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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 호수 가는 길. 초원길의 끝에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시원스런 호수가 나타났다. ⓒ 노시경
우리가 탄 차는 몽골 중부 아르항가이(Arhangai)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온통 사방이 초원인데 그 사이에 난 길의 흔적을 달려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드넓은 초원만 보고 있으니 얼마나 더 달려야 목적지가 나오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키 작은 풀들이 자라는 푸른 초원도 달리다가 풀이 거의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도 달린다. 가끔씩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말과 소, 양, 염소의 무리와 게르에 무덤덤해질 때쯤에 우리 차는 한 언덕을 넘었고,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어기 호수(Ogü Nuur)가 보이기 시작했다.

호수로 접근하는 길이 마치 구불구불한 강줄기처럼 호수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길이가 7km, 폭이 5km나 되는 큰 호수가 갑자기 눈 앞에 파고들듯이 다가왔다. 맑은 물 가득 찬 호수를 보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바다처럼 큰 호수라는 말은 과장일지 몰라도 분명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크기의 호수이다.

호수 반대편의 게르들은 아주 아득히 멀게 보인다. 나의 몽골친구 기사는 우리가 묵기로 한 게르 캠프를 찾아가는 길을 헷갈려하고 있었다. 호수를 만나는 곳에서부터 현지 몽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차를 세우고 길을 묻는다. 나는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우리 숙소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숙소가 호수를 바라다보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호수를 반 바퀴 넘게 돌면서 호수 주변을 모두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호수 변을 삥 돌면서 호수 주변 길을 따라갔다.

사람도 동물도 쉬어가는 '어기 호수'
목을 축이는 말들. 호숫가의 말들이 온순하게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 노시경
광활한 초원에서와 같이 드넓은 호숫가에서도 눈앞에 가깝게 보이는 거리가 실제 가보면 절대 가깝지 않았다. 공기가 깨끗해서 아주 멀리 있는 곳도 아주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호숫가에서도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는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크기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반대쪽 방향의 차를 보고 있으니 게르 캠프까지 가는 길도 얼마나 먼 길인지 알 수 있다. 호수는 넓고 길어서 사진기로 구도를 잡아도 호수의 극히 일부분만 잡히게 된다.

말들이 호수 안에 들어가 목을 축이며 쉬는 모습은 마치 몽골을 배경으로 하는 달력 사진 같이 아름답다. 늦은 오후 시간에 목을 축이러 온 미남 말이 잘생긴 여자친구 말과 한가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호수의 말들은 한없이 순해 보인다. 어려서부터 사람 손에 길들여졌기 때문인지 이 말들은 조용하고 까불지도 않는다. 어기 호수는 이 순한 말들에게 아주 훌륭한 휴식처이다.

이 어기 호수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Ulaanbaatar)에서 서쪽으로 약 320km 떨어져 있다. '어기 누르(Ogü Nuur)'라는 이름에서 '어기(Ogü)'는 일반 여성을 높여 부르거나 '손 위의 여성'을 뜻하는데 몽골어에서 누나, 언니보다 더 높은 어머니, 여사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어기'에 호수라는 뜻을 가진 '누르(Nuur)'가 붙어 '어기 누르'라는 지명이 되었다.

이 차갑고 깨끗한 호수는 초원지대와도 조화롭게 어울려서 몽골여행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 중의 한 곳이며 몽골인들도 휴가지로 즐겨 찾는 곳이다. 어기 호수는 일본의 황태자가 직접 이곳에 휴가를 다녀간 후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호수의 새들. 어기 호수는 세계적인 조류 탐사지로 알려져 있다. ⓒ 노시경
호수에는 물이 풍부해서 물고기뿐만 아니라 새들도 다른 곳보다 훨씬 많다. 실제로 전세계의 많은 철새가 이곳을 거쳐간다. 몽골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던 철새들이 여름철인 7~8월에 이 호수에 돌아와서 집합을 한다.

