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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가주의'가 과잉 유포되어 있는 나라다. 개개인이 '인민(people)'이나 '시민'으로서보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낀다. '애국조회'로 불리는 '국민의례'에서 '국기'를 향해 충성 서약을 한다. '애국가'를 부르며 국가 사랑의 마음을 다진다. 다른 나라와 달리 시민들의 대의 기관이 '의회'가 아니라 '국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자연스럽다. 국가와 국민이 불가분의 운명공동체처럼 다가온다. 그럴까.

<국가를 생각하다> 겉표지
 <국가를 생각하다> 겉표지
ⓒ 북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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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생각하다>는 2014년 봄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N의 연구진들이 국가의 역사성에 초점을 맞춘 스터디와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추진한 연구 기획의 결과물이다. 8명의 공동 저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국가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돌아보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를 다시 살피자고 권한다.

국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국가가 폭력과 무질서로부터 국민의 안전과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자신을 제외한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유일한 폭력기구가 국가가 아닐까.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국가란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91쪽에서 재인용)라고 정의했다.

이 책에는 국가에 대한 일반인의 상식과 통념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내용이 많다. '민족'이나 '국민'은 익숙하여 저 먼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쓰여 왔을 것 같다. 사실과 다르다. 가령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의 번역어인 '민족'이나 '국민'은 한국에서 1880년 이전에 사용된 적이 없었다. '민족'이란 말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07년경이었다.

'이는 서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이션'이란 말이 본격적인 정치적 개념으로 부상한 것은 혁명기 프랑스에서였고, 단어로서 출현한 것은 그보다 약간 앞선 시기였다. 국가와 민족을, 그리고 나를 무슨 삼위일체라도 되는 양 동일시하게 만든 건 '국민주의(민족주의)'를 통해서였는데, 국민주의가 중요하게 부각된 건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해서였다.' (30쪽)

국가가 없으면 사회나 공동체가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정글'이 될 것이라고 믿는 통념이 있다. 이 책이 인용하는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와 상반된 양상을 보여준다. 원시사회의 공동체에서는 수평적인 연대와 '선물'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강력한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일수록 인간을 겨냥한 억압이나 폭력, 인간들 간의 경쟁과 적대가 심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연상태에선 늑대같이 싸우고, 왕이나 국가가 들어서면 평화로워질 거라는 생각은 실제와는 정반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국가란 강제로 평화를 수립하는 '괴물(리바이어던)'이 아니라 수평적인 연대와 상호부조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경쟁과 적대를 불러오는 괴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60쪽)

이 책은 교과서적인 의미의 국가 개념을 뛰어넘어 국가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두루 도움을 준다. 국가를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사상과 철학적 입장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전반부가 특히 그렇다. "국가를 보는 입장들", "근대 국가와 국민의 탄생", "주권과 폭력 사이", "'좋은 국가'에 대한 철학적 상상" 들의 내용을 통해 국가의 본질적 의미와 기능, 좋은 국가와 나쁜 국가를 구별할 수 있는 역사적·이론적 논거들을 챙길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후반부에서는 핵발전소, 밀양 송전탑, 세월호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삼대 이야기-만주에서 밀양까지"가 특히 인상적이다. 2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했지만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집안과 그 후손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국가'의 본원적인 관계를 성찰해 볼 수 있다.

책 앞부분에는 2015년 현재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는 십대들이 각자 꿈꾸는 국가를 풀어 놓은 '내가 꿈꾸는 국가'가 실려 있다. 경기 고양시 화수고 2학년 정유진 학생은 "나라 먼저가 아니고 국민이 먼저인 나라에 살고 싶다"라고 적었다. 국민이 절대권력에 의한 통치 대상쯤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를 아프게 돌아보게 만드는 말이 아닐까.

권모술수의 대가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는 자유를 열망하는 인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좋은 국가,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정부가 좋은 국가를 만들고 좋은 국가가 강한 국가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국가의 건국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많은 사람들이 보살피게 될 때, 즉 그 유지가 많은 사람의 책임에 내맡겨질 때,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된다.' (128쪽)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이후 로마 역사를 연구해 쓴 <로마사논고>에서 가장 좋은 정부를 설명하는 대목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국가 운영의 책임이 여러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은 "인민에 의한 정부"(<로마사 논고>)를 뜻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교과서적인 '상식'이다. 지금 한국은 정치인 '한 사람'이 아니라 300명 가까운 '많은 사람들'을 선발해야 하는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

국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좋은 정치인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냉철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그 과정에서 이 조그만 책이 작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국가를 생각하다>(이진경 외 지음 / 북멘토 / 2015.12.28. / 242쪽 / 1,5000원)

덧붙이는 글 | 정은균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국가를 생각하다

이진경 외 지음, 도서출판 북멘토(2015)


태그:#<국가를 생각하다>, #수유너머N, #이진경, #국가,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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