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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3.1운동로. 현재의 경북고 등 대구 학생들은 1919년 이 길을 지나 서문시장의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대구3.1운동로. 현재의 경북고 등 대구 학생들은 1919년 이 길을 지나 서문시장의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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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가 주최하고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대구공정여행A스토리협동조합이 공동 주관하는 '대구정신 트레일 투어' 2차 행사가 10월 3일 실시됐다. 이 행사에는 조선국권회복단 선양회(회장 신승훈)와 사단법인 역사진흥원(대표 남기정)의 회원 및 일반 시민 등 40여 명이 참가해 대구 시내 중심가에 산재해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들을 둘러봤다.

'항일 독립운동 로드- 대구의 대표 항일 유적지를 가다'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날 답사 참가자들은 의열단 투쟁의 현장인 장진홍 의사 의거지에서 출발, 구한말 망국의 풍전등화를 말해주는 대구읍성 파괴 유허, '광야'와 '청포도'의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을 추념하는 '264 작은 문학관', 이등박문에 이끌려 달성 신사를 참배했던 순종의 길 북성로, 1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우현서루 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모금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광문사 터, 식민지 시대 대구청년들의 민족교육기관 조양회관 터, 'ㄱ'당과 대한광복회 결성지 달성공원, 허위와 이상룡 기념비, 1919년 만세운동의 산실 교남YMCA와 제일교회 건물 등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장진홍 의사 의거지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현 하나은행)은 오늘도 웅장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1927년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불과 100m 인근에 경북도청(경상감영 자리), 현 중앙우체국 자리에 대구우편국과 대구전신전화국, 현 대구근대역사관 자리에 식산은행 대구지점,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 대구경찰서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주변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정보통신이 밀집된 대구 최대의 중심가였던 것이다.

장진홍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은 지금도 대구광역시 중구에 남아 있다. 재건축 과정을 거쳐 하나은행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그 자체가 독립운동 유적지인데다 경상감영공원 입구 인근에 있어 대구 중심가 여행을 할 때 출발점으로 아주 적격이다. 2016년 10월 3일 '대구정신 트레일 투어'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장진홍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은 지금도 대구광역시 중구에 남아 있다. 재건축 과정을 거쳐 하나은행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그 자체가 독립운동 유적지인데다 경상감영공원 입구 인근에 있어 대구 중심가 여행을 할 때 출발점으로 아주 적격이다. 2016년 10월 3일 '대구정신 트레일 투어'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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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가 덕흥여관 사환 박노선를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배달한 시한폭탄은 은행원, 경찰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은행 창문 70여 개를 박살내면서 파편을 대구역까지 날려보냈다. 경북도청 등 여러 곳을 폭파하려던 의사의 계획은 비록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온 세계에 드날렸다. 1930년 6월 5일 밤, 감옥에 갇혀 있던 의사는 '일제에 의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자'라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의사의 나이 아직 새파랗게 젊은 35세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장진홍 의사가 감옥에서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를 볼 수 있다.

'너희들 일본제국이 한국을 빨리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네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의 영혼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하여 지하에 가서라도 싸우고야 말겠다.'

1906년 대구읍성 파괴 사건, 조선의 실질적 망국을 보여줬다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 지역으로 떠오른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부터였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기구인 경상감영이 대구 포정동에 설치되었다. 그 이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줄곧 경상감영은 대구에 있었다. 영조 12년(1736)에는 임진왜란 때 무너진 흙성 대구읍성이 돌성으로 다시 축조되었다.

