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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일상 속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 찰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야기, 멀리 떨어져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누군가가 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비슷한 사람이었다는 깨달음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주는 이야기,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다시금 기억하게 해주는 이야기...

귀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나와 많이 다르리라는 선입견 때문에, 힘들고 우울할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에, 혹은 단순히, 그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다.

여기, 한 이야기가 있다. 중증장애인들의 배움터, 노들야학의 이야기다.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문제를 겪으리라고 혹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상처를 가졌으리라고 여겨졌던 이들. 그래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통스럽기만 할 것 같고, 혹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까치수염, 2014)>의 전면개정판 <노란 들판의 꿈>(봄날의책, 2016) 앞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까치수염, 2014)>의 전면개정판 <노란 들판의 꿈>(봄날의책, 2016) 앞표지.
ⓒ 최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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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이질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노란 들판의 꿈>을 펼치는 순간,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이 책은 '손'들의 이야기다. 소매 안에, 주머니 속에, 등 뒤에 감추어져 있어 지금껏 잘 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손'들의 이야기. 야학을 처음 만든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장애인 인터넷 언론사 '비마이너'의 운영진, 청소년들의 동아리인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의 활동가들...

그뿐만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손'을 내민 대학생들, 실무자들과 상근자들, 그리고 교사들. 중증장애인들이 겪는 삶의 무게들을 다양한 방향에서 떠받쳐주고, 어려움들은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도록 내민 '손'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들야학의 이름처럼, "우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자는"(41쪽) 뜻으로 모인 '손'들이다.

또 다른 '손'들도 있다. 야학 학생들, 즉 중증장애인들이다. 전자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는 중증장애인들이 집단적으로 고용되어 있었고, 바로 이곳의 정립회관에서 야학이 처음 문을 열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 누구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자발적으로 하기 위해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서 야학의 문을 열었던 '손'들이 이 책의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다.

"정립전자라는 곳이 '우물 안 개구리' 생활이에요. 기껏해야 기숙사 앞마당만 왔다 갔다 해요. 그런데 야학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바깥세상 이야기를 듣게 된 거죠. 이제 누군가가 받쳐주니까 기댈 수가 있잖아요. 선생님들이 휠체어를 밀어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그렇게 바깥세상을 만나게 되고. 야학 다니고 나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방 얻어서 기숙사를 나올 때도 사람들이 "너 나가서 어떻게 살래?" 이랬는데 나는 자신이 있었어요. "나가서 살고 싶어. 한번 겪어보고 싶어." 그런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야학 다니면서 방 얻고 면허증 따고 기숙사에서 나와 독립을 했어요." (학생 안명옥의 말, 50쪽)

수많은 '손'들을 비로소 무대 위로 등장시킨 이 책이 아니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중증장애인 문제를 어렴풋이 인식하는 데에서 그쳤을 것이다. 이 '손'들은 그저 절망적이고, 서글픈 모양을 했다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즐겁게 이야기하며 일상 속에서 희망을 그러쥐는 '손'에 가깝다.

그렇게 보이고자 포장해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면면들을 옮겨놓으려는 저자 홍은전의 진솔함 또는 집요함(!)이 책 곳곳에 스며있다. "어느새 스토커가 되어" 여기저기 '추궁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이 책은 또 '기억'의 기록이다. 역사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노들장애인야학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가 꾹꾹 눌러 담겼다. 또한 아차산 언덕 위 야학을 둘러싼 온도와 습도, 그 모든 감각들이 책 안에서 생동한다.

말 안 듣는 교사들, 술자리 좋아하는 상근자들, 소풍과 일일호프, 단합대회, "웃긴 했는데 무슨 일로 웃었는지 모르겠다"고 적힌 학생일지까지, 별다를 것 없는 사소한 일상의 면면이 기억 속에서 차근히 담겨 현재로 배송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합시다>(2014)의 이 의 개정판이라 할 수 있는 <노란 들판의 꿈>은 잊을 만하면 벨을 누르는 반가운 계간지 택배처럼, 다시금 독자들 앞에 놓였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거라는 환상을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능력이 있다는 약간의 환상을 품어주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이 구멍 많고 이음새 투박한 이야기를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1교시 - 배움' 중에서, 37쪽)

<노란 들판의 꿈>은 노들야학이 걸어온 길을 연대기 순으로 무미건조하게 정리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는 생동하는 목소리들이 들어있고, 움직이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들어있다. 저자 홍은전의 섬세하고 재치 있으며 따스한 문체는 덤이다. 그 덕에 책을 읽는 내내 웃고, 울고, 다시 웃기를 반복할 수 있다.

운동과 투쟁이 늘 비장하고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장애를 지닌 이들이 늘 시혜의 시선으로만 바라봐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처럼 위태로운 삶임에도, 노력하는 만큼 방황해야 한다 해도,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과 '일상'을 꾸려갈 수 있도록 맞잡는 손들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조금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교시 '배움'부터 5교시 '뒤풀이'까지 읽어가면서, 군데군데 '쉬는 시간'도 엿보면서 말이다. 천천히, 즐겁게, 함께. 우리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얼까.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노들은 '어떻게' 이 운동에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될 수 있었을까.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 2001년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노들의 가슴 속에 일었던 작은 불씨들은 어떻게 지켜지고 번져갔을까. 나는 그것이 단지 노들이 '대중들의 공간'이거나 언제든지 타오를 준비가 된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했다면 불은 쉽게 꺼졌을 것이다. 불씨가 불꽃이 되고 불길이 되는 과정, 대중이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힘의 비밀, 나는 그것이 노들야학의 지난하고 지난하고 지난했던 수업과 일상 속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142쪽)


노란들판의 꿈 - 그들의 배움, 그들의 투쟁, 그들의 일상

홍은전 지음, 노들장애인야학, 봄날의책(2016)


태그:#봄날의책, #노들야학, #노란들판의꿈, #홍은전, #중증장애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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