그래서 이 철새 도래지, 어기 호수는 세계적으로 조류탐사에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매년 조류학자뿐만 아니라 환경단체에서도 이곳을 자주 찾는다.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중요시하는 호수가 이 어기 호수이다. 오늘도 이 아름다운 호수에는 많은 새들이 날아와 목을 축이며 물고기를 잡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호수의 크기는 계속해서 줄어들어 가고만 있다. 같이 호숫가에 서 있던 몽골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몽골에서는 물이 풍부했던 호수들이 점점 사막화 되어가고 있어. 물이 말라서 사라져버린 호수도 있고 물이 남은 호수도 조금씩 조금씩 말라가고 있어."
"그러면 예전에는 이 어기 호수도 훨씬 더 컸었겠네?"
"호숫가 뒤의 저 언덕 보이지? 지금 이 호수변보다 훨씬 뒤쪽인 저 언덕까지 물이 가득 차 있었지. 어기 호수의 물이 말라서, 호수의 물이 초원과 닿는 부분이 점점 호수 안쪽으로 후퇴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몽골의 신문에 어기 호수가 말라가는 심각성에 대해서 글을 기고하기도 했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호수와 초원이 말라 죽지 않고 잘 간직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친구."
호숫가의 캠핑. 몽골의 한 젊은이가 차를 타고 와서 호숫가에서 여유 있게 캠핑을 하고 있다. ⓒ 노시경
호수 주변 곳곳에서는 레저 차량을 몰고 온 젊은이들이 차 옆에 텐트를 치고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저 차량 한 대와 텐트 하나 달랑 있는 젊은 시절의 여행.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 자유로운 몽골 젊은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낮은 몽골에서의 여가와 삶이 결코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런 캠핑 여행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내가 꿈꾸는 여행을 이곳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숙박할 게르 캠프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있었다. 내가 배정받은 게르앞에서 보면 게르 뒤편으로 잔잔한 호수가 보이는 모습이 일품이다. 문을 열면 호수가 바로 보이는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들뜬다. 게르 내부도 넓은 호수만큼이나 시원하게 넓다. 지금까지 숙박했던 게르 중에서도 내부가 가장 넓다. 더운 여름에 호수를 바로 앞에 두고 게르의 침대 위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 마음이 편안하다.

우리 게르의 오른쪽 게르에는 미국의 한 가족이 놀러 왔다. 이 가족의 남자는 웃통을 벗어젖히고 몽골의 태양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게르 왼쪽 게르에는 몽골인 여러 가족이 가족동반 여행을 와 있는데 야외에서 한참 저녁식사와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우리말과 억양이나 발음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흥겹게 호수에서의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호숫가의 게르 캠프. 게르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시원스럽고 아름답다. ⓒ 노시경
게르에 놀러 온 몽골인과 외국 여행자. 호숫가 게르에 놀러 온 여러 가족이 음식준비를 하고 있다. ⓒ 노시경
방음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게르 내부에서는 게르 주변에서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몽골인들의 이야기 소리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 하는 듯 가까이 들렸다. 몽골말이 참 한국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말 한국 단어와 똑같은 소리도 들려왔다.

"여보. 몽골 말이 정말 비슷한가 봐. 몽골에서도 '아가'를 '아가'라고 부르나봐."
"그래? 민족의 기원이 비슷하니 단어 중에도 같은 게 많겠지. 진짜 형제민족이라는 말이 맞나봐."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몽골말 사이에서 한국어가 섞여서 들리는 듯했다. 나는 내가 피곤해서 헛소리가 들린다고 아내에게 이야기 했다. 점점 한국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국 부부가 나누는 긴 대화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점점 이야기를 들어보니, 함께 놀러 온 세 가족 중에서 한 가족은 진짜 한국인 가족이었던 것이다. 울란바토르를 떠난 이후 처음 만난 반가운 한국 사람. 우리는 그들의 소풍에 끼어들지는 않고 간단한 인사만 했다. 왠지 이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는 그들의 소중한 휴식시간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게르의 침대에서 뒹굴며 쉬다가 게르 캠프 입구에 있는 샤워실에 샤워를 하러 갔다. 샤워실의 한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보니 샤워장 내부가 꼭 우리나라 수영장의 샤워장같이 생겼다. 호수 주변이라서 그런지 샤워 물도 시원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몽골의 초원에는 워낙 물이 귀한데 오랜만에 이렇게 시원하게 샤워를 하는 것도 사치같이 생각된다. 초원의 호수 앞에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호수가 보이는 게르로 걸어서 찾아가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호수가 보이는 게르에서의 행복한 시간
호숫가 산책. 몽골인 가족을 따라 여유 있게 호숫가 산책에 나가 보았다. ⓒ 노시경
나는 옆 게르가 조용해지자 게르 밖으로 나가 보았다. 게르 캠프에 있던 여행자들이 시원해진 호숫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넓고 깊은 호수는 물이 제법 차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차가운 호수 물 속으로 들어가서 물고기를 낚는 사람들이 있었다.

