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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장군 동상으로, 행주산성 대첩문(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타난다.
 권율 장군 동상으로, 행주산성 대첩문(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타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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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대첩문 안으로 들어서면 권율 장군 동상부터 가장 먼저 답사하게 된다. 대첩문 안마당 왼쪽에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자리잡고 있고, 동상은 오른쪽 약간 높은 지대에 서서 찾아온 답사자를 지긋이 내려본다.

이 지점에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으로 가서 소형 홍보물을 하나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고양 행주산성>은 표지를 넘기면 '승리의 함성으로 하나 된 곳!'이라는 제목 아래 사적 56호인 행주산성에 대한 간략한 소개부터 해준다. 이어 중요 시설(대첩 기념관, 경기도 유형문화재 74호 행주대첩비, 충장공 권율 도원수 동상, 사당 충장사, 행주산성 토성 등), 주변 명소, 일반 정보, 행주산성 주요 행사 등을 차례차례 해설해준다.

<고양 행주산성>이 특히 요긴한 것은 안내도가 실려 있다는 점이다. 안내도를 보며 답사하면 오락가락하지 않아도 되고, 각각의 시설 앞에 설 때마다 본문에 소개되어 있는 해설을 읽을 수 있어 효율적이다. 물론 행주산성관리사업소는 행주산성에 관한 더 자세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답사자를 위해 26쪽에 이르는 <행주산성>도 준다. 하지만 꼼꼼하게 읽지 않을 요량이면 무료라 하여 일단 챙기고 보는 일은 삼가야겠다. 정말 필요한 다른 답사자를 위해 남겨둘 줄 아는 사람, 그가 교양인이다.

행주산성 안내도가 대첩비 앞에 세워져 있다.
 행주산성 안내도가 대첩비 앞에 세워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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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도 실린 소형홍보물, 답사에 꼭 필요

권율 장군 동상 앞에 서서 하늘을 쳐다본다. 보기만 해도 무게가 느껴지는 갑옷과 투구를 걸친 채 두 손으로 장검을 감싸안고 서 있는 장군의 위용이 늠름하다. 동판에는 가로로 '忠莊公 權慄 都元帥像'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 충장공 권율 도원수상의 명문(銘文, 비에 새겨진 글) 역시 다른 여느 동상이나 비석의 것들처럼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내용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빠뜨리지 않고 옮겨 적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 1월, 우리 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서 북상했던 왜군을 격파하여 서울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뜨리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평양성 전투는 1593년 1월 8일 벌어졌다. 5만여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을 위해 공격에 나섰다. 이때 성 안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소서행장의 1만 5천여 명이었다. 하지만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자 이여송은 일본군을 지나치게 얕잡아보게 되었다. 이여송은 별 준비도 없이 한양을 향해 진격하다가 벽제관에 매복하고 있던 4만 1천여 일본군에 걸려 대패했다.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재차 사기충천했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대를 이끌고 독산성에 진을 친 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 승군장 처영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 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했던 왜군은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했다. 인해전술로 물밀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리 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유리한 지형을 이용'에 대해서는 <행주산성>이 부연 설명을 해준다. '강과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지리적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군은 수 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자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행주산성 전투가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들의 총력을 바탕으로 치러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문장이다. 따라서 권율 장군 동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울타리에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들의 전투 모습이 각각 부조로 새겨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네 개의 부조 옆에 붙어 있는 설명을 읽은 다음, 역시 옮겨 적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관군의 전투 모습을 그린 부조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관군의 전투 모습을 그린 부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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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 : 권율 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왜군이 목책에 접근하였을 때 큰 북을 세 번 치자 우리 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큰 칼을 뽑고 진두지휘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의병들의 전투 모습을 그린 부조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의병들의 전투 모습을 그린 부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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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의병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자원한 민간인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을 따라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훨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 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적을 쳤다.'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승병들의 전투 모습을 그린 부조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승병들의 전투 모습을 그린 부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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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군 : 승군은 승려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子城)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웠다. 이때에 권율 장군이 진두지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싸서 나르는 모습을 그린 부조
 권율 장군 동상 뒤 석조 울타리에 새겨져 있는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싸서 나르는 모습을 그린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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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우리 군은 산성 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 돌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그 후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   

