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평범한 가족이 작당 모의해 하는 짓이 납치, 감금, 고문, 협박, 살인 행각이다.

평범한 가족이 작당 모의해 하는 짓이 납치, 감금, 고문, 협박, 살인 행각이다. ⓒ (주)더블앤조이픽쳐스


전직 고위 공무원인 아버지, 퇴직 후에도 여러 전·현직 공무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족들에게는 다정다감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다. 매일 아침 집 앞을 청소하며 오가는 사람들과 다정하게 인사도 한다. 어딜 가든 환영받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큰아들은 전도유망한 럭비 선수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인기도 단연 많다. 집에서도 훌륭한 아들로 가족의 자랑이다. 큰아들을 포함한 셋째 아들, 넷째와 다섯째 여동생도 모두 아주 잘 지낸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전혀 없을 듯한 가족의 전형이다. 다만 둘째 아들이 해외로 가서 연락이 없다.

그런데 그런 가족이 작당 모의해 하는 짓이 납치, 감금, 고문, 협박, 살인 행각이다. 보고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이 가족은 실재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콘텐츠로 소개되었고, 드디어 영화로도 소개되었다. 영화 <클랜>이다.

영화는 1982년부터 1985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푸치오 가족'에 의한 납치 사건을 바탕을 재구성했다. 믿을 수 없는 이 사건, 이 가족의 속사정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속사정과 궤를 같이 한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는 군사정권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군사정권은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 3만여 명을 상대로 테러, 고문, 조작, 납치, 살인을 일삼았다. 푸치오 가족의 가장 아르키메데스는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고위 공무원으로서 군사정권이 자행한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개인에 천착하여 실화에 접근하다

 집단 최면에 빠진 듯한 푸치오 가족.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이해하거나 옹호할 수 없다.

집단 최면에 빠진 듯한 푸치오 가족.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이해하거나 옹호할 수 없다. ⓒ (주)더블앤조이픽쳐스


영화는 이 실화에 어떤 식으로 접근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분히 영화적으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실화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사이 사이의 심리를 재구성한 듯 하다. 대표적으로 아버지 아르키메데스와 큰아들 알렉스의 심리를 그렸다. 반면 당시의 시대와 이어지는 면면은 잘 보이지 않고 개인에 천착했다. 이런 접근 방식은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는 내내 불편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전·현직 공무원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수하인들과 일견 조직적으로 납치 행각을 벌인다. 처음에는 큰아들 알렉스의 친구를 납치해 고문하고 가족들에게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결국 죽여버린다. 알렉스를 의심했다는 명목으로 죽인 것이었다. 그는 그 무엇보다 '가족'이 최우선이라는 신조가 있었다. 설령 그것이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알렉스는 아버지가 납치까지만 하고 살인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고서 괴로워한다. 괴로워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름 아닌 가족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또 만져보지도 못한 엄청난 돈을 가질 수 있단 것을 알게 됐기에 계속 협조한다.

다른 가족들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일에 협조하여 행동에 옮기지는 않지만, 집안에 감금한 피해자들의 신음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다. '가족을 위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니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균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완벽하리만치 단란한 가족, 그러나 집단 최면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시대를 보여줬다면 좋았을 영화

 '악의 평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당시 시대상과 결부하지 않은 것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악의 평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당시 시대상과 결부하지 않은 것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 (주)더블앤조이픽쳐스


영화는 이 가족이 범죄를 저지를 때 의도적으로 감각적인 연출과 음악을 선보인다. 이를테면 일련의 납치, 감금, 고문, 협박, 살인 행각을 알렉스의 일상(데이트와 섹스, 럭비 경기)과 대비시키는 교차편집을 선보인다든가, 경쾌하고 다소 코믹한 음악을 넣는 방식이다.

어쩌면 감독은 독일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 싶다. 역사 속 악행은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주장 말이다. 악마는 악마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지 않는다. 진짜 가해자, 진짜 나쁜 사람은 일개 가족이나 개인이 아니라 시대이자 구조, 권력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과 이 가족의 일상이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영화는 시대를 설명하고 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사건을 보여줄 땐 시대가 보이지 않는다. 도망가고 있는 듯하다. 탁월한 연출력을 가지고 흥미로운 사례에서 사례 그 자체만 쏙 빼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영화를 보고선 자연스레 아버지, 아들, 가족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일제 시대 친일 행위를 한 것을 두고, 온전히 개인의 탓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는 별다른 악의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반드시 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라 착하고 평범한 사람도 문제 의식 없이 친일파가 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진짜 나쁜 건 친일파 개인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물어야 할 죄는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클랜> 역시 이 가족에게 혹여나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개인에 집착한다.

영화 자체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연출도 빼어나고 연기도 좋으며 음악과 의상과 배경도 흠잡을 데 없다. '영화는 영화다'라고 말하면 그만일지 모른다. 문제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고, 하필 그 실화가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들의 악마적 행위를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한구석도 배치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각에 실제로도 가족이 큰 역할을 했다고 치더라도, 가족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울 만한 건 아니었다. 훨씬 더 무겁고 덜 감각적으로 그들의 행각을 조명하는 영화가 돼야 했지 않았나 싶다.

 영화 <클랜>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 <클랜>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 (주)더블앤조이픽쳐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기자의 개인블로그(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클랜 푸치오 가족 악의 평범성 시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