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용으로 퇴근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자주 듣게 된다. 특별히 이 장수한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을 좋아한다기보다는, 50대의 필자에게 배철수씨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 주파수를 고정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팝송을 좋아했지만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팝송 들을 여유도 없다. 요새 젊은이들에게 유행한다는 힙합의 리듬감은 따라갈 재간도 없다. 그냥 퇴근 시간에 배철수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주파수를 고정해 놓는다. 그것은 요즘 시대에 '경쟁'과 '새로움'이라는 이름 아래 익숙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뭐든지 너무 빨리 바뀌는 세상에서 그나마 라디오에서 수십 년 전부터 아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반갑다.

며칠 전인가 몇 주 전인가, 이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 팝송 평론가 임진모씨가 나와 CD를 구매하지 않는 시대에 아델이 CD로 낸 앨범이 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디지털 시대에 CD 열풍 일으킨 아델

미국 뉴욕 아델 앨범 지난 11월 20일, 미국 뉴욕의 빌보드에 아델의 새 앨범 < 25 >의 표지가 걸려 있다. 이날 발매된 아델의 앨범은 애플 뮤직이나 스포이파이 같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발매되지 않았다.

▲ 미국 뉴욕 아델 앨범 지난 2015년 11월 20일, 미국 뉴욕의 빌보드에 아델의 새 앨범 < 25 >의 표지가 걸려 있다. 이날 발매된 아델의 앨범은 애플 뮤직이나 스포이파이 같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발매되지 않았다. ⓒ 연합뉴스/EPA


놀라웠다. 한 곡마다 디지털 음원으로 조회 수를 따지며 팔리는 시대에 CD로 낸 앨범이 불티나게 팔리다니! 필자는 수년 만에 아델의 이번 앨범을 사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이 필자의 마음이 필자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전 세계 상당수 사람의 마음과 이심전심으로 통했다니!

필자가 아델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국내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나와 아델의 'Rolling in the deep(롤링 인 더 딥)'을 들려주었을 때다. 그 소녀의 노래 솜씨에 전 세계 네티즌들이 주목했고, 후에 그 소녀는 가수로 데뷔했다. 필자가 놀란 것은 당시 어린 그가 그렇게 어른스러운 감정으로, 어른스러운 노래를 불렀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래를 원래 부른 가수도 21살 때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노래의 느낌이나 깊이를 봐서는 세월의 깊이를 아는 중년의 흑인 여인이 불렀을 만한 노래인데 말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를 '빈티지 소울'이라 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복고 노래란 말이다.

'빈티지 소울'의 한 획을 그은 에미 와인하우스도 필자를 섬뜩하게 한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누가 봐도 중년의 흑인 여성의 목소리인데, 그녀가 히트곡을 내고 사망한 나이는 27세란다.

그녀의 히트곡 'I'm no good(아임 노 굳)'은 분명히 시대를 거슬러 필자의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 세대가 즐겨들었어야 할 노래다. 그녀의 목소리, 노래는 타임머신을 타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목소리요, 노래이다.

왜 이런 노래들이 나왔을까?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일시적 복고풍 노래의 유행일까? 곰곰 생각해 봤다. 아니다.

복고풍 노래가 등장한 진짜 이유

독일 무대에 오른 아델 영국 가수 아델이 지난 6일 독일 허스에서 열린 '2015! Menschen - Blider - Emotionen' 쇼 무대에 올라왔다.

▲ 독일 무대에 오른 아델 영국 가수 아델이 지난 2015년 12월 6일 독일 허스에서 열린 '2015! Menschen - Blider - Emotionen' 쇼 무대에 올라왔다. ⓒ 연합뉴스/EPA


필자가 대중음악의 진화속도를 못 맞추고 스스로 구세대라고 자인한 것은 1990년대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들었을 때이다. 조용필, 김종서, 부활의 음악에 익숙했던 필자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들은 새로운 음악이었고 H.O.T.란 그룹이 나와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애교를 부리는 것을 보고는 필자는 아예 두 손을 들어 버렸다. 글자 그대로 젊은 아이들의 노래였다.

필자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오는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세계 대중음악은 실제로 2000년대에 이를 때까지 계속 젊어져 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혁신에 또 혁신을 해왔다.

필자의 할아버지 세대는 스탠더드 팝을 즐겼다.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의 팝송은 성인들의 노래였다. 국내로 치자면 김정구, 현인의 노래는 가수가 할아버지가 되어 불러도 그렇게 쑥스러운 노래들이 아니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신라의 달밤' 등은 노인들이 부르기 좋은 노래들이 아닌가?

필자의 아버지 세대 내지 삼촌 세대는 록(Rock)의 시대였고 포크 음악의 시대였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국내에서는 신중현, 송창식 등의 가수들이 미국발 새로운 유행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록과 포크 음악은 젊은이들의 음악으로 이해되었다. 이장희의 '그건 너 바로 너', 송창식의 '왜 불러'는 가사에서 본격적으로 반말하기 시작한 때였다. 록은 젊은이의 노래다. 젊어서 박력 있게 부를 수 있지만 늙어서 부르기엔 기력이 달린다.

