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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최고 바쁜 사람처럼 봄 구경 한 번 못하고 여름을 맞는다.

"놀러 와"
"안개비 속 차 만들기"

가끔 형은 이렇게 단문과 함께 차 수확시기 차 따는 모습과 차밭 풍경 등을 사진으로 보내면서 날 유혹했다. 차 수확 시기는 지났지만 이러다가 평생 못 가볼 수 있겠다 싶어 큰맘 먹고 고창 선운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금 차명인 박시도형은 고창 선운사 차밭지기로 들어가 있다.

버스가 흥덕에 도착하니 멀리서 환하게 웃는 시도형이 보였다. 차밭과 씨름 하느라 그런지 거무스름 그을린 얼굴이 영락없는 촌사람이다. 형을 따라 선운사 경내를 통과해 지난봄 와봤던 차밭 가운데 도인들이 살듯한 거처에 도착하니 반가운 마음에 기분이 좋아진다. 차 명인이 직접 내려주는 차를 마시며 차 향에 취하고 차 이야기에 취해 밤이 늦는 줄 몰랐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드니 도솔암 계곡에서부터 내려오는 바람 소리가 마음을 뜨게 하여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잡사에 찌든 몸이 신령스런 기운에 부적응증을 보이는 것일 게다.

누가 지었는지 마치 도인들이 살것 같은 집이다. 새벽녁 바로 위에서 울어 대는 새소리에 적응하면 살만하다.
▲ 선운사 경내 차 밭 차 명인 거처 누가 지었는지 마치 도인들이 살것 같은 집이다. 새벽녁 바로 위에서 울어 대는 새소리에 적응하면 살만하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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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선잠을 잔 것 같은데 하도 시끄러워 깨보니 오전 4시반이다. 온갖 새들이 2층 창 밖 바로 옆 나무에서 생목으로 짖어댄다. '아이고 이놈들 부지런도 하다.'

비몽사몽 새소리에 취해 방바닥에 붙어 있다 언뜻 창 밖을 보니 훤하게 밝아 있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체질인데 조용히 일어나 세수를 했다. 밖을 보니 멀리 차밭을 순찰하고 있는 형이 보였다.

"잘 잤남?"
"밥 먹기 전에 차 정원 구경해야지."

오전 일정이 정해졌다.

선운사 주변에는 조성한 차밭과 야생차밭을 합해 대략 10만여 평(정확한 면적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함)의 차밭이 있다고 한다. 먼저 야생차밭을 구경하기로 했다. 차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니 선운사 산내암자인 도솔암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도솔암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차밭이 펼쳐져 있다. 시도형 말로는 야생차의 북방한계선이 여기쯤이라고 한다. 순창 강경마을 야생차밭처럼 이곳 차밭도 수백 년이 되었는데 도솔암 계곡의 숲과 어우러져 이렇게 수백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고 생각하니 뭔지 모르게 신령스런 기운이 도는 것 같고 차를 마시지 않아도 그 향이 온몸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숲과 어우러진 야생차 밭
▲ 산운사 도솔암 계곡 야생차 밭 숲과 어우러진 야생차 밭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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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주변 도솔암, 부도전 주변 등에 야생차 밭을 볼 수 있다.
▲ 선운사 야생차 밭 선운사 주변 도솔암, 부도전 주변 등에 야생차 밭을 볼 수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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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숲과 함께 살아 있는 차가 진짜 차야. 봄부터 가을까지는 이 활엽수들이 위에서 햇볕을 먹고 살며 나무 아래에는 잡풀이나 잡목들의 번창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 또 나뭇잎들이 지면 많은 부엽토를 제공해 주어 차에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거야. 차나무들은 이렇게 숲이 제공해주는 양분으로 여름을 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겨울에는 내리쬐는 햇볕을 실컷 받아 힘을 기르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 야생차 숲이 진짜 상생을 보여주는 곳이야."

