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타칭 '교통 오타쿠', 자칭 '인간 교통지도'가 연재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그런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 기자 말

위령탑에서 내려다본 금강휴게소의 전경.
 위령탑에서 내려다본 금강휴게소의 전경.
ⓒ 박장식

관련사진보기


1970년대 고속도로가 뚫린 직후, 한 책자에 실린 고속버스 홍보 광고.
 1970년대 고속도로가 뚫린 직후, 한 책자에 실린 고속버스 홍보 광고.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1970년대 경부고속국도 428km 전구간이 개통되어 '서울에서 아침을, 부산에서 점심을' 이라는 구호가 현실이 된 이래, 현재 대한민국은 4190km(2016년, 국토교통부 자료 기준)의 고속도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은 웬만한 곳은 당일치기가 가능하게끔 바뀌어 전국토의 1일 생활권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쌩뚱맞게 고속도로 이야기를 왜 꺼내냐고? 조만간 있을 '추석연휴' 때문이... 맞다.

관객 700여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한 재난영화 '터널'.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고속도로 터널을 지나며 '나 떨고 있니?'를 외칠지도 모른다. 사실 '터널'에 나온 터널들이, 실제로는 여러 터널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저 뭇 '도로 덕후'들을 설레게 했다. 그 중 가장 주목받았던 곳은 영월의 '수라리재터널'. 물론 관광지로써의 매력이 적어, 관광지화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현장지휘소가 설치되고, 여러 터널 밖 상황을 촬영했던, 그러니까 터널 입구 장면이 촬영된 옥천터널(옛 이름 당재터널)을 기억하시는가. '안전한 국토건설' 로고가 충격으로 떨어져나가고, 배우 오달수가 현장 지휘자 역할을 맡아 고군분투하던 그 곳 말이다. 오늘은 영화 <터널> 속 그 터널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조국 근대화'라는 모토 아래, 일흔 일곱 명의 외마디가 울렸던 현장

경부고속도로 희생자 위령탑. 일흔 일곱 명의 사망자의 넋을 기리는 탑이다.
 경부고속도로 희생자 위령탑. 일흔 일곱 명의 사망자의 넋을 기리는 탑이다.
ⓒ 박장식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손꼽는 곳은 단연 금강 휴게소이다. 개통 직후인 1971년 원로 가수 남상규가 '고향의 강'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고, 지금도 코미디언 윤형빈이 정경미에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사랑의 그네가 커플 명소로 유명하기까지 하니, 가히 '만남의 광장' 휴게소와 맞먹는 대한민국 대표 휴게소라 할 만하다.

여기에는 한 시간에 한 대씩, 김천에서 대전으로 가는 완행 시외버스가 선다. 대전방향 시외버스 정류소에는 금강 휴게소 앞 유원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귀가하는 행락객들이 지나치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금강 휴게소가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산자락 위로 올라가면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 사고로 숨진 일흔 일곱 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165만대, 그리고 900만명에 육박하는 장비와 인력이 투입된 1960년대 후반의 공사현장에서 일흔 일곱 명이 차디찬 돌에 깔려, 차디찬 기계에 치어 숨졌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멋진 아빠, 그리고 사랑스러운 남편이자 듬직한 아들이었던 이들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외마디 비명 속에 사라졌다.

지금도 금강 휴게소 앞 위령탑에선 7월 7일에 위령제가 치러진다. 날짜가 7월 7일인 이유는 순직자 77명을 기리는 의미이자,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대전-대구 구간 개통일이자 경부고속도로의 전구간 개통일이 1970년 7월 7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인부들은 새벽별 보며 나와서, 저녁별 보며 돌아가는 일상을 매일 반복했다. 그리고 공사장에 걸린 표어,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의 부작용은 일흔 일곱 명의 일상을 앗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은 사망자 나온 '당재터널' 기억하나요

추풍령은 일제시대부터 토목공사의 '끝판왕'으로 취급되어왔다. 추풍령을 정복하고 조령까지 장대터널을 뚫은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 3번국도변에 세워진 추풍령 경계비 추풍령은 일제시대부터 토목공사의 '끝판왕'으로 취급되어왔다. 추풍령을 정복하고 조령까지 장대터널을 뚫은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 박장식

관련사진보기


지금과 달리 1960년대 터널 공사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에선 아홉 명 인부가 목숨을 잃었다.(사진은 영화 터널(2016) 중 한 장면)
 지금과 달리 1960년대 터널 공사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에선 아홉 명 인부가 목숨을 잃었다.(사진은 영화 터널(2016) 중 한 장면)
ⓒ 터널(2016)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대한민국의 터널 뚫는 기술이 발달하여 60km에 육박하는 터널도 뚫고, 해저터널도 속속 개통할 정도가 되었지만, 이제 막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해야 한다던 1960년대에는 터널 뚫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테다.

