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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강성한 문명을 꽃피운 고대왕국들이 자리한 경상남도를 둘러보며 두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창녕과 함안에서 만난 거대한 지석묘와 고분군들의 문화적 가치로 볼 것이냐,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권력자들의 모질과 강퍅한 수탈에 대하여 기록할 것이냐로 말이다. 또한 창녕의 석빙고는 또 다른 수탈의 흔적이 아닌가.

차도에서 보이는 이곳을 처음엔 고대 어느 왕의 무덤으로 알았으나 석빙고란 걸 확인하고 또 다른 수탈의 역사를 만난 느낌부터 가졌다.
▲ 창녕 석빙고 차도에서 보이는 이곳을 처음엔 고대 어느 왕의 무덤으로 알았으나 석빙고란 걸 확인하고 또 다른 수탈의 역사를 만난 느낌부터 가졌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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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의 석빙고(石氷庫)는 기록에 영조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토호세력과 극히 일부 양반들이 무더운 여름을 지내기 위해 얼음을 보관했다가 사용했을 것이다.

우선 이 석빙고는 창녕과 안동, 영산, 경주, 청도, 현풍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경주의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이미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경주의 석빙고는 신라 때 만든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인 조선시대 영조 17년(1741)에 이전에 나무로 만들어져 사용하던 것을 돌로 새로 쌓은 것으로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빙고 모두가 근래의 것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울(한양)에서는 임금이 있고, 대규모 행사 등이 많아 그런 시설이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치자. 물론 경주의 석빙고 또한 경주가 신라의 도읍일 당시부터 존재하였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석빙고는 내벽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아 올리고 지붕을 마찬가지로 돌을 다듬어 덮은 뒤 흙으로 두껍게 덮어 더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뒤의 돌로 쌓은 도랑은 석빙고에서 얼음이 녹은 물이 빠지도록 한 수로며, 석빙고의 외벽 하단도 막돌로 허튼층쌓기를 해 하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했다.
▲ 창녕 석빙고 석빙고는 내벽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아 올리고 지붕을 마찬가지로 돌을 다듬어 덮은 뒤 흙으로 두껍게 덮어 더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뒤의 돌로 쌓은 도랑은 석빙고에서 얼음이 녹은 물이 빠지도록 한 수로며, 석빙고의 외벽 하단도 막돌로 허튼층쌓기를 해 하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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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시설을 만드는 과정부터 겨울철에 냇가나 강변에서 얼음을 떼고 옮겨 저장하는 과정에 과연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지는 않았을까. 그 의문을 푸는 열쇠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의 김훤주 대표가 들려줬다. "조선시대 이 석빙고와 관련해 얼음을 뜨는 과정을 시로 표현한 인물이 있는데요"로 시작해서 김창협이라는 선비에 대해 말이다.

그 김창협의 시를 잠시 뒤 살펴보고 우선 김창협의 가계와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김창협(金昌協, 1651년(효종 2년) ~ 1708년(숙종 3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의 증조부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로 유명한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이니 사대부가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는 중화(仲和)며 호는 농암(農巖), 삼주(三洲)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운수거사 김광찬(金光燦)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이러한 대단한 권세를 누린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고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성과 청풍 부사에 이른 김창집의 형 몽와 김창집(金昌集) 또한 영의정을 지냈으며, 조선 말기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의 6대 조부다.

이제 김창협의 시를 살펴보자.

착빙행(鑿氷行)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사람들 우글우글 강가로 나왔네.
꽝꽝 도끼로 얼음을 찍어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얼음이 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음기가 사람을 엄습하네.
낮이면 날마다 석빙고로 져 나르고
밤이면 밤마다 얼음을 파들어 가네.
해짧은 겨울에 밤늦도록 일을 하니
노동요 노랫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 맨발은 얼음 위에 얼어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언 손가락 떨어지네.
고대광실 오뉴월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
여인의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내어오네.
난도로 그 얼음 깨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왁자지껄 이 양반들 더위를 모르고사니
얼음 뜨는 그 고생을 그 누가 알아주리.
그대는 못 보았나?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 겨울 강위에서 얼음 뜨던 이들인걸.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지방에서의 석빙고에서나 백성을 수탈하였으리란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동빙고나 서빙고에 저장할 얼음을 뜨러 한강에 많은 백성들이 내몰렸으며, 무명옷 한 장 겨우 걸치고 버선도 못 신은 맨발에 나탈거리는 짚신 겨우 꿰고 미끄러운 빙판에서 얼음을 떼야 하는 고통을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는 벼슬아치와 임금이 알았겠는가.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어느 대갓집 사랑채에 앉아 여인들의 손길로 건네주는 얼음을 김창협 또한 받아보았고, 그때 자신이 목격한 무더위에 지쳐 죽은 백성들의 시신과 한겨울 살을 찢는 추위 속에 얼음을 뜨는 백성이 같음을 깨달았던 것 아닐까.

이 시를 지은 김창협은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아버지의 누명이 풀려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으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끝내 사양한다.