1888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프랑스 여행가 샤를 바라는 대구읍성을 보고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 하고 극찬했다. 그러나 '이토의 수양아들'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이름 높은 친일파였던 대구군수 박중양은 1906년 이후 대구읍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읍성 밖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일본인들이 "성곽을 부숴버려야 장사가 잘 된다"면서 청탁을 하자, 박중양은 조정이 읍성 파괴를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밤에 성곽을 무너뜨려버리는 무도한 반민족 행위를 자행했다. 1906년 1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대구읍성 파괴는 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 단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황제의 명령까지 거스른 채 대구읍성을 파괴했던 박중양은 벌을 받기는커녕 이등박문의 지원을 받아 평안북도 관찰사로 영전했다. 실제로 대구읍성이 파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10년 경술국치의 비극이 찾아온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금수강산이 '왜구'라며 줄곧 낮춰보았던 섬나라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넘겨주고 합병되고 만다. 하지만 대구읍성 파괴를 보며 대구 사람들은 망국의 위기를 몸서리치게 느꼈고, 이는 국채보상운동 등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해야겠다는 의지를 드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경상감영공원 뒤편의 '264작은문학관', "육사는 대구 사람"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1길 67-10의 264작은문학관은 2016년 5월 10일 문을 열었다. 민족시인 이육사의 생일인 음력 4월 4일에 맞춰 개관한 것이다. 경북대 박현수 교수 사비로 설립한 264작은문학관의 개관식에는 이육사 시인의 딸 이옥비 여사도 참석했다. 264작은문학관은 안동시 도산면의 이육사문학관에 이어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두 번째 공간으로 탄생했다. 그래서 집의 이름에 '작은'이 들어갔다.

264작은문학관은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활용했는데, 1층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2층은 상설 전시공간과 포토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지만, 시인이 생애의 절반 가까이를 대구에서 살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특히 대구와 관련되는 시인의 활동에도 주안점을 두고 있다. 264작은문학관은 매주 월·화요일 휴무, 수·목·금요일 오후 1~8시, 토·일요일 오전 11시~오후 6시에 문을 연다.

고향은 안동이지만, 육사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곳은 대구시 중구 남산동 662-35 옛집이다. 육사의 따님 이옥비 여사는 "남산동에 친척집이 있어 가끔 놀러갔습니다. 그때 어른들께서 네 부모님이 살던 집이 저쪽 동네에 있다고 했어요. 그때 직접 가 보고 사진을 찍어놓았어야 했는데 정말 후회가 되네요.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조금만 더 일찍 이곳을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증언했다(2015년 10월 23일 영남일보 보도기사 참조). 육사는 17세인 1920년부터 34세인 1937년까지 대구에 거주했고, 그 후 타계하는 1944년까지는 서울과 만주에 머물렀는데, 이옥비 여사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264작은문학관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내 북성로가 나온다. 이곳의 작은 네거리에는 본래 공북문이 있었다. 공북문은 영남제일관(남문), 진동문(동문), 달서문(서문)과 더불어 대구읍성의 4대문이었다. 공북문(拱北門)은 북쪽(한양)에 계시는 임금을 향해 공손히 두 손을 모은다는 뜻의 이름이다. 그런데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이 1906년에 부숴 없애버린 대구읍성의 4대문 중 한 곳인 공북문 터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1909년에 지나갔다. 그것도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달성공원의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수창초등학교 담장을 타고 이어지는 길에는 '어행(御行)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앞 앞 네거리에서 북성로는 끝이 난다. 이 네거리에는 '서울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의 망경루(望京樓)가 있었다. 망경루는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파괴한 후 경삼감영의 정문인 관풍루와 함께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나마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삭아버려 1970년 해체, 소멸되고 말았다. 관풍루는 본래 모습과 거리가 먼 형태로나마 1973년에 복원되어 달성공원 안에 남아 있지만, 북장대(北將臺)인 망경루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독립운동지사 150여 명 배출한 민족교육기관 우현서루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에 있던 건물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역사의 현자들과 벗을 삼는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우현서루 건물이다. 1905년 설립된 우현서루는 교남학교(현 대륜고교)의 전신으로, 이상화 시인의 큰아버지인 이일우 선생이 운영했던 민족 학교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민족시인 이상화, 독립투사 김지섭 등 민족 지사 150여 명이 이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우현서루는 일제에 의해 1911년 강제로 폐쇄됐다.

