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7월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정부질의에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과 황교안 총리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이 논란이 됐었다. 당시 표창원 의원은 '학교전담 경찰관 여고생 성관계 사건'을 언급하면서 황교안 총리에게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라 진단하느냐 질문했다. 이후 이어진 문답에서 표창원 의원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학교폭력 전담 경찰관 제도의 선발기준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그의 발언 중 일부 표현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말의 맥락을 봤을 때 문제가 없다는 의견과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의견이 충돌했다.

다음 날, 표창원 의원은 SNS에 논란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가 남긴 글 중에는 '자기검열'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소중한 권리. 논란과 비판이 두려워 '자기 검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거침없이 할 말 합니다. 실수 있다면 반성하고, 잘못 있으면 책임지고. 불안과 두려움은 제것이 아닙니다. 제게 대한 비판도 존중합니다." - 7월 6일자 표창원 의원 SNS 게시글

자기검열이란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할 목적 또는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할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행위다. 표창원 의원은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소중한 권리이며, 논란과 비판이 두려워 자기검열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큰 공감을 느꼈다. 시기를 정확하게 짚을 순 없지만 최근 5~6년 사이,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여러 면에서 자유가 크게 위축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당신은 자유로운가

집회, 결사, 표현의자유를 위한 예술행동 '액숀가면' 2차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5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다양한 가면을 쓴 예술인들이 '집회, 결사, 표현의자유를 위한 예술행동 - 액숀가면' 행사를 열고 있다.
 2차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다양한 가면을 쓴 예술인들이 '집회, 결사, 표현의자유를 위한 예술행동 - 액숀가면' 행사를 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자유는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자유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의견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강제적인 힘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민주제를 채택한 대다수 국가의 헌법에서는 국민이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기가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이사할 수 있다(헌법 제14조 거주이전의 자유).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헌법 제15조 직업선택의 자유). 믿고 싶은 종교를 가져도 된다(헌법 제20조 종교의 자유). 내가 좌파든 우파든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헌법 제19조 양심의 자유). 다른 사람이 함부로 나의 개인적인 비밀을 말하고 다닐 수 없다(헌법 제17조 사생활 비밀의 자유).

영장이 없다면 국가는 나를 구속하거나 내 집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 헌법 제16조 주거의 자유). 나는 자유롭게 연구하고 내가 연구한 내용을 발표할 수 있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만들어 전시할 수 있다(헌법 제22조 학문과 예술의 자유). 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해 시위를 할 수 있으며, 나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헌법 제21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여기까지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원하는 직업과 종교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는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재개발로 주거지를 잃은 철거민, 물대포를 맞고 흩어지는 시위대, 청와대 홍보수석의 '눈물겨운 하소연'에 취소된 보도, 작품 전시가 불허된 정치인 풍자화.

이런 모습을 보면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국가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거나 "공직자의 당연한 업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거주할 집이 있는 사람, 시위에 나가지 않는 사람, 청와대 홍보수석의 전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자유로운 것일까? 위에 언급된 사례는 누군가 강제하는 상황에서 '나'의 자유가 억압받거나 자신이 처한 환경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 표면에 드러난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바로 자기검열이다. 자기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 외에 알기 어렵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 검열은 강제하는 힘없이 이루어진다. 스스로 자신의 표현을 검열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기억력이 나쁜 어떤 가금류에 비유하는 사람이 대통령을 더 이상 가금류에 비유하지 않게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표현을 삼갔는지를 보고 자기검열 여부를 의심해볼 수 있다.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 비유하기를 그만뒀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을 가금류에 비유한 누군가가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생긴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자는 자신의 생각이 변한 것이지만 후자는 자기검열을 의심해봐야 한다.

자기검열은 언어교정이 아닌 '침묵'이다

이 대목에서 자기검열의 '긍정적인 효과'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긍정적인 효과란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불건전한 언어문화'가 자기검열을 통해 '자동적으로 교정'된다는 견해다. 그러나 자기검열은 언어교정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의사표현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 '자기검열을 통한 건전한 언어풍토 조성'이라는 환상은 '상대방의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오직 생각할 자유만이 주어지고 말할 자유는 사라진다. 이 '언어교정'의 개념이 확장되면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자기검열로 수혜를 입는 사람들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만을 원할지도 모른다.

