여정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어 던진 말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주변 사람들일 수 있다"였다. "집안일을 돕는 아줌마를 고용하려 해도 보통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70대는 마음이 불편해 안 쓰려고 한다"는 현실을 덧붙였다. "그렇게 70이 넘어가면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고, 국민연금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는 생각에 윤여정은 촬영 이후 한동안 우울증을 앓아야 했다. "이재용 감독이 너무 미워 한동안 말도 안 했다"는 건 덤이다.

죽음의 재정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영화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다뤘다. ⓒ KAFA


영화 초반엔 말 그대로 서비스를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묘사되지만, 중후반 부 그 의미가 바뀐다. 안락사 혹은 존엄사에 직접 도움을 주면서 진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영화상 소영이 죽이는 노인은 총 세 사람. 서로 다른 사연으로 소영에게 접근해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들이다.

"상대역인 전무송씨가 소영인 천사라고 하더라. 누굴 죽인다는 일이 참 그렇잖나. 결국, 살인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다. 소영은 못 죽어 사는 여자이기에 반대로 타인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거로 생각했지. 그래서 그 부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실 죽음은 꽤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걸 터부시하는데 당연한 이치잖나. 태어났으면 할머니가 되고 죽고 그러는 거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어떤 책을 봤는데 암 말기인 저명한 피아노 교수가 마지막으로 집에서 레슨을 하며 죽고 싶다고 한 대목이 있더라. 나도 연기하다 죽을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겠지. 겁나는 건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아를 상실할까 봐다. 그땐 어찌할 길이 없잖나.

죽음이 두렵긴 해. 이모 돌아가시는 걸 봤는데 임종 직전 눈을 감았다가도 벌떡벌떡 뜨시더라. 생의 의지가 있기에 끈을 못 놓는 거지. 그래서 난 끈을 놓는 훈련을 미리미리 하려 한다. 근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 90살이 돼서도 '어머 또 만났네요~' 할 수도 있다(웃음)."

공존하는 삶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죽음에 관해 윤여정은 특유의 입담으로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흔히 말하는 '웰다잉' 문제 역시 그가 고민하는 화두 중 하나다. ⓒ CGV아트하우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우울한 작품을 소화한 거 같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윤여정은 "영화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끼리 같이 살며 의지하는 모습에서 큰 따뜻함을 느꼈다"고 전했다. 소영이 세 들어 사는 집주인 역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트랜스젠더(안아주 분)이고, 소영 옆방은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청년(윤계상 분)이다. 사회 소수이며 약자인 이들은 함께 코피노 아이를 돌보며 애써 서로의 치부를 건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종종 이들은 서로의 처지에 대해 농을 던지며 대수롭지 않게 대한다. "다리가 없어 남아도는 힘은 얻다 쓰냐"는 집주인의 말에 "그래서 이렇게 역기를 든다"고 응수하는 장면이 그 예다.

"내가 그들(소외된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영화 하면서 우울증에 빠지는 것밖에 없어 보이더라. 복지부장관을 할 것도 아니고. 바라는 바 이 영화를 통해 사회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리끼리 만나면 고민이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냐다. 먼저 걸리는 사람에게 서로가 얘기해주기로 했다(웃음).

연기 판을 떠났다가 어떻게 다시 찾아줘서 돌아왔다. 감사한 일이다. 그 마음에 60이 될 때까진 가리지 않고 시키는 걸 다했는데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걸 좀 하려고 한다. 다른 걸 할 수가 없다 할 줄 아는 게 이것 뿐인걸? 놀면 뭐해. 일하는 게 백 번 낫지~."

당장 윤여정은 미국드라마 <센스8> 시즌2 촬영을 마쳤고, 당분간은 재충전하며 후일을 도모할 예정이다. 누구의 여자가 아닌 온전히 윤여정으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자. 그의 존재 자체가 곧 폭이 좁고 얕은 한국영화 산업 속 여성 배우계의 최전선이니.


윤여정 죽여주는 여자 종로 노인문제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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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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