터널이 없었던 대전-서울 구간, 터널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동대구-부산 구간에 비해 추풍령과 소백산맥, 그리고 금강을 여러 번 관통해야만 했던 대전-대구 구간은 난공사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일흔 일곱 명의 사망자 중 무려 아홉 명이 당재터널 공사현장에서 나왔다고 한다. 추풍령의 다른 터널에 비해 돌의 성질이 고르지 않고 땅이 약해서 터널만 뚫었다 하면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열 세번을 무너졌는데, 한 번은 무너지면서 네 명이 죽고, 한 번은 무너지면서 작업반장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산신령이 노하셨다' 내지는, 산 전체가 귀신이 씌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지금이야 1km 넘는 터널 뚫는 일이 '껌'이나 다름없지만, 당시에는 가장 긴 500~600m짜리 터널과 장대교의 공사가 어려웠을 터. 공사를 위해 당시 가격이 두 배나 비쌌던 조강시멘트가 들어갔다.

공사를 맡았던 현대 정주영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인력이 부족해 육군 건설공병단을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동원한 끝에 완공을 이틀 앞둔 7월 5일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아서, 개통 당일까지 막바지 작업이 이루어졌다고도 했다.

영화 <터널>만큼이나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가 '터널'이 촬영된 당재터널에 담겨 있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었고, 산골 한 가운데에 마땅한 진입로도 찾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진행된 공사.  

인부들이 씻지 못해 땀이 굳어 발가락이 붙어버리고, 소변 볼 시간이 아까워 바지에 그대로 누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현장에서 사망한 아홉 명의 한(恨)이 지금은 작은 지방도로 격하된 600m짜리 쌍굴에 담겨 있다.

난공사 구간이었던만큼, 추풍령 구간은 가장 많은 사고가 난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1970년대에는 황간을 막 지난 고속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스무 명의 사람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고, 2000년에는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에서 수학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버스를 포함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사망자 18명(14명은 학생) 등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결국 사고가 일어났던 구간의 운영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었고 80km/h로 묶여있던 제한속도에 대한 불편여론도 늘어났다.

2000년대에 옥천휴게소-추풍령 구간에 대한 개량이 이루어졌고, 당재터널은 옥천터널로 이름을 바꾼 채 지방도로 격하되었다. 현대사의 비극을 대표했던 터널은, 영화 <터널>에서 터널의 문이 닫히듯 관심갖는 이 없이 쓸쓸하게 퇴장했다.

험하고 두려웠던 난공사... 등록문화재 지정으로 보듬을 수 있을까

옥천터널. 경부고속도로상 터널이었으며 당재터널로 불렸다.(다음 지도 캡처)
 옥천터널. 경부고속도로상 터널이었으며 당재터널로 불렸다.(다음 지도 캡처)
ⓒ 다음지도캡처

관련사진보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어려움이 많았다지만 특히 가장 어려웠던 구간은 대전-추풍령 구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보존이 잘 이루어져 가치가 높은 구간으로 남아있는 곳은 다름아닌 대전-추풍령 구간이다. 6개의 고속도로 대교를 비롯해 다섯 개의 터널이 남아 있다. 당재터널에 진입하기 직전의 장대교, 당재육교를 만들다가 열한 번이나 지지대가 무너져내린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난공사를 겪어내고, 미적으로,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진 고속도로로 남게 되었다. 인적도 적고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진만큼, 2013년부터 이 구간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지역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현재는 이런 여론이 잠잠한 상태지만, 영화 <터널>로 인해 토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진 만큼 등록문화재 지정에 다시 힘써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등록된 등록문화재의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던 '수탈의 결과물'이라는 아픔이 있다. 그런 면에서, 최소한 우리의 손으로 지었고, 부족했지만 당시 최대한도의 능력치를 끌어낸 경부고속도로 옛 추풍령 구간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3년째 잠잠한 여론이 당재터널 '덕분에' 불이 오르길 바란다.

