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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앙마이 고산족마을
 치앙마이 고산족마을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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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휴가 때 갔던, 태국 치앙마이의 어느 고산족 마을이다. 기린같이 긴 목에 굵은 금색의 링을 목 끝까지 빽빽하게 줄줄이 걸고 있는 여인들이 많았다. 그들의 목도, 그들의 삶도 몹시 무거워 보였지만 그들에겐 그 무거움이 일상이고 역사였다.

우리 돈 몇 천 원의 소액이면 그들의 얼굴을 기념으로 찍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차마 돈 몇 천 원에 사람의 얼굴을 산다는 게 마음 불편해서 양해를 구하고 집안 내부만 살짝 찍었다.

 화롯불에 끓이던 차
▲ 고산족마을의 집 내부 화롯불에 끓이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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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외세의 직접적 통치를 받지 않은 드문 나라지만 국가간 패권 다툼은 잦았다. 그때 진 약소국, 패전국 소수 민족들이 비탈지고 높은 산에 모여 산 것이 고산족마을이 됐다. 그 수가 4천 명이 넘어서 각 소수 민족마다 다른 복장으로 민족 구분을 했을 정도란다.

자연환경과 국가정세에 따라 이동하며 사느라 정착감, 안정감 없는 삶 속에 있으며, 수공예 직물과 액세서리 제조, 판매로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치앙마이 곳곳의 길거리 좌판, 야시장에서 파는 수공예품의 상당 부분을 이들이 만들었다.

 핸드메이드 목공예 좌판 뒤에서 꿀잠하시던 쥔장
▲ 부처고 밥이고 잠이 먼저다 핸드메이드 목공예 좌판 뒤에서 꿀잠하시던 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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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공 장식품들
▲ 부엉이와 코끼리 수공 장식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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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집과 작은 마을을 형성해서 사는 그곳에서 우리나라의 달동네와 지하 집들을 생각했다. 가장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이 있는 곳은 '땅' 아래거나 위로 먼 곳이구나.

가라앉은 배, 바닷속, 햇살 한 줌 귀한 지하 집, 반대로 태양과 좀 더 가까운 옥탑방, 언덕 위, 산 중턱, 고공 크레인... 땅에서 아래로 멀거나 위로 먼 곳들이다. 이들의 소망은 땅 위로 올라오는 것, 혹은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일 게다.

지하 집은 습하고 햇볕과 바람 한 줌 느끼기 힘들어도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숨은 듯, 없는 듯' 살기 좋고, 옥탑방이나 달동네 역시 지상과 떨어져서 사는 건 마찬가지다.

둘 다 소외되고 가난하지만 지하 집은 '마을'이나 '이웃'도 꿈꾸기 힘든 폐쇄적 공간이다. 지하 집이 폐쇄적, 독거적 형태의 주거라면 언덕이나 산에 위치한 집들은 그래도 '이웃'도 있고 '동네'도 있어서 지하집 사람들보다 고립감이 덜하다.

사는 위치가 다른 그들의 같은 소망은 평지-'지상'으로 올라가는, 혹은 내려오는 것이리라. 최근 세상과 인간이 준 상처에 찌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산속으로 가는 경우는 제외하자.

 김광석 골목
 김광석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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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전'이란 말이 야구 경기 역전이 아니라 '인생 역전'으로 읽혔다.
▲ 동피랑 역전 '역전'이란 말이 야구 경기 역전이 아니라 '인생 역전'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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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트렌드화 된 '벽화마을' 같은 것을 봐도 죄다 높은 달동네 언덕진 곳, 큰 빌딩 숲 뒤쪽의 쇠락한 골목들에 있는데 가난을 낭만적,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놓은 모양새지 뭔가? 난 아직 쇠락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이들은 쉬는 날 '가난한 낭만'을 구경하러 가기도 한다.

'낭만적 그림'이 된 그들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래 살았지만 한 번도 높아보지도, 날아보지도 못 한 채 하늘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낮은지를 반어적으로 체감하고 체념하며 살기도 했으리라.

 가난한 골목길에는 꼭 있던 점집
▲ 지장왕사 가난한 골목길에는 꼭 있던 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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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지금처럼 숲을 이루지 않던 시절엔 한 동네에 고만고만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런 집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 동네엔 이런 '점'집들이 많았다. 전두환, 이명박이라는 이름 대신에 무슨 보살, 무슨 장군, 철학관... 이라고  붙어 있었다. 가난이 일상인 동네에선 '고난'도 친구라 그들에겐 이루거나 물리칠 '기원'이 많았을 것이다.

점집 부근엔 한결같이 '대나무'들이 무슨 수호신이나 상징처럼 있었는데, 넓은 숲에서 보는 대나무와 달리 점집 앞의 대나무들은 왠지 좀 무서웠다.

나도 십대의 대부분을 그런 곳에서 살기도 했는데 염색공장, 섬유공장 등에서 일하는 '공순이'라 불리던 언니들과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차장, 우리같이 가난한 과부네 식솔들이 한 마당 여러 방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더 어릴때는 지하 집에서도 몇 년 살아 봤고, 고등학교 다닐 무렵엔 가게와 방이 같이 달린 구조에서 '샷다문'도 아닌 '덧문'이라는 철문이 집의 현관이자 대문인 그런 집에도 있어 봤다.