그런 록의 시대를 끝장낸 가수는 팝의 제왕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MTV 개국과 맞물리며 댄스음악과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 브루노 마스, 애덤 리바인은 물론 마이클 잭슨 이후의 모든 팝가수는 힙합분야를 제외한다면 마이클 잭슨의 영향 아래에 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국내 음악계의 세 축을 이루고 있는 SM, YG, JYP의 음악의 근원은 역시 힙합 분야를 제외한다면 마이클 잭슨의 영향 아래에 있다. 음악전문가들이 다루어야 할 사운드의 혁신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잭슨의 현란한 춤과 그 뒤의 백댄서들이 보여주었던 칼 같은 군무, 그리고 섹스어필은 국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섹스어필은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톰 존슨이 남성적인 섹시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섹시미는 남성의 섹시미라기 보다는 유니섹스적인 섹시미였고, 미소년의 관능미였다. 미소년의 섹시미는 'New Kids on the Block(뉴 키즈 온 더 블록)'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탄생하게 했다. 미국애서 보이 그룹의 인기는 한때였지만 브루노 마스와 애덤 리바인의 목소리에는 마이클 잭슨의 기본적 창법이 들어있다. 유니섹스적이며 미소년적 음색이다.

국내에서는 마이클 잭슨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애교를 부리는 걸그룹과 보이그룹, 섹스어필하려는 그룹들로 넘쳐나며 아이돌 시대가 열렸다. 아이돌 그룹시대의 노래는 유년기 노래에 가깝다. 30살 먹은 청년이 '으르렁'을 열창하거나, 40살 아줌마가 티아라의 '보핍보핍'을 부르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아니 30살만 먹어도 댄스가수들은 원로 대우를 받는다.  

즉 팝송과 팝송을 영향을 받은 대중가요는 계속 젊어져 왔던 것이다. 어른의 노래에서 청년의 노래, 청년의 노래에서 아이들의 노래로 말이다. 박진영이 한때 열심히 주창했던 음악에서의 섹시코드도 국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미국시장에서는 눈에 뛰게 쇠퇴했다.

게다가 힙합이 등장했다. 힙합은 노래인가 아니면 일상의 산문인가? 라임이 있다는 면에서는 시적이고 리듬이 있다는 면에서는 음악적이다. 필자는 이를 노래의 빈사 상태라고 하고 싶다. 멜로디가 없는 노래는 엄격한 기준에서 보면 노래가 아니다. 영화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서처럼, 20세기 대중음악은 성인음악에서 청년음악으로, 그리고 아이들의 음악으로 나아가다 종국에는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이를 살리겠다고 전 세계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나섰고, 피처링이라는 방법으로 옛날 노래를 랩으로 감싸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델의 '헬로우'는 누구를 위한 노래인가

그러나 아델의 '헬로우'는 늙어빠진 기성세대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노래가 아니다. 옛날 노래를 랩으로 감싸 포장하거나, <히든싱어> <복면가왕>같은 오디션 및 오락프로그램의 힘들 빌어 현대에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노래도 아니다.

혁오밴드, 소녀마음 흔드는 소년들 혁오밴드가 20일 오후 서울 회기동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30회 골든디스크 어워즈>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혁오밴드, 소녀마음 흔드는 소년들 혁오밴드가 지난 1월 20일 오후 서울 회기동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30회 골든디스크 어워즈>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아델에게는 랩도 <복면가왕>도 필요 없다. 그냥 옛날 노래 같은데 옛날 노래가 아닌 것이다. 유행이 돌고 돌아서 노인 노래로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는 단순히 돌고 도는 유행가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의 시대가 돌아왔다. '혁오'의 노래를 들어 보라. 23살짜리 젊은이의 노래라고 하기에는 힘든 삶의 무게가 느끼게 한다. 아델, 에미와인하우스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자식들은 아니 우리의 손주들은 한편에서는 섹시애교댄스를 추고 있는 것 같지만 서서히 애늙은이가 되어 가고 있다. 이들이 애늙은이가 되어 가는 것은 어쩌면 키덜트가 굉장한 벼슬인양 자랑했던 우리 세대의 업보인지 모른다. 우리 자식들의 세대는 잘하면 키덜트 아버지 세대뿐만 아니라 히피 할아버지 세대도 부양해야할지 모른다.

따라서 이들 세대가 애늙은이가 되는 것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27 혹은 23살 젊은이를 아이로 보는 것은 키덜트 아버지와 히피 할아버지의 착각인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30세에 국가에 목숨을 바쳤고 동아시아 평화를 논하였다. 요새 고통 받는 청년들을 위해 기성세대는 서로 멘토가 되겠다고 난리다. 진정한 영웅은 누구의 멘토링을 받아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임진모씨가 라디오 방송 중에 이들에게 괜히 미안하다고 한 것도 이와 같다. 필자도 학자로서 간혹 이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대안 모델을 제시하지 못해서 미안한 감이 든다.

그러나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력을 확장해 나간다. 박근혜 대통령이 뭐라고 하든 안철수가 뭐라고 하든 젊은 세대들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만의 시대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의 단초로 필자는 아델의 노래를 듣는다.

아델 에미 와인하우스 빈티지 소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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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립대 중남미 지역학 박사학위 소지자로 상기 대학 스페인어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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