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먼 집>의 한장면

<할머니의 먼 집>의 한장면 ⓒ KT&G 상상마당


노인의 존재는 불편하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겨우 자리를 찾아 앉는 모습도, 바삐 이동하는 인파 사이에서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도. 알지도 못하는 노인들의 위태위태한 일거수일투족은 괜시리 눈에 걸린다. 특별히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부담감 때문은 아니다. 그저 아직 한창 싱그러운 '젊은이'로서, 언젠가 닥쳐올 늙음과 그 끝의 죽음을 떠올리는 게 거북스러운 것이다. 너무 먼 미래의 일어어서 아예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상실의 시대'. 무방비 상태로 이를 마주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할머니의 먼 집>은 이 불편함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이다. 영화가 다루는 건 서울에 살던 서른 즈음의 이소현 감독과 전남 화순에 사는 아흔 즈음의 할머니의 동거. 아들과 단둘이 살던 할머니가 돌연 자살 시도를 한 게 계기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를 따르던 소현은 취업 준비도 젖혀둔 채 한 달에 며칠 씩 화순에 내려가 할머니와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왜 죽을라고 했어?"라는 소현의 질문에 "성가싱께"라고, "올해는 꼭 죽어야 쓴대"라고 말하는 할머니와 "할머니 죽으믄 나도 못 본디 괜찮애?"라고 되묻는 손녀. 영화는 60여년의 세월을 넘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시간을 애틋하게 그린다.

 <할머니의 먼 집>의 한장면

<할머니의 먼 집>의 한장면 ⓒ KT&G 상상마당


귀가 잘 안 들리고 거동까지 불편한 할머니를 씩씩하고 밝은 모습으로 대하는 소현의 태도는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지점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의 사랑스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아버지처럼, 소현은 할머니를 뒤따르며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기록한다. 한여름 낮 방 안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 할머니 곁에 눕고, 할머니와 함께 동네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 먹는 장면 등은 여느 할머니들의 따스한 품처럼 훈훈하다.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는 소현에게 "오늘은 너무 더우니까 내일 올라가라"고 말하거나, 귀경길에 가져가라며 고춧가루를 빻아다 손수 김치를 담그는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손녀를 향한 오랜 사랑의 깊이가 그대로 느껴진다.

할머니와의 행복한 시간을 아기자기하게 그리던 영화는 중반 이후 죽음의 먹구름을 본격적으로 드리운다. 할머니와 살던 외숙이 갑작스레 죽고, 홀로 된 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된 것이다. 아픈 몸으로 장에 나가고 집안일을 하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좀 앉아 계시라"고 말하는 가족들은 내심 할머니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로 여긴다.

한 달에 1주일 정도 할머니 곁을 지키는 소현에게 "혼자 두고 돌아올 때 뒤 안돌아보이디?"라고 다그치는 엄마의 질문은 "차라리 돌아가시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뼈아프게 다가온다. 할아버지의 묘지를 이장하고 자신이 죽어 묻힐 곳까지 미리 준비해 둔 자식들에게 "생각하면 서러워, 젊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되뇌는 할머니의 모습은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복합적인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할머니의 먼 집>의 한장면

<할머니의 먼 집>의 한장면 ⓒ KT&G 상상마당


"할머니,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다 보고 돌아가셔.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 돼"

내내 밝기만 했던 소현이 이 말과 함께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영화를 관통하며 가슴을 짓누른다. 엄마처럼 혼내지도 않고 늘 소현을 예뻐해 줬던 할머니. 초등학생 시절 일기장을 가득 채웠던 그 할머니가 곧 자신을 떠날 거란 사실 앞에서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가슴을 울린다. 그 흔한 미사려구도, 어떤 의미 부여도 없이 지극히 사적인 할머니와의 이야기. <할머니의 먼 집> 속 소현과 할머니를 통해 '우리 할머니'에게 한 발 다가설 수 있는 이유다. 오는 29일 개봉.

할머니의먼집 이소현 다큐멘터리 님아그강을건너지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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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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