가난한 동네에는 술로 가난을 잊어버리려는 놈들, 정신줄을 놓음으로써 비로소 행복해지는 놈들도 많아서 제정신이 아닌 그들이 한밤중에 문을 발길질하거나 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보거나 하는 짓거리에 공포와 두려움의 밤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 뒤 셋방 살이가 업그레이드 돼서 이층 독채 양옥집에서 살기도 했고, 천신만고 끝에 은행 도움을 받아 수많은 불빛 중 우리 집 불빛도 하나 갖게 되었으니, 아마도 빈민과 서민들이 산 거의 모든 주택 구조를 다 섭렵했겠구나.

<어셈블리>란 지난 드라마 중에 아래와 같은 내용, 대사가 있었다. 경찰공무원 면접 보러 온 취업 준비생들에게 면접관들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는 해고노동자(면접자 중의 아버지다)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한다. 대부분의 취준생들은 면접관들이 바라는 대답인 '생떼'라는 대답을 한다.

지방에서 올라와 몇 년 취업 재수 끝에 그렇게 바라던 시험에 합격하고 최종 관문인 면접장에서 옥택연은 합격증 대신 평소 못마땅해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외친다.

"생떼라고요? 그들은 땅에서 발붙이고 살 데가 없어서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겁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수험표를 떼고 면접장을 나온다. 아들은 취업 전선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자신(들)을 '심사'하는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왜 그 높은 곳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절망과 울분과 자멸감을 가지고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 옆에서 한 번도 자기집, 자기땅이 없어 본 사람들의 그 불안하고 소속감 없는 마음을 느껴본 적 없었던 사람들은 결코 모르리라.

'가난 일일 체험'을 시 사업으로 벌이려 하고, 살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오른 그곳에서 '한 끼에 5천만 원'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그런 마음을 느꼈던 적이 없던 사람들일 것이다.

예전에 여행 중 '골목'들을 좀 어슬렁거리고 다닌 적 있었다. 영화 촬영 많이 하기로도 유명한 그 골목들은 1960~1970년대 가난한 풍경과 비탈지고 좁은 골목, 계단들이 그대로인데 낮거나 높은 시멘트 담들의 풍경은 많이 변했다.

연탄재나 오줌발, 쓰레기 잔여물 등으로 오염됐을 벽들은 대형 화판, 갤러리가 돼 있었다.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그림에서부터 전문 화가가 그렸을 법한 예술적 그림까지 다양한 화풍으로 낭만화돼 있었고 벽 주인(혹은 세입자)들은 피사체의 한 대상이 돼 버렸다. 가난도 상품화된 세상이다!

또 한 곳은 벽화 마을, 달동네 중에서 '마을 공동화' 사업이 가장 성공한 곳으로 보였는데 원래 이곳은 공동묘지 위에 지은 집들이 모인 곳이었다. 내가 간 날 변두리 달동네라곤 하나 도심 동네에선 과하다싶게 까치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옛날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화장장을 만들면서 위령제가 자주 열렸고, 그때 남은 음식 찌꺼기가 까치밥으로 제공되면서 까치가 많이 몰렸단다.

두 곳은 지금 '한국의 산토리니', '한국의 마추픽추' 등으로 불리는데 나는 이 '한국의 뭐 뭐'라는 호칭이 참 마땅찮다. 한국의 시드니, 한국의 레고마을... 이 세상의 비경 또는 절경이라 이름 붙은 저- 먼 나라의 지명은 다 붙여 놓는다. 그중에 아무 곳도 가 보지 못했으니 뭐라 하진 못하겠으나 '어디의 뭐'라고 자꾸 갖다 데는 건 왠지 거기보다 못하다는 걸 자인하는 꼴 같고, 거기가 여기보다 낫다는 선망 같잖아. 여기는 여기고 거기는 거긴데.

아직도 입과 손에 안 익는 도로명으로 바뀐 지명이 많지만 벽화로 치장된 골목 지명은 아직 그대로인 곳이 많고 그 지명들엔 그들의 삶과 역사가 담겨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시드니니 한국의 레고마을이니 이런 것보다 '동쪽 벼랑 끝에 자리한 마을', '무덤 위에 지은 집들'이 더 좋다.

타인의 현존을 그저 관광 인증샷으로만 인식하는 방문자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겠지만. 남루한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어느 날 북적이는 관광객들을 피해 좀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림이 다른 곳보다 뜸하다 없어지던 그곳은 유달리 더 좁고 비탈졌는데 골목 안으로 갈수록 점점 더 그 폭이 좁아졌다.

 벽화골목을 따라 간 끝 길의 모습이다
▲ 막다른 골목 벽화골목을 따라 간 끝 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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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이었다. 지금도 어느 곳엔선가 저런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할 것이다. 차라리 이 벽들이 빨리, 어서 좁아져서 '압사'당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될 사람들....

연예인들의 가십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대중들의 온 귀와 눈이 거기 몰려 있는 한 쪽에는 아직도 외롭게 공중 철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 5천 만의 한 끼 식사를 할 때 50만 원의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재벌들이 가족간 경영권 싸움을 할 때 가족을 먹여 살릴 단돈 이백만 원을 지키기 위해, 물속에서 죽어간 내 자식의 죽음을 애통해하느라... 목숨 걸고 올라 간 사람들이 오늘도 있을 것이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80쪽

조세희 소설 속 '난장이'들은 글 밖 현장에서 아직,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고통스럽게 살거나 죽는다. 수많은 김진숙, 쌍용, 한진, 세월호의 난장이들이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땅에서 살고 싶다.

 영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굴뚝위의 난장이 영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감독 이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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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일부 여행과 조세희님의 소설, 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 받은 이미지와 생각들이 섞여 나온 것이다.



태그:#치앙마이, #고산족마을, #달동네, 지하방, #고공크레인, #난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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