차밭을 오르내리면서 찬찬히 전해주는 이야기는 야생차밭은 반드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보물 중에 보물임을 깨닫게 했다. 선운사 주변에는 이런 차밭이 도솔암 계곡뿐만 아니라 선운사 뒤편, 부도전 주변 등 곳곳에 약 5만여 평이 있다고 한다.

야생차밭을 둘러본 뒤 이번에는 조성된 차밭을 구경 시켜 주었다. 선운사 조성 차밭은 선운사 스님 한 분이 20여 년 전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사찰 주변 골짜기 골짜기마다 널려 있었다. 그 면적이 무려 5만여 평이나 된다고 하니 그 스님도 대단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스님이 조성한 선운사 산내암자 주변 차밭은 현재 참당암 주변, 동운암 주변, 석상암 주변 골짜기마다 퍼져 있다. 걸어서는 다 돌아볼 수 없기에 차를 타고 골짜기마다 대충 모양만 훑어보는 정도로 돌아 봤다. 골짜기마다 숨어 있는 차밭은 몇 년째 방치되다시피 유지 되어 칡넝쿨과 잡목들로 우거져 있어 언뜻 보면 차 밭이라기 보다 그냥 산등성이 한 자락으로 보였다.

몇년째 방치되다시피 해 칡넝쿨과 잡목들이 차밭을 점령하고 있다.
▲ 선운사 조성 차 밭 몇년째 방치되다시피 해 칡넝쿨과 잡목들이 차밭을 점령하고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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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보물인데 이제부터 조금씩 조금씩 이 보물들을 발굴해야지."
"사람 사서 이 풀다 제거하려면 인건비만 1억은 더 들 거야. 뭐 그래서 이 차밭이 나한테까지 오게 되었지만 보물을 어떻게든 이대로 방치되어서는 안되지. 하나씩 해나가야지. 하나씩."

시도형은 차밭 구경을 시켜주며 앞으로 이곳은 '차밭'이 아니라 '차 정원'으로 부를 거라며 보물정원 조성 청사진을 설명해 주었다. 차밭 정원 골짜기에는 와이너리처럼 차 발효 창고를 지어 차가 발효되는 과정도 볼 수 있게 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발효 창고는 당장은 아닌 장기 계획이다.

이런 형의 청사진을 알았는지 공원 측에서는 지금 차 정원 산책길 조성이 한창이었다. 곧 개장한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조성이 완료되었을 듯하다. 이 산책길이 열리면 차 정원 산책길 옆에 차 체험장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체험장에서는 차도 마시고 직접 차를 따서 만들어 보는 과정도 운영할 계획이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조금만 기다리면 올 가을쯤 박시도표 선운사 보물차 맛을 볼 수 있을 듯하다.

보물 창고를 훔쳐본 느낌 이랄까? 앞으로 저차들은 발효창고에서 볼 수 있을듯 하다.
▲ 올봄 수확한 박시도 표 차 보물 창고를 훔쳐본 느낌 이랄까? 앞으로 저차들은 발효창고에서 볼 수 있을듯 하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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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지 않은 명인의 차 맛은 먹어봐야 맛을 안다.
▲ 박시도표 차 꾸미지 않은 명인의 차 맛은 먹어봐야 맛을 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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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차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선운사 주변 야생차밭과 조성 차밭을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방치되어 있는 숨겨진 보물 차밭들을 하루라도 빨리 발굴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 차밭을 잘 가꾸어 사람들이 찾아와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다면 보물의 용도로는 괜찮지 않겠어'라며 웃던 형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도사처럼 던진 마지막 말이 버스를 타고 계속 나를 따라왔다.

"아이 뭐 내가 못하면 다음에 또 후대에 하면 되지. 그동안 나는 하는 데까지 하며 이 보물들을 잘 지켜 주면 되는 것이고."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태그:#선운사, #도솔암, #야생차밭, #박시도, #선운사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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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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