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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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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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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청년이다. 맨주먹 하나로 밑바닥 인생을 헤쳐 나가고 있다. 그런 그를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이제는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전설 속 챔피언이 등장한다. 우연한 기회로 둘은 마주치고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서로의 진심을 알아본다. 그리고 청년은 사각의 링 위에서 펼쳐질 자신의 꿈을 위해 남은 인생을 건다. 플롯에 충실한 권투 영화의 시나리오다.

당연히 주인공 청년의 아침 운동 길엔 첼로 가방을 멘 여대생이 등장하고,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청년을 응원하기 위해 흰 우유를 준비할 것이다. 또 지극히 당연하게 전설 속 챔피언인 사부는 심각한 불치병을 앓고 있으며, 상대 선수는 반칙을 서슴지 않는 파렴치함을 보일 것이다. 또 계속해서 코너에 몰리던 주인공이 필살기 한방으로 극악무도한 상대를 때려눕히면 응원석의 첼로 여대생이 눈물을 주룩 흘리는, 너무도 당연한 결말을 보일 것이다. 이쯤 되면 완벽하다.

'이렇게 늙어가겠구나' 생각하던 나, 체육관을 찾았다

 권투용 헤드 가드와 글러브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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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짐작들 하셨겠지만, 이번 주제는 권투다. 유년 시절, 사내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멋진 복서. 주말의 명화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던 <록키>나 <챔프>가 아니더라도 <무당거미>(허영만)와 <지옥의 링>(이현세) 같은 권투 만화를 통해서든, 하다못해 <유머 1번지>의 헝그리 복서 심형래씨를 통해서든 다채로운 색상과 선 굵은 동작의 권투는 깊은 잔영을 남겼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1980년대는 한국 권투의 최고 중흥기였다. 장정구, 박종팔 등 세계 챔피언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권투를 시청했다. 영화 <챔피언>으로 유명한 비운의 챔피언 김득구 선수도 기억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권투는 우리 곁에서 멀어졌다. 현란하고 자극적인 이종격투기에 밀렸다는 말도 있고, 헝그리 정신이 사라짐과 더불어 권투도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68년 만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될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온다.

나에게도 복서는 하나의 로망이었다.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주먹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멋들어지게 샌드백을 칠 수 있다면 덩크슛 한 번 하는 것보다 더 짜릿할 것 같았다. 링 위에서의 혈투 끝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챔피언 벨트를 바치고 그녀의 품에 쓰러지는, 그런 영화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물론 그런 다음 날이면 왠지 모르게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느낀 어느 날 문득, 더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무얼까 생각하게 됐다. '점점 몸이 말을 안 듣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오르고, 다리는 점점 가늘어지고, 그 살들이 모두 배로 쏠리는 기현상이 나타나면서 그냥 늙어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퍼뜩, 권투 생각이 났다.

몇 달간의 망설임 끝에 권투 체육관에 등록하러 갔다. 운동이라는 걸 해본 사람은 안다. 할인받으려고 3개월 등록해놓고, 세 번 쯤 갔다가 운동화만 괜히 두고 와서 후회한다는 것을. 혼자서는 꿈도 못 꿀 일임을 알기에 관비 50%지원을 미끼로 직원 넷을 한꺼번에 꼬드겼다. 단,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안 가면 지원금을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고맙게도 모두 덥석 물어줬다.

권투 배운지 두 달, 제법 자세가 나온다

저녁 시간대에는 일 마치고 운동하러 오는 직장인들과 초중고 학생들로 체육관이 붐빈다.
▲ 열심히 운동중인 관원들의 모습 저녁 시간대에는 일 마치고 운동하러 오는 직장인들과 초중고 학생들로 체육관이 붐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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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배울 거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다이어트 복싱이나 뮤직 복싱 같은 퓨전 운동 말고 정통 권투를 배울 생각이었다. 다행히 조금 떨어진 곳에 챔피언 출신의 관장님이 직접 지도하는 체육관이 있었다. 땀 냄새 짙게 밴 허름한 체육관과 그 체육관을 지키는 하얀 진돗개 한 마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권투를 어설프게 배운 이들을 통해 알려진 잘못된 진실은 한 달 내내 줄넘기만 시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진실 반 거짓 반이다. 전체 한 시간에 이르는 운동 시간 중에 줄넘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 건 사실이다. 권투라는 운동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뛰어야 하므로 초반 하체 강화를 위해서 줄넘기는 필수 코스다.