우현서루 터 뒤편은 넓은 주차장이었는데 어느샌가 조립식 창고 건물이 들어섰다. 이곳은 우현서루보다 1년 뒤에 개교한 달서 여학교가 있었던 자리이다. 낮에 공부할 수 없는 주부를 위해 야학까지 열었던 달서 여학교(설립자 이상악, 이일우 선생의 장남)의 운영 주체는 이상화 시인의 어머니 김신자 여사가 이끈 '부인교육회'였다. 

김광제, 서상돈 등이 앞장서서 벌인 국채보상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지만 간교한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결국 결말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사진은 10월3일 실시된 대구정신 트레일 투어 참가자들이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 터에 마련되어 있는 전시물들을 살펴보고 있는 장면.
 김광제, 서상돈 등이 앞장서서 벌인 국채보상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지만 간교한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결국 결말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사진은 10월3일 실시된 대구정신 트레일 투어 참가자들이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 터에 마련되어 있는 전시물들을 살펴보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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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 터에서 달성공원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국채보상운동을 활짝 꽃피운 역사적 장소 광문사 터에 닿는다. 본래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강요로 지게 된 국채를 갚으면 나라의 자주자강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불꽃을 활짝 꽃피운 이들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김광제, 서상돈 등이었다. 1907년, 수창초등학교 뒤 광문사 터에 기념 비석이 서 있다.

1909년 1월 12일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 따라 달성공원을 방문한 순종은 '기념 식수'를 한다. 순종은 이 날 공원 내 천황 요배전에 참배했다. 이토는 조선국 왕을 경부선에 태워 마산까지 끌고 다닌 후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순종의 기념 식수는 이제 곧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암시하는 행위였던 셈이다. 공원 한복판에는 이토와 순종의 '기념 식수'로 '추정'되는 두 그루 일본산 향나무가 거대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등박문과 순종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두 그루 일본향나무가 달성공원 중심부에 '잘' 자라 있다.
 이등박문과 순종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두 그루 일본향나무가 달성공원 중심부에 '잘' 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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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본나무 뒤를 지나 조금 위로 올라가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를 기리는 '상화 시비'가 있다. 1948년에 세워진 '상화 시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로, 호랑이 울과 코끼리 울 사이에 있다. 시비에는 <나의 침실로>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시비를 보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져 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시비 앞면의 글씨는 당시 11세였던 시인의 3남 태희가 썼다.

상화 시비를 뒤로 조금 아래로 내려온다. 달성서씨유허비를 지나면 바로 아래에 있는 이상룡 구국비를 보게 된다.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망국을 앞둔 1909년 신민회 간부들은 망명 투쟁을 결의했고, 이상룡도 안동의 집 임청각(보물 182호)과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온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상룡 구국비 바로 아래에는 허위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허위 비는 1962년, 이상룡 비는 1963년에 세워졌다. 시비 건립 시기의 앞뒤처럼, 허위는 이상룡보다 앞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95년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에 창의한 의병대장으로,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 때는 선봉장을 맡아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늦어 서울 점령에는 실패했다.

그 이후에도 허위는 임진강, 한탄강 일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이완용은 그에게 대신이나 관찰사 자리를 주겠노라 회유했다. 허위는 단연코 이완용의 회유를 물리치고 계속 투쟁했지만, 끝내 1908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10월 21일 순국했다.

달성은 ㄱ당과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독립운동 '성지'

ᄀ당의 'ㄱ'은 한글의 첫째로서, 한국의 바탕을 의미한다. 또 'ㄱ당'이라 하면 단체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비밀 유지에 유리하다. ㄱ당이라는 이름은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1928년 4월 무렵,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이상화, 문상직 등은 문상직의 하숙집에 모여 독립운동을 위해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자는 데 합의한다. 이들은 야학 운동과 강연회 활동 등으로는 독립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직접적인 방략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1910년대 국내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던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달성공원의 전경. 이곳에서는 ㄱ당도 결성되었다.
 1910년대 국내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던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달성공원의 전경. 이곳에서는 ㄱ당도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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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당은 신간회 부산지회의 이강희, 의성지회의 유상묵 등이 대구에 온 것을 계기로 5월 20일 달성공원에서 창당했다. '청년들을 모아 광동 군사학교에 유학시키고 만주 방면의 미개지를 개척,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 혁명 독립'을 이룬다는 목적을 내걸었다.