추석 귀갓길엔 현대사의 '근대화 속 아픔'을 되짚는 여행은 어떨까

경부고속도로의 당위성에 대해 가타부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그 수혜를 추석과 설날에 누리고 있지 않는가. 금강휴게소부터 출발해, 1970년대 토건기술을 알 수 있는 구간을 여행하는 것은 어떨까. 고속도로 옛 구간이니만큼 경부고속도로에서 거리도 멀지 않고, 옛 고속도로 구간이었던 데다가 차가 많지 않아 여행하기에 편리하다.

지금은 이 구간이 고속국도 구간에서 해제되어 금강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 산을 한 번에 뚫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장대터널을 뚫는 기술이 발전해 높은 산도 휙휙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갯길을 넘고, 아치다리를 넘고, 터널을 넘어 빙빙 돌아가는 기존의 루트는 불편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데, 바로 앞에 직선의 터널이 생겨났으니 버려진 도로가 된 셈이다.

당재터널, 즉 옥천터널에서 영화 촬영지로 쓰인 곳은 묘금에서 금강으로 들어가는 방향의 터널이다. 현재는 서울방향 터널을 식품회사가 임대하여 김치저장고로 쓰고 있고 부산 방향 터널만을 도로로 이용하고 있어 터널 안에 진입할 수는 없지만, 영화 <터널>에서 사용했던 터널 진입로는 접근이 가능하다. 이 곳도 잠깐 구경하고, 금강휴게소에서 늦여름의 피서를 즐기면 멋진 귀가길이 될 것이다.

금강IC에서 나와 금강로 상의 등록문화재 이야기가 있는 곳을 도는 것이 좋다. 거더(교량의 상부구조물)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어 호주에서 미리 조립해 겨우겨우 짜맞추어 만들었다는 금강4교를 비롯해 한때 국내에서 가장 긴 아치다리였고, 국내 토목의 최신판 취급을 받았던 당재육교에서는 잠시 차를 멈춰 세우고 경치구경을 해도 좋다.

옛 당재터널, 옥천터널을 통과해 터널진입 차단대비시설을 통해 유턴하면 영화 터널의 촬영지에 갈 수 있다. 영화에 사용했던 천막이나 표시물의 흔적을 볼 수도 있지만, 모든 시설이 철거되었기 때문에 영화 촬영지를 구경한다기보다는 '역사물'을 바라본다는 마음으로 들르는 것이 좋다. 겸재에서 청산을 통해 영동으로 가는 길은 헤어핀(머리핀같이 회전 각도가 큰 지그재그구간)이 많은 산길이기 때문에,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낫다.

피라미 서른여 마리를 동그랗게 부쳐낸 것으로, 양념과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다.
▲ 금강 상류의 특식인 도리뱅뱅 피라미 서른여 마리를 동그랗게 부쳐낸 것으로, 양념과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다.
ⓒ 박장식

관련사진보기


금강IC를 통해 들어오면 바로 휴게소다. 휴게소 안에는 마을도 있다. 마을의 집 대부분이 음식점을 하고 있는데, 금강 상류의 특별식인 어탕국수와 도리뱅뱅을 내놓는다. 초심자라면 금강휴게소의 위층 레스토랑에서도 양식당같은 깔끔한 분위기에 맛이 좋은 도리뱅뱅과 어탕국수를 내놓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경부고속도로 희생자 위령탑은 굴다리를 지나면 진입로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 휴게소 아래에 있는 유원지는 늦여름 피서에 적당하다. 금강 상류에 있어 물이 깨끗하고 맑으니 걱정 없이 놀아도 된다.

자녀들을 동반하고 여행을 한다면, 터널을 지날 때 자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자. 16년이 걸린다던 고속도로를 2년 5개월 안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빨리빨리 할 수 있다'라는 마음 덕이었지만, 그에 대한 후유증이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의 삶이 빨라진 데에는 이런 터널에서, 장대교가 건설되던 하천 위에서 삶을 멈춘 이들 덕분이었다고.


태그:#교통, #고속도로, #현대사, #영화, #터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