여성들의 치열한 전투 참가를 설명하는 글 속에 들어있는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한 언급이 재미있다.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행주대첩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 않고 '(행주대첩) 후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행주대첩 이전에 이미 행주치마라는 말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행주대첩과 행주치마를 연결하는 발상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의 예 중 하나이다. 소나기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난 유래를 설명할 때에도 민간에서는 흔히 민간어원설에 근거를 둔다. 두 아이가 '소'를 나무에 묶어놓고 '내기'를 했는데 그때 마침 비가 쏟아졌다. 그 이후 갑자기 내리는 비를 '소나기'라 부르게 되었다…….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로 들어서는 길목의 홍살문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로 들어서는 길목의 홍살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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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장군 동상에 작별 인사를 한 뒤 조금 걸으면 오른쪽 숲속에 있는 홍살문과 만나게 된다. 홍살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당이 있을 것이다.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향해 숲길을 걷는다. 충장사 삼문 앞 오른쪽에 '행주 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이 대첩비는 1979년에 세워졌다. 그 탓에, <행주산성> 등 각종 문서에는 대첩비로 소개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문의 내용은 1602년(선조 35)에 세워진 초건비(初建碑, 처음 세워진 비) 및 1845년(헌종 11)에 세워진 중건비(重建碑)의 본문과 같다.

행주대첩비는 모두 3개, 그중 둘이 행주산성에 있다

초건비는 행주산성 주봉인 덕양산(124.6m) 정상부에 있고, 중건비는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 127-17 행주서원 경내에 있다. 초건비 바로 뒤에는 1970년에 세워진 높이 15.2m의 3건비도 있다. 외면상으로도 푸대접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이는 충장사 삼문 밖 '행주 대첩비'의 본문을 읽어본다.

충장사 삼문 밖 오른쪽 터에 세워져 있는 '행주 대첩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새겨둔 비석.
 충장사 삼문 밖 오른쪽 터에 세워져 있는 '행주 대첩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새겨둔 비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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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적은 군대를 가지고 많은 적을 격타한 전적지이다. 장군의 자는 언신,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다. 1537년에 출생, 15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란이 발발한 뒤에 의주목사에서 광주목사에 전임되어 전라순찰사 이광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이광은 (천천히 공격하자는) 장군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전군이 궤멸당하였다. 장군은 광주로 돌아가 군대를 모집하여 금산 이치에 주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적을 크게 격파하여 침입을 저지하였다.

장군은 다시 전라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장군은 곧 군대를 모아서 약 4천 명을 거느리고 9월에 수원 독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평양, 황해도 및 개성을 나누어 점령하였고 후방 부대들은 서울에 모여 있었다.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앞에 나아간 적들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또 다시 이듬해 2월 2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도'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도'
ⓒ 행주산성관리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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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중국에서 파견된 대장 이여송이 평양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이므로 평양, 황해도, 개성 및 함경도에서 후퇴한 적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장군은 소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으나 워낙 적은 수였기 때문에 적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달 12일 수 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군은 군중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성 안에서 활을 쏘며 돌을 굴려서 기어오르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쏟아서 이를 방지하였다. 일부의 적이 방위가 약간 허술한 쪽으로 들어오자 장군은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세 차례 격전 끝에 적은 마침내 참패하여 전사자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것이 이른바 행주대첩이다.

그해 6월 장군은 도원수에 임명되었고 정유재란에 울산 및 순천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장군은 1599년 63세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장군을 선무1등공신에 올려 영가부원군의 칭호와 의정부영의정의 관직과 충장공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1602년 장군의 부하들이 산성에 비를 세웠다. 최립의 글, 한호의 글씨에 김상용이 머리글을 썼으며 비 후면에 장군 사위인 이항복의 추기를 김현성의 글씨로 새겼다. 1842년 조인영의 건의로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사당인 기공사를 짓고 여기에 새로 비를 세웠는데 조인영의 글과 이유원의 글씨로 되었다. 1979년 10월, 임창순 옮기고 김응현 쓰다.'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 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삼도삼문' 안내판의 '신도, 좌도, 우도' 표시 그림
 권율 장군 사당 충장사 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삼도삼문' 안내판의 '신도, 좌도, 우도' 표시 그림
ⓒ 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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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사 삼문 앞에는 '삼도삼문(三道三門)'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은 '궁궐, 사당, 서원, 향교에서 볼 수 있는 삼도(三道)는 가운데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좌우에 참도(參道)를 두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신도는 사당에 모셔진 신이 다니시는 곳으로 일반인은 오갈 수 없으며, 부득이 넘어가게 될 경우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넘어가면 됩니다. 삼도와 삼문이 있을 때 들어가는 방법은 우입좌출(右入左出)로서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옵니다. 충장사(忠莊祠)에도 세 개의 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는 본문과, '좌도, 신도, 우도'를 표시한 삼도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른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 사당 뜰에 선다. 8월 배롱나무에는 붉은 꽃이 한창 만발해 있다. 나무백일홍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배롱나무는 별칭이 말해주는 그대로 백일 동안, 즉 변함없이 긴 시간에 걸쳐 붉은 꽃을 피운다. 충절, 절의, 순절을 표상하는 사당 앞에 심기에 아주 적합한 나무인 것이다.   