강령은 '① 조선민족의 절대 해방을 기한다. ② 우리 운동의 활동무대는 만주에 둔다'로 정했다. 행동강령은 타협을 배제한 절대해방과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재무부에 노차용, 장택원, 조사부에 이강희, 유상묵, 연구부에 정대봉, 문상직의 임원을 두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28년 6월 11일 노차용, 곽동영 등이 둔산동의 부호 김교식의 집을 찾아가 잡지 발행 비용 명목으로 5천원의 약속어음을 요구했다. 위협에 못 이긴  김교식은 '도장을 숙부가 가지고 있으니 후일 등기우편으로 보내겠다.'라고 약속했는데, 다음날 아침 정보를 입수한 대구경찰서에 의해 검거되면서 조직이 해체되고 말았다.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 대한광복회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를 대표하는 국내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경상북도 풍기의 광복단(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이 통합되어 1915년 7월 15일(음) 달성공원에서 결성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국권 회복과 독립 달성에 설립 목적을 두었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력이 갖춰지면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계획에 따라 행동했다.

조직은 본부에 총사령(박상진), 지휘장(우재룡, 권영만), 재무부, 선전부를 설치했다. 총사령 박상진은 판사로 부임하려던 찰나 스승 허위 의병장의 순국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생가는 울산에 있고, 묘소는 경주에 남긴 박상진 의사이지만, 대한광복회를 창립한 곳은 대구의 달성공원이었다.

1910년대 국내 무장독립운동의 중심 대한광복회의 바탕이 된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지 대구 앞산 안일사의 설경 풍경
 1910년대 국내 무장독립운동의 중심 대한광복회의 바탕이 된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지 대구 앞산 안일사의 설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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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는 만주 부사령도 임명했다. 처음에는 이석대를 임명했는데, 이석대가 순국한 후에는 김좌진을 파견했다. 또 1915년 12월 길림에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설치했는데 우재룡, 주진수, 양재훈, 손일민, 이홍주 등이 참여했다. 경기도 지부장 김선호, 황해도 지부장 이관구, 강원도 지부장 김동호, 평안도 지부장 조현균, 함경도 지부장 최봉주,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전라도 지부장 이병찬 등 전국에 지부를 두었다.

경북 영주, 대구, 삼척, 광주, 예산, 연기, 인천, 중국 단동, 장춘 등 국내·외 곳곳에 연락기관을 두었는데 대부분 곡물상회를 차려 운영했다. 회원들은 곡물상회에 모여 회의도 하고, 군자금 모집 및 의혈 투쟁 활동 본거지로 활용했다.

군자금을 마련할 겸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탈취하기 위해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하기도 하고, 일본인 소유의 영월 중석광과 운산 금광 수송마차를 공격하기도 했다. 위조지폐도 만들고, 대구 일원 부호들을 상대로 자금을 모집하다가 회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광복회는 친일 분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울 겸 자금모집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그들을 처단하는 투쟁도 전개했다. 의협 투쟁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18년 1월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해 김한종·임세규·김경태·채기중이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하고, 다수의 회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대한광복회는 국내 독립운동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던 1910년대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족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 활발한 무장투쟁을 펼침으로써 의열단 등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조양회관 터에서 보는 일제 강점기 대구 청년들의 기상

달성공원 정문에서 직선으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 구 원화여고 건물이 도로 오른쪽에 서 있다. 지금은 달성빌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 달성동 5-2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 대구경북 청년들이 모여 민족사상을 기르고 계몽운동을 했던 조양회관 터이다. 조양회관은 '조선의 빛을 본다'는 독립 의지를 이름으로 삼은 건물이다. 1982년 광복회관으로 이름이 바뀐 채 망우공원으로 옮겨졌다. 

조양회관을 건립한 서상일은 1887년 7월 9일 태어나, 22세이던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10년 보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한일합방에 항의하여 9인 결사대를 조직, 서울 주재 9개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다. 조선국권회복단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던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후인 1920년 만주에서 무기를 들여오다 체포되어 투옥된다.

