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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8번 출구 앞 농성장에 겨울은 일찍 찾아왔습니다. 삼성의 높은 건물이 해를 금방 가렸고, 그늘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비닐 두 장도 경비와 한참을 실랑이하다 겨우 친 건데, 그마저도 경찰과 구청 직원이 와서 걷으라며 횡포입니다.

'반올림'이 강남역 8번 출구에 농성장을 차린 이유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반올림 농성장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다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반올림 농성장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다
ⓒ 천주교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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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 황상기씨와 삼성LCD 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으로 10년째 투병중인 한혜경씨, 그리고 그의 어머니 김시녀씨가 이 추위에 그 농성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삼성의 기만과 오만이 이 추위보다 더 몸서리쳐진다며, 삼성이 삼성직업병 문제를 올바로 해결할 때까지 거리에 있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영하 10도를 거뜬히 넘어가는 날씨에 몸 상하면 어쩌냐고 걱정하며 따뜻한 핫팩과 음료를 건네며 연대했지만, 삼성은 아랑곳하지 않던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반올림이 강남역 8번 출구 앞에 농성을 시작한 건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삼성이 회피하며 일방적으로 '보상위원회'를 꾸렸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삼성이 먼저 제안했던 교섭이었고, 1년 전 삼성이 도입을 강행했던 조정위원회였음에도 '노동인권선언과 공익 법인을 통한 보상과 재발방지대책 마련' 권고안이 나오자, 삼성은 권고안을 무시하고, 대화의 주체인 반올림과는 어떠한 논의도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보상위원회'를 꾸렸습니다.

가해자인 삼성이 자신들 마음대로 기준을 세워 피해자를 선별하여 심사하고, 집행까지 한다고 하니 반올림 피해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올림이 요구한 "진정성 있는 사과, 배제 없는 보상, 철저한 재발방지대책"에 대한 논의는 어느 하나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연말이 가까이 오자, 삼성은 이미 150명이나 신청했다며 삼성직업병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홍보했습니다. 언론도 적극적인 공모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던 크리스마스 이브. 선물 같은 소식이 비닐 농성장에 전해졌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인권상 수상 소식이었습니다.

속초에서 서울 강남 삼성본관 앞, 근로복지공단, 반올림 사무실만 오가던 황상기 아버님도 모처럼의 명동행에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춘천에서 서울을 오갔던 혜경씨 모녀도 명동은 처음이라며 "우린 반올림 덕분에 서울 곳곳에 안 가본 곳 없지요~" 라며 신나하셨습니다. 명동역에 내려 한참을 혜경씨 휠체어를 끌며, 밀며, 하얀 입김 불어가며 수상식이 열린다는 명동성당을 오르는데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하십니다.

그 뒷모습을 보니, 아. 우리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신나게 지냈구나 싶었습니다. 숙연해졌습니다. 혜경씨가 미사 내내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잘못된 삼성이 사과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요. 불편한 내 몸이 조금이나마 나아서 사랑하는 우리 엄마 편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요. 간절한 그녀의 기도만큼, 이돈명인권상 시상식은 경건했습니다.

힘이 된 이돈명인권상 수상

5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 인권상 시상식에서 뇌종양으로 10년째 투병중인 혜경씨가 미사드리는 모습
 5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 인권상 시상식에서 뇌종양으로 10년째 투병중인 혜경씨가 미사드리는 모습
ⓒ 천주교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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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은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사회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노동권과 건강권의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이 반도체·전자산업 노동현장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인권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습니다.

제5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인권상을 반올림에 드리며 인권보다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해온 일부 기업들과 그와 같은 기업들에 대해 적합한 제지를 하지 않았던 우리 사회에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리고자 합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크나큰 비극을 안고, 그에 대한 진실을 찾고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지난한 싸움을 이어온 직업병 희생가의 가족들, 그리고 반올림으로 활동해온 모든 분들께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 5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자 선정 이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반올림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차가운 비닐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활동가와 다른 피해자들 너무 수고 많습니다. 반올림이 요구한 '진정성 있는 사과, 배제 없는 보상, 철저한 재발방지대책' 이 세 가지를 삼성이 약속할 때까지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따뜻한 관심과 연대 부탁드립니다."

황상기 아버님이 이렇게 수상소감을 전했습니다.

수상 후인 1월 12일, 사과·보상·재발방지대책의 세 가지 삼성반도체 교섭(조정) 의제 중 "재발방지대책"에 대한 것만 삼성과 합의했습니다. 삼성은 여전히 자체 보상과 내용 없는 사과를 강행하며 남은 두 의제 논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삼성직업병 문제가 얼른 종료되길 바라는 삼성과 이에 동조하는 언론에도 불구하고 반올림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혹한을 뚫고 농성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반올림은 농성장 맞은편에 걸린 삼성반도체와 LCD에서 일하다가 각종 암과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려 돌아가신 75명의 명단을 쉽게 거둘 수 없습니다. 반올림에 제보된 221명의 고통, 잊을 수 없습니다. 사과와 보상이란 남은 두 의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영하 17도까지 떨어진다는 주말 난방대책을 마련하며 농성장을 지킵니다.

5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 인권상 시상식을 기념하며
 5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 인권상 시상식을 기념하며
ⓒ 천주교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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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 농성장 떠올리며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반짝이는 이돈명 인권상 트로피를 자랑하며, 우린 이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더 잘할 거란 믿음에 마음만은 무척 따뜻합니다. 실제로는 이돈명 인권상 상금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들이 농성장에 보내주신 생수와 부탄가스 덕분이 클지도 모릅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카페 : http://cafe.daum.net/samsunglabor )
전화: 02-3496-5067,02-3496-5067 , 팩스: 02-6442-5065
주소: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1049-4 경신빌딩(남부순환로 2019) 5층 501호

글쓴이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권영은 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반올림, #강남역8번출구, #이돈명인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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