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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다. 2016년 이번 추석 연휴는 최장 9일로 조금 여유롭다. 가족과 친지 품으로 향하는 귀성길 부담이 조금은 넉넉해진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속도로는 물론 하늘·땅·바닷길은 여전히 몸살이다. 끝없는 차량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습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라도 고향에 내려가는 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과 이웃의 따스함으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잠시나마 가쁜 숨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귀성길, 차에서 25시간

1987년 추석 전날 풍경.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 광장.
 1987년 추석 전날 풍경.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 광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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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앞으로!"를 외치는 요즘의 귀성 전쟁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입대를 바로 목전에 두고 맞이한 1988년의 추석이 생각나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당시 대학과 일부 회사에서는 귀향하는 학생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전세 버스를 대절해 귀향을 도왔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도 귀향 교통편을 제공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시골행 버스를 학교에서 타고 간다는 자체가 무슨 이유인지 창피해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1988년 9월 24일 저녁, 서울역 앞.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대학 2학년이던 나는 명절도 명절이지만 입대 전 가족 친지들과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도 꼭 가야만 했다. 1980년대, 보통 추석 휴일은 하루뿐이라 그야말로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1986년부터 이틀(추석 당일과 다음 날)로 지정된 탓에 그해 추석 연휴도 이틀이었다(1989년부터 현재의 3일 연휴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해의 추석이 월요일(25일)이니 다음날(26일) 휴일이고,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합하면 최장 4일이나 쉴 수 있었다. 하루건너 국군의 날이 낀 탓에 무려 5일이나 쉰 1985년 이후 최고의 황금연휴였다. 아무리 많아도 2~3일만 쉬었던 예년과 비교하면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징검다리 연휴'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4일이나 쉬는 긴 연휴라 느긋하게 손을 놓고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입석 표라도 구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미 서울역 주변에는 끝없는 줄이 늘어서 있고, 매표소 부근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내 고향은 여수. 당시 서울에서 8시간 정도 걸렸던 통일호 열차표의 가격은 7000원 선. 새마을호는 1만 원을 조금 넘는 운임이었다.

당시 귀성표를 구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편법이 기승을 부렸고, 정부에서 대책을 수립한다고 떠들었지만 역시 헛구호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촌스럽게 서성이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암표상이었다.

"어이… 학생, 어디 가? 표 있어."
"저기… 여수 가는데요. 진짜로 표가 있어요?"
"여수는 없고, 순천은 있어. 여수나 순천이나 거기서 바로 거기잖아?"
"…얼만데요?"
"3만 원!!"
"…"
"얼마 있는데?"
"제가 가진 게 2만 원 정도 있는데요…."
"야 XX야, 나랑 장난하냐! 재수 없게."

정상운임의 4배 정도인 3만 원을 주면 순천으로 가는 통일호 기차표를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학생식당의 점심 가격이 450원이던 때였으니 내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실은, 혹시 2만 원에 흥정이 성사될까 봐 겁부터 났다. 가진 돈을 다 주고 나면 수중에 한 푼 없고, 앞으로 귀향을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울역 부근에서 '구세주'를 만나다

1986년 추석 전야. 서울역 광장에 가득한 귀성객들.
 1986년 추석 전야. 서울역 광장에 가득한 귀성객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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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몰래 타고 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고속버스터미널을 가볼까? 차라리 귀성을 포기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해는 이미 어둑어둑, 이미 오후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삐쩍 마른 몸에 시커먼 얼굴을 한 키가 작은 중년 남자였다.

"자…. 대전, 대구, 부산, 정읍, 전주, 광주, 순천! 지방으로 내려가실 분, 빨리 오세요! 몇 자리 안 남았어요~!"

김혜연이라는 트로트 가수가 1994년에 불렀던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여기서 미리 들을 줄이야. 남자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서울역에서 한참 떨어진 도로변. 이미 그곳에는 언제부터 왔는지 관광버스 수십 대가 주차해놓고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전주·대구 방면은 1만 원, 부산이나 광주·순천까지는 1만5000원을 불렀다.

그랬다.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암표상이 제시한 금액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게다가 기어이 학생이니 봐달라고 사정해 여수까지 1만2000원에 합의를 봤다. 표도 구하고, 돈도 아끼니 정말 내가 대견스러웠다. 내가 탄 차는 대전을 거쳐 전주∼정읍∼광주∼순천∼여수로 가는 코스. '까짓거 좀 늦게 가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며 차에 오른 것이 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여 석에 가까운 관광버스에는 이미 짜증스러운 표정의 중년 10여 명이 서로를 애써 외면하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키가 작은 남자가 호객영업을 잘하지 못하는지, 남은 좌석을 채우는 속도는 무척 더디었다. 남은 좌석은 드디어 거의 자정이 가까워서야 채워졌다. 물론 같이 탄 손님들의 목적지는 모두 달랐다. 여수까지 가는 사람은 다행히 나를 포함해 두 사람이었다.

불법 관광버스에 오른 건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서울 시내를 빠져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아직은) 귀성 전쟁은 딴 나라 이야기였고 교통체증은 괜한 기우였다. 이미 마음은 고향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채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좌석 번호, 2번.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였다. 등받이를 조절하는 레버는 어디가 부러졌는지 계속 뒤로 넘어가고, 조금만 힘을 빼면 앞으로 덜컹 세워지고…. 고문도 그런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래 조금만 참자,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마 도착해 있을 거야!'