조선국권회복단의 일원인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기려 대구 앞산에 세워진 기념탑
 조선국권회복단의 일원인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기려 대구 앞산에 세워진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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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서상일은 1922년 인재양성과 국민의식 진작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인식, 고향인 대구로 정착한다. 서상일은 거의 혼자 재정을 부담하여 (달성공원 앞 옛 원화여고 자리에) 대지 500평 건평 138평의 2층 건물 '조양(朝陽)회관'(등록문화재 4호)을 짓는다. 그는 압록강에서 가져온 낙엽송을 사용하여 집을 지은 다음, 독립운동가 백남채가 직접 구운 붉은 벽돌로 외관을 장식한 이 목조 건물에 '아침(朝) 해(陽)가 가장 먼저 비치는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은근히 민족의식을 드러내었다.

서상일은 조양회관을 대구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지로 만든다.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 회의실, 사무실, 인쇄공장, 사진부에 오락실까지 갖춘 조양회관에서는 시국,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관한 강연회가 줄을 이었고, 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했으며, <농촌>이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민족유일당 운동을 펼쳤던 신간회의 대구지회 창립 회의도 이곳 조양회관에서 열렸다.

1929년 10월 18일 서상일은 장진홍 의사 조선은행 폭파사건 가담 혐의로 구속된다. 해방 후에는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고, 대한민국 제헌 헌법 기초위원장으로 활약하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다 구속된다. 1961년 5.16 직후에도 군사정부에 의해 기소되는데, 재판이 계류된 상태에서 1962년 4월 18일 타계한다.

조양회관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대구의 청년들이 가장 먼저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던 건물이다. 망우공원 조양회관(광복회관) 앞에는 대구 항일운동의 중요한 인물인 서상일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서성로에 있는 이종암 의사 군자금 모금 유적지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길 1(서성로 1가 109-1)은 이종암 의사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던 항일 유적지이다. 1917년 이 자리에는 대구은행 본점이 있었고, 이종암은 은행 직원이었다. 1896년생인 이종암은 1916년 대구은행에 취업하여 1917년 출납계 주임으로서 금고를 담당했다.

평소 독립운동에 투신할 일념에 젖어 있었던 이종암은 그해 12월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대구은행 금고에서 1만9천원의 거금을 꺼내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본래 미국으로 가고자 했으나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불가능해지자 1918년 2월 만주 통화의 독립군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에는 상해에서 김성근으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웠으며, 단장 김원봉, 이성우, 황상규, 서상락, 윤소룡 등과 더불어 의열단을 조직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1920년 폭탄을 반입하여 일본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려 했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실패했고, 1922년에는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 건물 내에 폭탄을 터뜨렸던 김익상, 오성륜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해로 들어오는 일본 육균대장 전중의일을 처단하려 했으나 총을 발사한 순간 마침 서양인 신부가 다나카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대신 맞아 즉사하고, 던진 폭탄도 터지지 않는 등 불운이 겹쳐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되고 만다. 그 후 오성륜은 탈출에 성공하지만, 20년 수감 생활 뒤 귀향한 김익상은 경찰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다.

이종암 의사는 재정 상태가 나빠 활동이 어려워진 1925년, 모금활동을 펼칠 겸 1907년 은행 금고에서 꺼내었던 돈 중 맡겨 두었던 중 7천원을 찾기 위해 대구로 왔다가 그해 11월 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13년 형을 언도받고 옥에 갇힌다. 체포 이전부터 병을 앓고 있던 이종암은 1930년 6월 10일 유명을 달리했다. 중구 남산2동 621-1(무우관길 30-26) 의사의 생가터에는 현재 다른 집이 들어서 있다.

이종암 유적에서 상화고택 사이에도 독립운동 유적지 많아

그 외에도 이종암 군자금 조성지에서 상화고택 사이에는 독립운동 유적이 즐비하다. 대구 중구 서문로2가 11-1번지의 이상화 생가, 대구3.8.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이자 그 이후 철시 투쟁의 현장이었던 서문시장(현, 오토바이골목 일대), 독립운동단체 혜성단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독립만세운동 당시 대구 지역의 76명 구속자 중 44명이 재학생이거나 전직 또는 현직 교사였던 계성학교의 시위 유인물 인쇄 장소 아담스관, 계산동2가 1-1번지 허무당 선언서 작성지 등이 그들이다.