"판사님,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인터넷상에서 종종 이런 종류의 댓글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판사님 드립'이라 불리는 이 댓글은, 비판 댓글을 달다가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댓글은 주로 정부나 고위공직자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판사님, 이 글은 제가 아니라 저희 집 고양이가 썼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에 있는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고양이의 손을 빌리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위트 있게 표현한다.  이런 행동은 자기검열에 대한 냉소이자 작은 저항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정말 소송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다. 자신을 검열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라는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침묵한다.

정신적 자살을 조장하는 사회

사람들은 여러 상황에서 자기검열을 한다. 대표적으로 논란과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서 자기검열이 이루어진다. 자기검열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문제점을 수반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에서 일어난다. 불안감은 실제로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불이익을 받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 이런 사회에서 강자를 겨냥한 비판과 풍자는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다. 시위대를 폭도라 부를 수 있지만, 대통령을 폭군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이러한 자기검열의 원인은 권위주의와 관련이 있다. 자기검열은 권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신술이다. 침묵함으로써 더 큰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권위에 도전했다 불이익을 받은 주변 사례를 목격하고 자신도 그와 같은 불이익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다. 풍자화를 그리고 검찰 조사를 받는 예술가, 고위공직자를 비판하고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한 시민, 진실을 보도하고 해직되는 기자. 이런 환경은 자기검열이라는 암세포가 자라기 적합하다.

자유는 대부분 권리의 형태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누릴 때 생명을 유지한다. 그런데 자기검열은 표현의 자유가 작용하는 것을 막아버린다. 비극적이게도 그 생명활동을 직접 끊어버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검열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셈이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그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자살"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유를 헌법상에 명시된 하나의 권리로 봤을 때 자기검열은 정신적 자살에 해당한다.

자기검열을 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자기검열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이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멈추는 것이다. 자유를 누릴 권리는 모두에게 있지만, 나의 권리는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챙길 수 있다. 자기검열은 말 그대로 정신적 '자살(自殺)'이다. 자기검열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의가 아니라 자의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신적 자살을 하는 행위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권위주의적인 사회 환경이 자기검열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검열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권위주의가 만연한 사회는 사람들이 자기검열이라는 '정신적 자살'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는 국민들에게 "비판과 풍자할 자유를 내려놓으면 살려는 드릴게"라고 암묵적으로 이야기한다.

자유를 누리는 것이 자유를 지키는 길

권위주의를 조장하는 세력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니 국민을 권위에 순종하는 '노예'쯤으로 안다. 반면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있는 국민들은 정부와 공직자의 권위주의적인 행태에 불만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 어떤 국민도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못하게 사회를 이끌어 달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선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인 <자유론>에서 언론(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자유가 개인과 사회 발전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 말했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앞세워 오류의 가능성을 배척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권위주의적인 사회는 '권위'를 '절대적인 진리'로 앞세워 모든 오류의 가능성을 배척한다. 그 절대적 진리를 앞세우는 데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있다. 그들이 손에서 권위를 내려놓기 전까지 자기검열을 조장하는 사회는 바뀔 수 없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주기적으로 정부를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권위는 자유를 계속해서 잠식하므로 막연하게 기회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시민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자기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위가 자유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권위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저항이 된다. 얼핏 보면 자유를 위해 자유를 강제하는 모순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자유를 헌법상에 명시된 권리로 볼 때, 그것은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소중한 권리"이기도 하다.)

과거 교회의 권위(dogma)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듯이, 우리도 대통령을 비판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데 목숨까지 걸 필요가 없다. 이미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 자유를 쟁취해놨기 때문이다. 자유를 쟁취하는 것과 지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다.

권위주의가 팽배하는 오늘날, 시민의 의무는 자기검열을 거부하여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대학생입니다.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