몽골 친구에게 들으니 이 호수에는 물고기들도 많이 살아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 강태공들이 낚시 줄을 던지기만 하면 조금 있다가 물고기들이 걸려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 호수에 물고기들이 많이 넘쳐나는 이유는 육류 고기가 풍부한 몽골에서는 최근까지도 물고기들을 잡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수에서의 낚시. 과거에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잡지 않았지만 지금은 호수에서 낚시도 한다. ⓒ 노시경
저녁 무렵 호수 주변에는 하루살이 떼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게르에서는 전혀 보이 않아서 호수 바로 앞까지 접근해 보았다. 호수 바로 앞에는 엄청난 수의 하루살이 떼가 있었다. 마치 철새들의 군무와도 같이 호수 앞 한 지역을 시커멓게 덮고 있었다. 순간 내 바람막이 상의에 하루살이 수십 마리가 붙어버려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손으로 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하루살이들이 징그럽게 옷에 붙어 있어서 탈탈 털어내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사진기 렌즈에도 하루살이들이 붙어서 렌즈도 한참을 닦았다.

나는 하루살이로부터 도망쳐서 호수가 초원 쪽으로 깊게 들어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나를 기겁하게 하는 하루살이 떼는 없고, 호수의 시원한 바람만이 느껴졌다. 나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상쾌하게 어기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호수가 바위를 만난 곳에서는 바위가 깨진 자갈들이 호숫가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호수에 발을 담가 보았다. 여름인데도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졌다. 새들도 지는 해를 보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늦은 밤의 일몰. 구름을 물들인 일몰의 해가 호숫가에 붉게 타오르고 있다. ⓒ 노시경
여름의 해는 늦게까지 지지 않았다. 9시가 넘어 해가 지는, 느긋한 일몰 시간이 내 눈앞에서 조금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해는 호수 앞의 산 위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고, 구름은 황혼의 아름다운 실루엣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해는 한국에서보다 눈 앞에 더 가까이 있었고 더 붉고 시원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일몰의 해가 타오르자 몽골 어기 호수에 담긴 하늘도 붉게 타오른다. 해가 호수 서쪽의 산 뒤로 넘어가자 석양의 붉은 빛이 호수 위에 띠를 두른 듯이 남아 어른거린다. 사라져 가는 햇살이 호수의 붉은 물이 되어 호수의 속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많이 봐온 황혼이지만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몽골에서 자연을 보고 있으면 '지구'라는 단어가 생각나고, 지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석양의 호수. 호수에 비친 석양의 붉은 빛이 잔잔히 흘러가고 있다. ⓒ 노시경
해가 사라지자 호수 주변은 꽤 쌀쌀해졌다. 잠시 게르에 밤새 때울 장작을 넣어두고 난로에 불을 피웠다. 게르의 난로가 후끈해지자 나는 다시 게르 밖으로 나왔다. 호수 옆이어서 밤의 온도와 낮의 온도 차이가 상당했다. 나는 다시 게르 안으로 들어가서 긴 팔 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내가 호숫가를 산책하는데 나의 몽골 친구도 그 밤의 호숫가에 있었다.

"하늘에 박힌 저 수많은 별들이 보이니? 오늘 별들이 가장 잘 보이지? 정말 대단하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빛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감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나는 몽골 친구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두칠성이 머리 바로 위에서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검게 변한 호수 위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게르 캠프의 어떤 사람들은 별을 바라보며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밤의 호숫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

태그:#몽골, #몽골여행, #어기 호수, #게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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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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