1919년 대구만세운동의 중심이었던 계성학교의 아담스관. 이 건물에서 만세운동 때 사용된 앤쇄물을 프린트했다.
 1919년 대구만세운동의 중심이었던 계성학교의 아담스관. 이 건물에서 만세운동 때 사용된 앤쇄물을 프린트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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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주로 회동을 했던 교남YMCA 건물과, 2차, 3차 독립만세운동지 남문밖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3월 8일 독립만세운동 이틀 뒤인 10일, 아직 체포되지 않은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학생들, 대구고보 학생들이 남문밖시장(지금의 염매시장)에서 3·1운동을 재현했다. 3월 30일에도 동화사 소속 지방학림 학생들이 남문밖시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림 학생들은 현재의 반월당 보현사 자리에 있던 동화사 포교당에서 시위 준비를 했다. 학생들이 처음으로 만세 시위를 기획하여 모인 곳은 동화사 대웅전 옆 심검당이었다.  

그보다 전인 4월 26일에는 미대동 청년들이 마을 동편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채학기, 채봉식, 채희각, 채갑원이 먼저 올라가고, 이어서 채경식, 채명원, 권재갑이 합류했다. 이들은 백안동 공산주재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헌병대로 압송되었고, 모두 6개월 이상 옥고를 치렀다.

상화고택 뜰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를 보며

상화고택은 계산성당 뒤편 좁은 골목 안에 있다. 물론 골목 입구에는 상화고택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물론 이정표가 없어도 고택으로 가는 길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상화고택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현수막 등이 늘 걸려 있고, 이상화 시인의 얼굴도 커다랗게 벽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택은 상화기념관 형태로 꾸며져 있다. 마당에는 당시에 썼던 펌프가 있지만 물은 뽑아 올리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장독대 건너편에는 시비 셋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어본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상화고택에 왔으면 꼭 이 시 전문을 읽어보아야 한다. 시인의 대표작도 읽지 않고 고택 답사를 마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가사로 하여 만들어진 노래도 불러보는 게 바람직하다.

상화고택 바로 인근의 이상정 장군 집, 서상돈과 최해청 고택터

상화고택 바로옆인 계산동2가 83번지는 최해청(1905∼1977) 고택터이다. 영남대학 전신 청구대학 창립자인 최해청의 집터는 본래 47평 정도의 땅에 두 채의 집과 우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최해청의 아버지 최현달은 44세 때 경술국치(1910년)를 맞이하자 군수 자리를 내던졌고, 아들 최해청은 대구고보 재학시 일본인 교사 축출 운동을 하다가 결국 퇴학을 당했다. 최해청은 1950년 지금의 2.28기념공원 맞은편에 나라 안에서 최초의 야간 강좌를 개설한 청구대학을 설립하지만 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1967년 영남대재단으로 넘어간다.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었던 서상돈(왼쪽)과 김광제의 사진(대구근대역사관 게시)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었던 서상돈(왼쪽)과 김광제의 사진(대구근대역사관 게시)
ⓒ 대구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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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고택은 상화고택과 마주보고 서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강제로 떠맡긴 나라빚 1300만 원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갚자면서 일어난 운동이다. 1300만 원은 당시 나라의 1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300조 가량 된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실패로 종결되었다.

상화고택과 서상돈 고택을 좌우로 두고 그 사이를 걸으면 20미터쯤에 이상정 장군 고택도 만나게 된다. 장군의 집은 지금 식당이 되어 있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정 장군과 이상화 시인 형제의 집이 이렇게 한 골목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상정 장군은 이상화 시인의 형으로, 1896년 6월 10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일본국학원대학을 졸업한 이상정은 대구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서울 경신학교, 오산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하던 끝에 1923년 만주로 망명한다. 1926년경 풍옥상의 서북국민부대의 준장급으로 있던 이상정은 풍옥상군이 장개석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중국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상정은 윤봉길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김구, 김규식 등 독립지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적극 도왔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중국군 중장으로서 화북 지방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9월에 귀국하지만 40여 일만인 10월 27일 뇌일혈로 돌연 타계한다. 이상정 장군의 부인은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이다. 3.1운동 때 투옥되었던 권기옥은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비행사가 되었으며, 남편을 만났다.