사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장군의 위패 앞에 절을 올리고 다시 홍살문을 바라보며 돌아나온다. 대첩기념관이 충장사 바로 뒤에 있지만 포장이 된 그 길을 다시 걷는다. 충장사에서 대첩기념관으로 곧장 올라가려면 잡목이 울창한 숲을 헤치고 가야 한다.

행주대첩기념관 건물이다. 본래 무기고와 군량 창고가 있던 터에 1980년 지어졌다. 당시 권율 장군이 썼던 보검, 화차 40대를 제작하여 권율 장군에게 제공함으로써 행주대첩이 가능하도록 한 변이중 선생의 문집, 문종화차를 복원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행주대첩기념관 건물이다. 본래 무기고와 군량 창고가 있던 터에 1980년 지어졌다. 당시 권율 장군이 썼던 보검, 화차 40대를 제작하여 권율 장군에게 제공함으로써 행주대첩이 가능하도록 한 변이중 선생의 문집, 문종화차를 복원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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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첩기념관 자리는 본래 무기고와 군량 창고가 있던 터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빈 땅이 되었고, 1980년에 대첩기념관을 지었다. 기념관 안에는 권율 장군의 승전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치대첩도, 독산성싸움도, 행주대첩도가 걸려 있다.

기념관에는 선조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수가 있으면 이 칼로 처단하라."면서 권율 장군에게 주었다는 보검도 있다. 행주대첩 때 사용된 화차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진열해 둔 문종화차 복원품도 볼 수 있다. 화차 40대를 권율 장군에게 제공하여 행주대첩을 거두는 데 결정적 공로를 세운 변이중 선생의 문집도 전시되어 있다. 행주토성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 등은 이 산성의 오랜 역사를 증언해준다.  

1602년에 세워진 행주대첩 초건비

줄곧 덕양산 정상부를 향해 올라가면 행주산성에 보는 최고의 문화유산과 만나게 된다. 1602년에 제작된 대첩비가 바로 그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74호인 대첩비는 비각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비각 앞의 '행주대첩 비문 해설' 안내판을 읽는다.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 겸 총통기의 사진
 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 겸 총통기의 사진
ⓒ 행주산성관리사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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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도도원수(朝鮮諸道都元帥) 정헌대부지증추부사로서 의정부좌찬성겸의금부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의 관직을 추증받은 권율 공이 사망한 지 1주년이 되어 막료였던 인사들이 과거 행주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공적이 대단히 컸던 것을 기려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비를 세워서 그의 공적을 영원히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을 결정하고 비문을 지었다.

임진년 4월 일본은 대병력으로 침략하여 여러 진(鎭)과 읍(邑)을 함락시켜, 우리나라는 중앙과 지방이 혼란했다. 임금께서 "권모가 훌륭한 인재로 알고 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후 의주목사로 있던 공을 광주목사로 전임시켰다. 모든 관료들은 남방(南方)을 사지(死地)로 보고 있었으나 공은 명령을 받고 즉시 현지로 달려갔다. 그러나 공이 광주에 도착하자 이미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은 의주로 파천한 뒤였다.

공은 방어군중위장(中衛將防禦軍)의 책임을 맡고 충청도 군대와 합류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주하였으나 전열이 정비되지 않아 광주로 돌아갔다. 다시 나주목사,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을 받은 공은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로 가서 1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수원의 독성(禿城)에 주둔하고 이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적은 공의 군대가 요충 지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꺼려하여 수만 명을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오산(烏山) 등지에 배치하고 싸움을 도발하였으나 공의 유격 전술에 부분적으로 격파되어 철퇴하였다.