창녕군에 있는 석빙고는 내부에서 얼음이 녹으며 생긴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이 수로는 여기에서 곧장 축조된 조금 더 큰 도랑으로 물이 흐를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 석빙고 수로 창녕군에 있는 석빙고는 내부에서 얼음이 녹으며 생긴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이 수로는 여기에서 곧장 축조된 조금 더 큰 도랑으로 물이 흐를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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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움직여가는 모양이다.

고인돌은 물론이요, 거대한 왕릉 하나까지 백성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여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더구나 왕과 벼슬아치들의 더위를 식힐 얼음까지 백성의 피와 땀 없이는 조달할 수 없던 사치다.

이러한 한여름에 얼음을 사용하던 기록은 지금부터 3천년쯤 전부터로 전해진다. 신라 초기에 이미 얼음 보관 창고를 만든 기록이 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弩禮王=儒理王 재위 24~57년)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지증왕 6년(505)에 얼음을 보관토록 명했다.

당시 관청으로 빙고전(氷庫典)이 있어 대사(大舍)와 사(史)를 각 한 명씩을 두었고, 중국이나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눈이나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썼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빙고에서 흘러나온 물은 이렇게 축조된 도랑으로 흘러 내로 연결된다.
▲ 석빙고의 물길 석빙고에서 흘러나온 물은 이렇게 축조된 도랑으로 흘러 내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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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보관한 얼음을 왕실에서는 여름에 고위 관리들에게 나눠준다. 이는 일종의 권력유지를 위한 통치수단이었던 셈이다.

고려 문종 3년(1049)에 음력 6월부터 입추까지 은퇴한 고위 관리에게는 3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눠주었고, 그 밖의 관리들에게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눠주었던 것으로 '고려사절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현직 관리보다도 은퇴한 노인들을 더 대우했다는 기록은 효(孝)를 중시함으로서 그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충성을 기대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만날 수 있다.

"빙고가 둘인데 하나는 두모포에 있어서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백목동(柏木洞)에 있어서 왕실과 사신 접대하는 용도와 고위직에 나눠주는 얼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창녕군에 있는 석빙고의 정면은 이와 같은 모양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어 전면의 벽면과 통로를 만들고 위에 이맛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 창녕 석빙고 창녕군에 있는 석빙고의 정면은 이와 같은 모양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어 전면의 벽면과 통로를 만들고 위에 이맛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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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무더운 날씨가 연속되면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자주 여닫게 된다. 그만큼 더위에 얼음이 얼마나 유용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얼음을 겨울 매서운 추위에 한강에서 떼어내고 옮겨 보관하는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한강물이 10센티미터 이상의 두께로 얼었을 때라야 강에 올라서서 얼음을 도끼로 잘라내는데, 혹독한 날씨라야 얼음 떼는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히 작업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노릇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런 고통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무언가 보상이 있지 않았을까?

"세종 5년(1423) 11월 27일 임금이 술 830병과 생선 1,650마리를 장빙고(藏氷庫) 역군에게 내리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11월 27일이 지금처럼 양력이 아니었을 터이니 섣달 그믐날을 불과 사흘 남겨둔, 요즘으로 하면 양력으로 1월 하순에서 2월 초쯤 되는 겨울로서는 가장 매서운 바람이 부는 시기다.

이 시기에 이 정도의 술과 생선이라면 술은 두 명이 1병으로 나누게 하고, 생선은 한 사람이 1마리씩 받을 수 있도록 계산하면 얼음 떼는 일에 하루 1650명이라는 실로 엄청난 백성이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창녕군에 있는 석빙고는 안쪽 문은 열려 있으나 외부의 살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 살문 사이로 흐린 불빛이나마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 창녕 석빙고의 내부 창녕군에 있는 석빙고는 안쪽 문은 열려 있으나 외부의 살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 살문 사이로 흐린 불빛이나마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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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의 석빙고는 규모가 서울의 동빙고나 서빙고에 비해 작은 편이다. 장정 한 사람이 지게로 질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떼어낸 얼음을 높이 15cm에 폭 40cm와 길이 60cm 정도로 잡았을 때 많아야 500여 덩이의 얼음을 채울 정도로 보인다.

서울처럼 많은 벼슬아치도 없었고, 궁궐에서의 다양한 행사에 사용될 일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과연 석빙고에 가져다 보관할 정도로 얼음이 얼어주느냐다. 한강도 제대로 얼음이 얼지 않은 기록이 있는데 남쪽지방에서 겨울이라 해서 얼음이 얼어줄 턱이 없으니 그에 대한 기록도 어딘가 남아있지 않을까.

창녕군의 석빙고 정면엔 이와 같은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 석빙고 안내문 창녕군의 석빙고 정면엔 이와 같은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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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어는 이치조차 제대로 알 턱이 없던 시대에서 자연의 조건에 따라 결빙된 얼음을 한 여름 이용할 생각을 한 것까지는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부역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을 과정을 생각하면 고운 시선으로 보긴 어렵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VIP에게 보여 줄 사진부터 요구하는 지금의 정권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에게 맡겨준 권력의 주인들을 이간질 시켜 득세를 유지하려는 모습과, 탐관오리들이 설치던 시대가 무엇이 다르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개인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동시에 기재됩니다.



태그:#창녕군, #석빙고, #김창협, #착빙행, #창녕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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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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