남상동에서 만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허
 
이상화, 이상정, 서상돈, 최해청 고택에서 대구 최대의 대도로인 달구벌대로를 건너면 남산동으로 들어간다. 남산2동 407-1(명륜로 13-20)은 서상교 의사 생가터이다. 지금은 새로운 상가가 들어서 있어 생가의 본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지만, 1942년 5월 대구공립상업학교에서 결성된 항일 학생비밀결사 태극단의 서상교 의사가 태어난 곳이다.

태극단을 창립한 대구공립상업학교 학생 김상길, 이상호, 서상교 등은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침략 정책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조국 광복이라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원들은 치밀하고 조직적인 행동강령 아래 1년 동안 무장 항일투쟁을 준비했다. 한편으로는 조직 확대도 도모하여 1943년 4월에는 김정진, 이준윤, 이원현, 윤삼룡 등 새로운 회원들이 가입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5월에는 비슬산 약수터에 올라 결단식을 열었고, 용두산과 비슬산 등지에서 학술 토론회, 체육회 등을 열며 동지적 유대감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한편 체력단련에도 힘썼다. 이때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대해 연구하고 군사관계 서적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23일 배신자의 밀고로 단장 이상호가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 25일과 27일에 단원 25명이 전원 붙잡혔다.

10여 명은 풀려났으나 주동자급은 달랐다. 이준윤은 고문 때문에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사흘만에 숨졌고, 이상호, 서상교, 김상길, 김정진, 이원현, 윤삼룡 등 6명은 5∼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이상호와 이원현도 고문 후유증으로 이내 사망했다.  

서상교, 김상길, 이상호는 생가도 비교적 가까이 있다. 이상호 생가는 중구 봉산동 37-1(달구벌대로 2125-7)에 있고, 김상길 생가는 남산2동 241(명륜로6길 15)에 있다. 그러나 모두들 상가나 새 주택이 들어서 있어 본래의 흔적은 볼 수 없다.

남성정교회(제일교회)에서 분리된 남산교회는 1914년 미국인 선교사 브루엔(한국명 부해리)이 설립했다. 남산교회는 1919년 대구3·8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 목사, 김태련·백남채 장로 외에도 김용해(김태련의 아들, 순국), 백남규(백남채의 동생), 이성해(이만집의 아들), 이덕생·장성희 부부, 강학봉, 박영조, 박인서, 박상동, 김용규, 김용기, 김태도·은도 형제, 곽재란, 한재복, 이우건, 박태현, 김봉충 등 2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예배당 건물 입구 벽에는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이만집 목사, 김태련 장로와 그의 아들 김용해, 백남채 장로의 인물 부조가 조형되어 있다.  

대봉도서관과 청운맨션 자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항쟁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유허지인 대봉1동 111-1(동덕로 33)에는 대봉도서관과 청운맨션 아파트가 서 있다. 이곳은 1985년까지 경북고등학교 교정이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는 경북고의 일제 강점기 때 교명이었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8일의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동맹휴학 등으로 맞섰는데, 특히 1925년 2월 3일에는 조선 역사를 가르칠 것, 악질 일본인 교육(敎諭, 교사) 축출, 조선인 교유 증원, 학생들의 편지 검열 중지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했다. 당시 조선인 교사는 단 1명뿐이었다.

다시 1926년 2월 27일,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모욕한 데 항의하여 2, 3학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했다. 이 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단순한 교내 문제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항일 학생운동 차원의 투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후에도 이 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 투쟁은 계속되었다.