계사년(1593) 2월에 공은 정예군 약 2,300명을 직접 인솔하여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였다. 적은 평양에서 죽음을 면한 자, 황해도에서 탈출한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소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되어 서울의 적세는 다시 강성하였다.

행주산성은 삼국 시대에 쌓은 토성으로 임진왜란 때에도 여전히 토성이었다. 행주산성에 들어가서 토성을 찾으려면 정상부의 행주대첩비를 지나면 나오는 충의정 뒤로 들어가야 한다.
 행주산성은 삼국 시대에 쌓은 토성으로 임진왜란 때에도 여전히 토성이었다. 행주산성에 들어가서 토성을 찾으려면 정상부의 행주대첩비를 지나면 나오는 충의정 뒤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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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2일 새벽, 척후병이 적군의 공격 기세가 있다고 보고하고 공은 동요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성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군은 벌써 들판 가득히 몰려와 성을 포위하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응전하며 화살과 돌을 빗발처럼 쏘았다. 왜적은 군대를 세 패로 나누어 교대로 쉬어가면서 싸우는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싸웠으나 불리하자 갈대를 묶어 성에 불을 질렀다.

불은 목책에까지 연소되었으나 성안에서는 물을 가지고 불을 껐다. 서북쪽 낮은 성에 승려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약간 동요된 틈을 타서 적군은 아우성을 치며 들이 밀려왔다. 이 통에 온 군대가 흔들렸으나 공은 칼을 뽑아들고 여러 장군을 호령하여 앞을 다투어 칼을 휘두르며 육박전을 감행하였다. 적은 크게 패하여 네 군데서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서 태우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들이 그 나머지의 적군을 벤 것도 130명에 달했고, 적군이 버린 깃발, 갑옷, 무기 등을 노획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후 공은 군대를 파주(坡州)에 있는 산성으로 옮겼다. 적은 행주에서의 참패를 보복하려고 군대를 끌고 서쪽으로 나왔다가 공의 성벽이 행주에서보다도 더 삼엄한 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침범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경계하며 되돌아간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공의 자는 언신(彦愼), 본관은 안동, 고려의 태사 행(幸)의 후손이며, 조선 왕조에서는 찬성(贊成) 근(近)의 6대손이고 영의정 철(轍)의 아들이니 그의 가문에서 이어진 인격과 높은 학문은 사람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더욱 온화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성의를 보였고, 엄격함만을 지니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환심을 얻어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그들은 공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공은 46세에 임오년 문과에 합격하여 낭관(郎官)에서 바로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라갔으나 문과 출신의 장군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중앙 정부에 있을 때가 적었으며, 어려운 시국을 당하여 정치적으로는 별로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의 과거 부하였던 막료와 사병들이 공의 덕의(德義)를 사모하면서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므로 다투어 물자를 내놓아 이 비를 세우기로 하였으니 갸륵한 일이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최립(崔岦)이 글을 짓고
통훈대부행가평군수 한호(韓濩)가 썼으며
절충장군행대호군지제교 김상용(金尙容)이 두전(비석의 제목)을 썼다.
선조 35년(1602) 6월에 세우다.
이 안내문은 대첩비문을 요약한 것임'  

행주산성 정상부에 세워져 있는 이 행주대첩비는 세 번째 대첩비이다. 1970년에 세워졌다.
 행주산성 정상부에 세워져 있는 이 행주대첩비는 세 번째 대첩비이다. 1970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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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건비 비각 뒤 높은 지점에 세워진 15.2미터 높이의 거대한 대첩비를 둘러보고 그 뒤쪽으로 넘어간다. 1970년에 건립된 이 3건비 뒤편 낮은 뜰에는 교육장으로 쓰이는 충의정이 있다. 이름에 정(亭)이 들어 있어 정자인가 싶지만 그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일 뿐이다.

충의정 뒤로 돌아들면 대첩기념관에 왜 삼국 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현장이 나타난다. 토성(土城), 즉 흙으로 쌓은 성이다. 삼국 시대 토성이 임진왜란 당시에도 여전히 요새로 남아 3대 대첩지로 빛나게 승화되었던 것이다.


태그:#행주산성, #권율, #행주대첩, #임진왜란, #변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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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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