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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식민지주의>나 <일제 식민지 시기 새로 읽기> 같은 책을 함께 썼고, <창씨개명> 같은 책을 선보이기도 했던 미즈노 나오키 님은 문경수 님하고 함께 <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삼천리, 2016)라는 책을 선보입니다. 어느덧 일본에서 백해가 넘도록 삶을 짓는 '재일조선인'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는 책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조선 사람은 일본 사회 밑바닥에서 가장 푸대접 받는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즈음에는 총알받이 군인으로 끌려가거나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만들어야 했던 재일조선인이라고 해요.

일본으로서는 전쟁에 지고, '식민지였던 조선'으로서는 해방이 된 뒤, 재일조선인은 기쁨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도 했으나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아이들하고 새로운 살림을 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즈음 일본 정부는 미국을 등에 업고서 일제강점기 못지않은 푸대접으로 재일조선인을 억눌렀다고 해요.

 겉그림
 겉그림
ⓒ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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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지의 경찰 당국은 병합 전부터 거주 조선인 명부를 작성해서 감시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병합 뒤에도 그런 관행에는 변함이 없었다. (25쪽)

제사공장과 함께 '여공애사'를 상징하는 방적공장은 일본의 공업화를 견인한 부문이었는데, 급격한 성장 탓에 노동자가 부족한 공장도 많았다. 그 때문에 조선에서 여성 노동자를 집단으로 데려와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24시간 조업하는 공장의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었을 뿐 아니라, 먼지와 소음이 심한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26쪽)

일제강점기에는 '황민화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학교를 세우다가 학교를 빼앗긴 재일조선인이라고 합니다. 해방 뒤에는 '일본화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다시금 스스로 학교를 세운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는데, 이때에도 일본은 여러모로 법을 비틀거나 '통달문'을 내려서 '재일조선인 자립교육'을 막으려고 했다는군요.

일본 정부는 왜 이토록 재일조선인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려 했을까요. 제국주의나 전쟁주의로 치닫던 때에는 바보스러웠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뒤에 왜 스스로 평화로운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1920년대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방면위원 제도가 정비되었으나, 방면위원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삼은 적은 거의 없었다. (77쪽)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의 자주적인 교육기관이 폐쇄된 뒤 조선인 아이들은 일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국은 학교교육을 통해 일본으로 동화시키고 일본 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그때까지 취하던 방임적 자세를 버리고 조선인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학교에서 받아들여 '협화 교육', '황민화 교육'을 시키는 쪽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그러나 조선인 어린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차별적인 대우였고 자기부정을 강요당하는 교육 내용이었다. (81쪽)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도 일본 못지 않게 평화하고는 등을 졌다고 느낍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바보짓을 했고, 한국은 한국대로 해방 뒤에 반민주와 반평화로 치닫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꽤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어졌어요.

해방 뒤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했거나 일본에 눌러앉아서 씩씩하게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남·북녘을 바라볼 적에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느껴요. 서로 '한 나라'가 되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해도 이웃 다른 나라들 등쌀에 고단한데, 외려 남·북녘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군사무기를 늘리면서 툭탁거렸거든요.

남·북녘 모두 평화롭거나 민주다운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어요. 더욱이 남녘은 새마을운동 바람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며 시골이 텅 비고, 도시는 도시대로 도시빈민이 부쩍 늘어났어요.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을 동화해서 전쟁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으로 후방의 사회질서를 교란할지도 모르는 존재라고 보았다. (96쪽)

통달한 통으로 외국인이 되어 버린 재일조선인들은 법률 제126호에 따라 당분간의 체류는 허용되었지만, 국외로 퇴거강제 규정을 집어넣은 출입국관리령의 대상이 되어 외국인등록증을 상시 휴대하고 지문날인을 하는 게 의무 사항이 되었다. (145쪽)

 토목공사 현장 조선인 노동자들
 토목공사 현장 조선인 노동자들
ⓒ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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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재일조선인한테만 손그림(지문)을 찍도록 오랫동안 시켰습니다. 한국은 한국사람 모두 손그림을 찍도록 아직도 시키지요. 오늘날 남녘 사회는 외국여행이 자유롭고 여러모로 '자유'를 많이 누립니다만, 이렇게 '자유'로운 지 얼마 안 되어요.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푸대접하거나 괴롭힌다지만, 한국은 이주노동자를 푸대접하거나 괴롭히는 얼거리가 아직도 굳게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재일조선인하고 얽힌 발자국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 일본 사회에서 지난 백 해에 걸쳐서 얼마나 슬프고 아프며 괴로웠는가를 다루면서, 재일조선인 스스로 씩씩하게 일어나서 새로운 삶을 지으려고 하는 모습까지 두루 건드립니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넌지시 물어요.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한테 모진 짓을 오랫동안 일삼았다면, 한국 정부는 '바로 한국사람'한테, 그러니까 '한국사람인 재일조선인'한테 어떤 몸짓인가를 묻고, 오늘날에는 이주노동자한테 어떤 몸짓인가를 묻습니다.

전후 한국에서는 외국인 주민의 국적 취득 장벽도 두터워, 5년 이상의 체류 실적과 '품위', 그리고 '독립적 생계' 가능 여부 등이 국적법에 규정되어 있는 외에도, 법무부의 국적 업무 처리 지침에는 면접과 필기 시험을 통해 한국어 능력과 풍습에 대한 이해 등 '국민으로서의 소양'을 시험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여지는 거의 없었다. (245쪽)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사람이 제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해방 뒤에 무척 많은 사람이 제 나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와 차별 정책 때문에 재일조선인을 '종'이나 '전쟁 총알받이'로 삼다가 해방 뒤에는 재일조선인을 내치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렸다면, 한국 정부는 식민지로 살던 무렵에는 제 나라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고 보살피지 못했다가, 해방 뒤에도 똑같이 지키지 못했고 보살피지 못했구나 싶어요.

이 같은 흐름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까요. 앞으로 이 같은 고리를 싹뚝 끊고서 아름다운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통일이라는 바람이 남·북녘을 비롯해서 '재일조선인이 사는 일본'에서도 불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랑스러운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통일이라는 물결이 남·북녘뿐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뿌리를 내린 일본'에서도 즐겁게 물결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부디 전쟁이나 따돌림이라고 하는 바보짓이 모조리 사라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재일조선인>을 읽습니다.

덧붙이는 글 | <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글 / 한승동 옮김 / 삼천리 펴냄 / 2016.8.15. / 15000원)



재일조선인 - 역사, 그 너머의 역사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지음, 한승동 옮김, 삼천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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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우리말 꾸러미 사전》《우리말 글쓰기 사전》《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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