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배우 이제훈(32)과의 개인적인 인연 하나. 5년 만의 만남이었다. 독립영화 <파수꾼>(2010)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후 본격적인 상업영화 주연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했던 영화 <고지전>(2011) 때였다. 일대일 인터뷰 자리에서 서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주고받았고, 그 이후 멀찍이서 그의 연기를 지켜보는 입장으로 돌아갔다.

영화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아래 <탐정 홍길동>)으로 지난 4월 말 서울 삼청동의 모처에서 만난 그는 그때를 정확히 기억해냈다. 어깨동무 하고 사진까지 같이 찍었던 일까지 말이다. 표정은 더욱 밝아 보였고, 한껏 들떠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라고 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웰컴 투 더 이제훈 월드!

 배우 이제훈.

아슬아슬함과 위악. 배우 이제훈을 설명하는 주요 단어들이다. 분명 다른 30대 남자 배우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와 힘이 그에게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뜬금없이 과거 일화를 꺼내는 이유는 그가 지금 선보인 이 작품 때문이다. 군 제대 이후 그가 처음으로 입은 영화 캐릭터는 홍길동이라는 정체불명의 청년이었다. 엄마를 죽인 원수를 찾기 위해 한 마을을 전전하다 결국 복수의 마음을 접고 그 대상의 손녀와 온 마을 사람을 구하는 이 청년. 애써 속내를 숨기며 위악적인 행동을 보이는 모습이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파수꾼> 속 기태와 매우 닮아 있었다.

불안한 청소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애써 부정하던 기태는 이제훈의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였다.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치명적 매력이 바로 그에게 있었다. 그래서 반가웠다. 정작 본인은 "조성희 감독의 세계관을 너무 좋아해서 그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출연의 변을 밝혔지만, 기자 입장에서 본 작품 속 홍길동은 어쩌면 기태의 몇 년 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태가 자신에게 주어진 아픔을 이기지 않고 스스로를 파괴한 인물이었다면, 홍길동은 치열하게 그 아픔을 직시하다가 영웅이 돼 버린 인물이었다.

"조성희 감독님과 윤성현 감독님(<파수꾼> 연출자)이 친하다는 얘긴 들었어요. 근데 셋이 같이 만나진 못했어요. 조성희 감독님이 <탐정 홍길동>을 통해 구현하려는 세계를 윤 감독님이 지지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저에 대한 말을 많이 전했을 겁니다. 홍길동을 두고 만든 감독님의 세계를 전 지지해요. 저 역시 좋은 매개체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작품이 어떤 공식처럼 나오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는 상상의 세계를 다양하게 창조하는 데 일조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의적 홍길동의 이미지를 빌려 조성희 감독은 거대 국가 시스템을 툭 하고 건드렸다. 직접적으로 때리지 않는다. 홍길동의 시선으로 그 권력자들 앞에 때로는 비굴하게 굴기도 하다가 상관없는듯 한 발 비켜서기도 한다. 이제훈은 "정말 사악한 홍길동 버전, 무표정 버전 등등 같은 장면을 여러 버전으로 찍어가며 인물을 다듬어갔다"고 설명했다.

조롱하듯 한 방씩 툭툭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한 장면.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한 장면. 영화 속 홍길동은 분노하지만 그 분노를 타인의 것으로 돌리지 않는다. 애써 복수만 하고 뒤돌아 화면 밖으로 나가면 그만인데 그는 20년간 품어온 목표를 바꿔버린다. 복수자가 아닌 영웅이 되기로. 이 전복의 맛이 영화의 백미다. ⓒ CJ엔터테인먼트

그런 의미에서 조성희 감독은 상대에게 다가가 난타전을 벌이는 인파이터가 아닌 아웃복서에 가깝다. 이제훈은 충실히 그의 오른손이 된 셈이다. 미국 서부극을 연상케 하는 정체불명의 시골마을을 활보하며 광기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을 보기 좋게 조롱하다 한 방씩 날리는 모습이 그 덕에 더욱 통쾌하게 다가온다.