구 대구상고 건물과 현 사대부고 자리도 독립운동 유적지

대구사범학교 항일비밀결사 유적지인 대봉1동 60-10(대봉로 260)의 대구공립상업학교 건물은 태극단 유적지이다. (태극단의 활동을 기념하여 세워진 추모탑은 달서구 월배로 241 상원고등학교 야구장 뒤편에 세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대구공립상업학교 지척인 대봉1동 60-19(달구벌대로 2178)의 대구사범학교에는 '대구 사범학교 항일 학생의거 순절동지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어 한층 항일유적다운 분위기를 풍겨준다.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로 활용되고 있는 이곳은 1940년 11월부터 1941년 2월까지 다혁당 등 여러 이름의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했던 항일유적이다. 1929년 6월 1일에 처음 개교하였는데, 1932년 '교육 및 생도의 비밀결사 사건'으로 37명이 구속되었다. 1939년에는 경북 왜관의 경부선 철도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민족 차별을 받게 되자 이를 계기로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이 결성되었다. 1940년 1월에는 비밀잡지 <반딧불>이 발간되기도 했다.

경북대사대부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기려 세워진 기념비
 경북대사대부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기려 세워진 기념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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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1940년 11월 문예부, 1941년 1월 연구회를 조직했다. 두 조직의 구성원들이 졸업한 1941년 2월 15일 권쾌복, 최영백, 김효식, 김성권, 이도혁, 문덕길, 최태석, 배학보, 이종악, 서진구, 이주호, 박호준, 이홍빈 등 16명이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문예부와 연구부를 통합하고 백의단을 발전적으로 해체한 다혁당(茶革黨)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문예부, 연구부 등의 이름을 썼지만, 궁극적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사 투쟁을 하는 데 목적을 두었고, 그래서 결사의 명칭에 당(黨)을 넣었다.

다혁당은 우리글로 된 역사 문화 서적을 읽고 토론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했고, 축구 등 함께 운동을 함으로써 민족의식 공유를 도모했다. 방학이면 고향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 및 우리글과 우리 문화 보급에 애썼다. 그리고 하급생이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다혁당은 1941년 여름 <반딧불>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와해되었다. 일본 경찰은 2년 이상 다혁당을 조사, 1943년 2월 예심, 1943년 12월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 35명에게 2년 6개월∼5년의 실형이 언도되었다. 특히 박제민,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서진구 등 5명은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옥중에서 사망했다.

대구 독립운동 전체 유적 답사 여정

도보 답사 가능 시내 중심지 산재 유적 :
1)장진홍 의사 의거지 *)파괴된 대구읍성(경상감영, 대구근대역사관) 2)이육사 작은문학관 *)순종의 무거운 발걸음 북성로 3)독립운동가의 산실 우현서루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 터 4)ᄀ당 및 대한광복회 결성지 달성(상화 시비, 허위와 이상룡 기념비, 최제우 동상) 5)조양회관 터 6)이일우 고택 7)이종암 의사 군자금 모금지 8)이상화 생가 9)대구 3.8.독립만세운동 서문시장 10)계성학교 11)3.1운동길, 신명학교 독립운동기념탑 12)허무당 선언서 작성지 13)교남YMCA건물 14)2차, 3차 독립만세운동지 남문밖시장 *)최제우 처형지 15)이상정 고택 *)서상돈 고택 16)이상화 고택 17)최해청 고택터 18)서상교, 김상길, 이상호 생가 터 19)이종암 생가 터 10)남산교회 21)이육사 고택 22)동화사 학림 독립만세운동 준비지 보현사 23)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교) 동맹휴학 유허지 24)태극단 의거지(구 대구상고 터) 25)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사대부고) 항일비밀결사 유적지
차량 이용 답사 대상 유적 :
26)이상정, 이상화 묘소 27)일본군 보병 80연대 주둔지 28)조선국권회복단 결성지 안일사 29)이시영 기념탑 30)광복회관, 서상일 흉상 31)동화사 심검당, 여봉산
*) 표시는 1910년 경술국치 이전 사건으로 독립운동과 유관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




태그:#이육사, #이상화, #대구정신 트레일 투어, #조양회관,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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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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