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먼저 울지 마라."

< K팝스타 >나 < 슈퍼스타K >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슬픈 발라드곡을 슬프게 부르는 참가자들이 듣게 되는 비판인데, 언뜻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왜 가수는 자기 노래에 감정을 담으면 안 되는가? 이유가 있다. 가수가 자기감정에 취해 버리면, 청자가 감정을 느낄 여지가 사라져 버린다. 스스로 슬픔을 느낄 기회를 잃고 가수에게 감정을 강요당한다는 느낌만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슬픈 곡이라도 담담하게 불러야 하는 이유이다.

담담하지만 더 아픈 '보여주기'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 중 한 장면. 보다시피 사울 주위의 배경은 뿌옇게 보인다

▲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 중 한 장면. 보다시피 사울 주위의 배경은 뿌옇게 보인다 ⓒ 그린나래미디어㈜


먼저 울지 않는 건 가수만이 아니다. 근래에 본 영화 <사울의 아들>과 책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아래 <쥐>) 또한 그러했다. 두 작품은 많은 차이점이 있다. 전자는 영화이자 허구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만화이자 실화이다.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사울의 아들>의 사울이 그렇고, <쥐>의 블라덱이 그렇다.

두 작품 모두 그 아픔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두 작품 중 그 담담함이 더 돋보이는 건 <사울의 아들> 쪽이다. 시체 처리반으로 일하던 중에 아들의 시신과 마주하게 되는 사울의 경우가, 풍문으로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블라덱의 경우보다는 더 처참할 테니까.

<사울의 아들>은 극단적인 영화다. 영화 내내 집요할 정도로 카메라는 주인공 사울만을 쫓는다. 그 때문일까. 사울 주위의 풍경들은 거의 항상 뿌옇게 비친다. 그의 주위에 일어나는 수많은 참상도 모두 실루엣으로만 보일 뿐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다른 작품들에서는 집중해서 다룰 장면들임에도 말이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관객들에게 사울이 처한 상황을 체험시켜 주려는 목적이다.

뿌옇게 보이던 풍경이 잠깐씩 명확해 보일 때가 있는데, 사울이 아들의 시신을 볼 때와 그것을 매장하는 데 도움이 될 인물들을 만날 때이다. 즉 아들의 시신을 제대로 매장해준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울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다.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울은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의 목숨이 걸린 탈출 계획은 뒷전이고 아들의 장례를 주관할 인물만을 찾아다닌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사울은 슬픔을 나타내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자기 목숨마저 돌보지 않는 필사적인 행동과 평소 무표정하다가도 유일하게 아들의 시신을 볼 때만 웃는 장면을 보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답답한 화면이 더해져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의 상황을 체험하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나의 경우 "이 영화에서 홀로코스트는 죽은 자식을 묻어줄 수조차 없다는 설정을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라는 상황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보여주기는 힘이 있다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 <쥐>의 표지 사진. 모든 등장인물들이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더러운 쥐라고 비하한 것을 풍자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

▲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 <쥐>의 표지 사진. 모든 등장인물들이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더러운 쥐라고 비하한 것을 풍자하려는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 ⓒ 아름드리미디어


<쥐>는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다. 예전 팟캐스트 방송(☞바로 가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쥐>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블라덱의 체험과 그것이 어떻게 그를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그의 첫째 아들이자 작가인 아티 슈피겔만의 형 리슈의 죽음은 지나가는 소재로써 다뤄질 뿐이다. 그나마도 감정의 묘사는 적은 편이다. 성급한 사람이라면 블라덱이 감정이 모자란다고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소회는 담담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블라덱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무리도 아니다. 노인이자 병자인 그에게 장시간 발언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만 쉬어야겠다고 말하면서, 자기 아들이자 인터뷰어인 아티를 다음과 같이 호칭한다. 리슈라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고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무덤덤해 보였던 그가 실은 평생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담아왔음을 보여준다. 그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을 블라덱의 아픔과 회한을, 단 한 장면으로 표현한 셈이다.

'보여주기'라는 말이 있다. 작가·제작자의 설명이 아닌, 상황이나 행동의 묘사를 통해 독자/시청자가 스스로 이해하도록 하는 기법이다. 직접 설명하는 '말하기' 기법보다 더 세련된 방법으로 감동을 주기 때문에, 많은 현대의 작가·제작자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공감은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닌 감정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니까. 설명은 정보나 주장을 전달하는 데 유용하지만 동시에 매우 직접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상상력이나 주관을 펼치는데 직접적인 표현은 방해될 수밖에 없다.

작년 한 사진이 인터넷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아일란 쿠르디라는 시리아 난민 소년의 주검이 바닷가에 떠내려와 있는 사진이었다. 그전까지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에 관해 설명하던 어떤 글보다도, 이 사진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난민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라는 여론에 의해 유럽 연합이 난민 쿼터제를 추진했다. 보여주기의 힘. <사울의 아들>과 <쥐>의 가치 또한 여기에 있다. 슬픔은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울의 아들> 포스터 상영관이 없어서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에까지 가야했다. 이런 훌륭한 영화가 널리 상영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 <사울의 아들> 포스터 상영관이 없어서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에까지 가야했다. 이런 훌륭한 영화가 널리 상영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덧붙이는 글 <쥐 The Complete Maus 합본>(아트 슈피겔만 지음 / 권희종·권희섭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펴냄 / 2014.06. / 1만8000원)
사울의아들 홀로코스트 보여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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