"신념이 있다거나 정의감으로 가득 찬 인물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 20년을 살아온 청년이죠. 솔직히 김병덕 할아버지(복수의 대상)의 손녀를 데리고 다니는 설정이 되게 잔인하다 생각했거든요. 본인이 느낀 고통을 똑같이 갚아주겠다며 그런 행동을 하는 주인공을 과연 관객들이 좋게 봐줄까 의심했죠.

초창기에 나온 <배트맨>에서 볼 수 있는 안티히어로 모습이 홍길동에게 있었어요. 개인적으론 시리즈물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어찌 보면 잔인한 사이코패스인데, 다행스럽게도 정의 편에 서서 나쁜 사람을 잡는 그 설정이 독특하고 신선하잖아요."

판에 박힌 지루한 작품이 아닌 특별한 작품에 기여하고 싶다는 게 그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탐정 홍길동>은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연기 한 두 해 하고 그만 둘 게 아니니까요"

 배우 이제훈.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 안에서 나름 도전해왔던 과거와 달리 이제훈은 보다 적극적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갈 예정이다. 여차하면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는 모습도 머지 않아 볼 수 있지 않을까. ⓒ CJ 엔터테인먼트

물론 그동안 그의 바람과 달리 갈등은 있었다. <건축학개론> <고지전> <파바로티> 등을 거치며 꾸준히 활동해온 건 맞지만 그의 마음엔 "대중이 사랑해주는 모습에 안주해야 하는가, 어떤 연기를 하는 사람인가" 류의 갈등이 매번 있었다.

"배우는 끊임없이 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지 않는 존재가 되려는 게 모든 배우의 꿈이에요. 그게 힘든 거죠.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작품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인물로 남고 싶은 겁니다. 제 입장에선 그간 택한 작품들은 도전이었어요. 이제훈이 마치 하지 않을 거 같은 작품에 던진 거죠. 지금까지 저란 사람이 이런 친구라는 인사를 해온 거라면, 이제부터는 신뢰를 줘야할 때라고 생각해요. 이젠 돈과 시간을 들여서 오신 분들에게 즐거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영화 <탐정 홍길동>과 드라마 <시그널>이 그의 입장에선 군 제대 후 복귀작이 됐다. "그간 내게 역부족이었던 작품이 있었던 걸 인정하면서 앞으론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이야기에 참여해 함께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자"는 또 다른 꿈도 그가 넌지시 밝혔다. 일종의 제작자 역할을 염두하고 한 말이었다.

"연기를 한 두 해 하고 그만 둘 게 아니니까요. 좋은 작가와 감독님이 있다면 같이 만들어가려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서도 자기만의 제작사를 가지고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려는 이가 있잖아요. 물론 배우가 연기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요. 사실 지금 조금이나마 작가와 시나리오를 주고받으며 뭔가를 발전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연출할 건 아니에요! (웃음) 자격이 없고요. 그건 정말 나중에 제가 온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그릇이 됐을 때나 꺼내봄직한 일이죠. 저도 좋은 한국영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니 그 안에서 꿈을 갖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청년의 에너지

그는 현재 청년이라는 존재에 푹 빠져있었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를 본 이후 시대의 역경과 사람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시그널>에 출연하며 정의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됐"다. 특히 이제훈은 복싱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사각의 링에서 정직하게 싸운다는 느낌인데,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그런 작품에서 청년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영화 이야기에 그는 지칠 줄 몰랐다. 인터뷰 말미 이제훈은 "연기 비판에 대해서도 충분히 들을 준비가 돼있다"며 "관객과 시청자들의 동의를 못 받는다면 더 잘해야 한다"고 연기관을 전했다.

과거의 다짐을 다시 꺼낸 건 그였다. "연기에 대한 고민은 하겠지만 흔들리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그가 말미에 덧붙였다. 그의 제2막이 어느 새 시작됐다.

 배우 이제훈

서른 중반을 맞이한 이제훈의 앞날이 더욱 궁금하지 않은가. 그의 전작 영화 <파수꾼>을 좋아한다면 <탐정 홍길동> 역시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이제훈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고아라 김성균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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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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