그러나, 슬픈 예감은 결코 틀린 적이 없었다. 한남대교를 지나 만남의광장 부근에 진입한 순간, 설마 했던 기우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차들은 끝이 없이 늘어서 있다. 88올림픽 이후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급격한 차량 증가와 열악한 도로망 등으로 귀성 전쟁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는 보도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고장 난 등받이에 실내등까지 고장... 창살 없는 감옥

1989년 추석 당시 버스 정류장 풍경. 아찔하다.
 1989년 추석 당시 버스 정류장 풍경. 아찔하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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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까지 가는 데만 서너 시간쯤 걸린 것 같았다. 온몸이 쑤셔오고 자세는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내 의자 등받이는 자꾸 뒤로 넘어가고, 앉아있는 공간의 앞뒤 간격이 너무 좁아 무릎이 운전기사의 등받이에 닿아 저린다. 안전띠는 기대도 안 했지만, 군데군데 실내등조차 안 들어온다. 여수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는 몇 번의 물음에도 운전기사는 묵묵부답이다.

창살 없는 버스감옥에서 고문의 시간이 몇 시간이 더 흘렀을까. 아, 첫 도착지인 대전은 과연 오늘 중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동이 터오는 이 시간에 아직도 천안이라니. 고생길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아, 분명 이건 꿈일 거야. 이건 악몽이야.'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지만 몇 번을 자고 일어나도 비스름한 위치다.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조급한데 가다가 쉬다가, 쉬다가 쉬다가 가다가…. 그냥 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곳이 아예 지옥이었다. 왕복 4차선은 이미 주차장이다. 지친 승객들의 탄식과 한숨 속에 차량의 내부온도는 창밖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가을 아침 공기도 당해내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전 부근의 한 요금소로 진입해 국도로 빠져나가 보지만 여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도로는 포화상태다. 모든 차가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에어컨도 작동하지 않는 연식불명의 관광버스에서 지내는 긴 하루는 참으로 잔혹했다.

이제 차는 회덕분기점에 들어서며 호남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그러나, 진짜 귀성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까지는 전쟁이 아닌 애교에 불과했다. 일단 전주~정읍~광주~순천~여수까지 가는 코스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승객들의 목적지는 천차만별이었다. 논산, 영광, 목포, 보성 등 코스와는 벗어난 승객들도 조금이라도 비슷한 목적지를 대면 무조건 태운 것이었다.

운전기사도 본인도 피해자라고 발뺌하기 시작할 때부터 약간 이상했다. 애초 터미널 주변이나 역 광장에 내려 주겠다는 약속은 온데간데없었다. 도중에 내리는 승객들은 무조건 도착지 주변 나들목 입구에 강제로 하차해야만 했다. 어떻게 고속도로 길바닥에 팽개치냐며 항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애써 외면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곧 내게도 다가올 것으로 생각하니 겁부터 덜컥 났다.

그렇게 전주까지 딱 12시간이 걸렸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 가족을 만난다는 설렘은 이미 잊은 지 오래. 시속 10km라도 좋으니 제발 가기만 했으면 좋겠다. 세워진 차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은 어느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대열에 일원으로 동참해있다는 자체가 참 한심하기까지 했다.

라디오에서 평소 서울에서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광주가 16시간이나 걸렸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니 조금 위안이 된다. 그러고는 참고 또 참았다. 닭장에 갇힌 닭들이 그러하듯, 영문도 모른 채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이후 정읍을 거쳐 장성까지 3시간, 또 광주까지 3시간이 걸렸다. 전날 자정에 출발한 차는 이제 오후 7시를 넘어서고 있다.

장장 25시간 동안의 악몽... 잊지 못할 '웃픈' 추억으로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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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광주에서 순천을 거쳐 여수까지 가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해 순천까지 가는 길도 역시 순탄치 않았다. 편도 1차선이라 또다시 3시간이 흘러갔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착한 순천, 가슴이 뛰었다. 순천역 부근에서 몇 명이 내렸다. 이제 1시간이면 여수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설렜다. 그런데, 이 설레던 마음은 곧 걱정으로 돌변했다.

2명을 데리고 여수까지 갈 수 없으니, 순천에서 내리라는 것이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는데, 이 시간에 어떻게 가라는 것인가? 30대의 남자와 나는 절실하게 애원했다. 특히 나의 슬픈 눈빛은 운전기사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던 것 같다.

드디어 마침내 결국,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정체불명의 관광버스를 타고 전주를 거쳐 광주를 거쳐 순천을 지나 여수까지 장장 25시간 동안의 악몽이었다. 군대생활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그 고통의 25시간 후폭풍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집에서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그 관광버스가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바로 그때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천사가 등장했다. 버스에서의 고통은 영상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추진력이었을까? 격동의 1988년 추석 연휴, 누님들의 전성시대였던 스크린은 그야말로 정신적 공황에 빠진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그래도 그 악몽을 빨리 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나영 누님의 덕이었다.

당시 추석 대목을 앞두고 개봉한 한국영화로 <매춘> <뽕2> <변광쇠3> 등이 경쟁했지만 <매춘>은 압권이었다. 순수한 사랑을 갈망했던 여주인공 나영(나영희 분)이 대학 시절 첫사랑에 실패하는 장면으로 나영이 쾌락에 빠지는 과정을 파격적인 수위로 뜨겁게 담아냈다. <매춘> 후반부의 장면 하나하나는 귀성 지옥의 쓴맛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말 여기서 살려주시면 앞으로 입대해서도 내게 허락된 모든 행복을 포기하겠습니다'라며 버스 안에서 몇 번이나 혼자서 되뇌었던 한마디. 그래서 더욱 군대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격동의 시절, 버스에서 흘렸던 땀과 눈물은 세월이 가도 여전히 서럽다. 그렇게 1988년의 추석은 잊지 못할 '웃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태그:#1988, #추석, #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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