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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지하철을 타고 가다 친구 전화를 받았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여자인 친구와 말다툼을 했다고 했다. 강남역에서 살인이 벌어진 기사의 제목이 문제였다.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제목인지 아닌지를 두고 감정섞인 말이 오간 모양이었다. 아직 이 사건이 무슨 일인지 몰랐던 터라, 언론의 일반적인 사건기사 제목 처리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친구와 나는 여성분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올해 들어 SNS에 여성혐오 관련 게시글이 올라오지 않던 날이 있었던가. 다음 날 아침 페이스북을 보고서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강남역 10번 출구가 포스트잇으로 덮였다. 타임라인은 이 사건에 대한 추모와 비평으로 채워져 있었다.

젠더 문제는 이제 기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메갈리아 논란' 이후, SNS에서는 작은 외침들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기사로 다루기에 의미가 부족하다며 감히 잣대를 내려온 사건들이다. 갈등이 묵어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묵은 갈등은 좋은 기사 소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남녀차별이 존재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루는 우리가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든 말이다. 매스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장소는 많이 붐비는 환승역 입구다. 오후 4시의 그곳은 언제나와 같이 붐비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토익학원 가는 길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이다. 누군가는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러 갈 것이고, 누군가는 애인과 반가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익숙한 계단을 오르며 인파에 짜증을 느끼면서 발걸음을 빨리 해야 하는 곳이다. 그 입구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멈춰서 있었다. 아침에 본 사진에서는 맨 위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이 어느새 가운데로 내려가 있었다. 포스트잇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3시간이 지나자 흰 국화가 바닥을 덮었다.

오후 7시까지 세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멈춰 섰던 사람들은 10번 출구 유리벽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말을 듣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예비군복을 입은 남성, 가방을 메고 학원 유인물을 들고가던 남성도 있었다. 하지만 다수는 여성이었다. 사람들은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방송 카메라 오고 난리났다"며 무심하게 통화하던 여성, 학원에 늦은 듯 뛰어가는 남성들의 물결 사이에서 섬과 같았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 입간판에 붙은 대자보.
 강남역 10번 출구 앞 입간판에 붙은 대자보.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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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강남역 10번 출구를 만들었는가. 법조계에 있는 지인을 10번 출구에서 만났다.

"여성은 한국에서 살면서 최소 세 번은 성추행을 당한다. 지하철을 타면서 뒤를 잡히고, 밤길을 걷다가 기분 나쁜 일을 당한다."

여성인 그가 남성인 필자에게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당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포스트잇을 읽었다. "5월 17일 새벽 1시, 나는 집에서 자고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수많은 포스트잇들 중 #살아남았다가 가장 많이 띄었다. "살女(려)주세요, 살아男(남)았다"가 핵심이었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생각하던 그 내용이었다. 여전히 실탄 사격장에서 묻지마 살인을 당한 예비군에 빗대며 머리로만 저 문구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놓고 수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같은 날 용의자가 조현병 환자라는 기사가 났다. 다시 사건을 찾아보니 어제는 목사를 꿈꾸던 신학도라는 정보도 보였다. 정치적 결집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규정을 지었다는 주장도 있다.

강남역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이 법리적으로 어떤 결론이 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강남역 10번 출구는 술렁이지 않았다. 주요 언론이 외면해 왔던 여성들의 무언가, 그리고 이것을 마음으로 공감해주던 남성들의 무언가가 강남역 10번 출구를 만들어 냈다. 오늘 현장에는 모든 방송 언론의 카메라와 수많은 일간지의 이름이 적힌 노트북이 보였다. 언론이 오히려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쫓고 있었다.

오늘의 강남역 10번 출구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메갈리아 논란 이후 젠더 차별과 논란은 계속됐고, 언론과 사회에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다. 차분하고 진지한 기획을 구상해서 갈등을 해소하고 중재했더라면 강남역 10번 출구는 없을 수 있었다. 그 전에 한국사회가 여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고통을 쌓아두지 않았더라면, 필자가 이해가 아닌 공감을 하는 일이었다면 강남역 10번 출구는 존재할 수 없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또 하나의 사건기사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쌓아왔던 여성들 마음 속의 무언가의 방아쇠를 당긴 것임에는 분명하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오늘 방아쇠가 되었다.


태그:#강남역 살인사건,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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