그렇지만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줄넘기만 시킨다는 것은 <취권>의 사부가 성룡에게 1년 동안 물동이 져오기만 시키는 장면에 익숙한 구시대적 사고의 고정관념이다. 요즘 그렇게 가르쳤다가는 관비 환불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첫날부터 잽과 스트레이트도 배우고, 짬 날 때마다 샌드백도 쳐볼 수 있다.

물론 처음 한 달 동안은 힘들었다. 일주일에 세 번 채우기도 힘들었고, 안 쓰던 종아리와 발목 근육이 당기고 아팠다. 그래도 함께하는 열등생 동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나름대로 줄넘기에 기교도 부리고, 모심는 동작을 연상케 하던 잽 동작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두어 달이 지난 요즘, 이제는 제법 자세가 나온다.

사이다에 비할 수 없는 펀치의 시원함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스파링 장면. 그 뒤로 70년대스러운 관훈이 보인다. 나를 이기자!
▲ 스파링 장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스파링 장면. 그 뒤로 70년대스러운 관훈이 보인다. 나를 이기자!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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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운동으로 권투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병행하고, 하체를 튼튼하게 해주고, 민첩성과 순발력을 키워주며, 운동량이 많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는 등등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있을 것이다. 득도의 경지에 오른 듯한 15년 차 관장님의 말을 빌려보자면 "낯빛이 어둡고 눈빛이 불안했던 사람들이 1년 정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나면 활력을 되찾아 부처의 온화한 미소를 지니게 된다"는데, 검증된 바는 아니다.

내가 발견한 권투의 가장 좋은 점은 스트레스의 해소다. 기본자세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샌드백을 치게 되는데, 그때의 시원함은 사이다와 비할 바가 아니다. 잽과 스트레이트만 배우고도 신나게 샌드백을 두드릴 수 있다. 묵직한 샌드백을 향해 날리는 주먹에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감과 벽돌처럼 쌓여있던 내 안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실어 보낸다.

뱃살은 아직이지만... "나 권투 배운다" 배짱부릴 수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면 얼굴빛이 환하게 변한다는 데,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
▲ 권투 두달만에 눈빛이 달라진(?) 필자의 모습 꾸준히 운동을 하면 얼굴빛이 환하게 변한다는 데,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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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 권투를 배우고 내 몸에 나타난 변화는 사실 크지 않다. 줄넘기를 하다 보니 숨이 차서 담배를 끊었고, 종아리가 좀 단단해졌고, 뜀뛰기 동작이 좀 수월해졌으며, 몸이 가벼워진 정도랄까? 기대했던 뱃살 빼기는 아직 무소식이다. 이러한 신체적 변화 말고 달라진 게 있다면 학교에서 맞고 온 아이에게 "우리 아빠 권투 배운다고 전해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과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겨우 권투 두 달 배워놓고 취미랍시고, 떠들어 대는 꼴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취미라는 건 지금 현재 내가 즐겁고 재미있어 하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말기 바란다. 언젠가 생활체육인으로 링 위에 서게 될 날이 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저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며 땀을 흘리는 지금의 내 모습이 대견하고,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이런 내가 기특할 따름이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잊고 지낸 당신의 로망에 불을 지펴라!

 세월의 흔적을 품은 권투 글러브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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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4월 15일자 <영남일보> 주말 매거진, 남자의 취미 코너에 실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송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권투, #챔피언, #지옥의 링, #무당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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