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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 기자 말

1972년 5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이 북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1972년 5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이 북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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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어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HR·아래 존칭 생략)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져 자택에서 칩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칩거 기간이 길어지자 조카 이동휘는 HR에게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맡을 것을 권유했다.

1976년 전국신도회장이 된 HR은 재가불자운동(在家佛子運動)으로 전국 각 사찰과 시도에 신도회 지부를 만들며 신도 조직화에 열중했다. 이뿐 아니라 일선 군대에도 군법당을 만들고 불교 조직에 나섰는데, HR이 일선부대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자 일각으로부터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관련기사: 신도회 조직에 무서울 만큼 적극적이던 이후락)

공화당 공천 못 받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이런 세간의 눈초리에 HR은 박정희를 직접 만나 해명하고 싶었지만 박정희 측근들이 HR이 박정희를 만나는 것을 막아서면서 독대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그 즈음에 치러진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이후락은 박정희로부터 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공화당 후보와 맞붙게 된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1978년 가을쯤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측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HR을 모시고 서울 서교동 안가로 갔다. 안가에서는 김재규와 HR의 독대가 있었다. 하지만 안가를 나서는 HR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아 보였다.

서울 서교동을 떠나 고속도로를 달려 금강휴게실에 도착할 때까지 HR의 입술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금강휴게실에 도착해 당시 휴게소에 있던 VIP실에 들어갔다. HR은 처음으로 한마디 했다.

'무소속이야...'

당시 HR은 그동안 성심껏 모신 박정희가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에서 공화당 공천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HR에게 무소속으로 나가라는 박정희의 뜻을 전했다. HR은 당시 무척 상심한 것 같았다. HR은 박정희 측근들이 자신에 대해 잘못된 보고들을 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강했다. 당시 울산 울주군에서 공화당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것은 기정사실화였다. 그런데 공천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무소속으로 나가라는 것에 상심한 것이다.

나는 상심하는 HR에게 '대통령의 뜻은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을 등에 업지 않고 무소속으로 나가 국민의 뜻을 물어보라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HR은 나의 이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그래 맞다'고 했다. 그는 무소속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이 선 듯했다.

내 건의를 들은 HR은 내게 '울산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계실 것입니까'라고 하자 '조금 오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고향에 내려온 나는 HR을 도와 선거운동에 전력했다. 비록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울산시와 울주군에서 HR의 인기가 여전했다. 결국 HR은 50%에 가까운 9만8천여 표를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북에 다녀온 사람이다"

12·12 군사정변 후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 난 이후락이 칩거하던 경기도 광주 도자기공장 도평요에서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12·12 군사정변 후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 난 이후락이 칩거하던 경기도 광주 도자기공장 도평요에서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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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됐다. 각 지역구에서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154명을 선출하고, 간접선거로 선출된 유신정우회 소속 77명을 포함해 모두 231명이 선출됐다.

HR은 경남 제4선거구인 울산시 울주군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울산시 울주군 선거는 전체 선거인 수 25만7773명 중 20만3329명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율 78.87%를 기록했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 서영수 후보는 2만1365표(10.60%), 신민당 최형우 후보는 6만2237표(30.88%), 무소속 김재현 후보는 6796표(3.37%), 무소속 이규정 후보 1만3731표(6.81%), 무소속 이후락 후보는 9만7393표를 얻었다. 당선인은 이후락과 최형우였다.

당시 이후락은 울산시에서 7만1244표(47.87%), 고향인 울주군에서 2만6149표(49.60%)표를 얻는 등 고른 득표율을 얻었다. 당시 선거전이 치열했다. 이동휘는 선거전에서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10대 국회의원 선거전은 치열했다. 공화당 서영수 후보와 신민당 최형우 후보는 당선을 위해 HR을 집중 공격했다. 이들 후보들의 입에서는 '부정축재자' 등의 비난이 서슴없이 나왔다.

선거일을 얼마 앞두고 울산 중구에 있는 울산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선거 유세 때의 일이다. 각 후보들은 유세를 하며 HR을 공격했다. HR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마지막 연설자로 나선 HR은 손에 청산가리 캡슐 두 개를 붙인 스티커를 들고 나왔다. 청산가리를 손에 쥔 HR은 청중들에게 외쳤다. '나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대화를 하고 온 사람이다.' 청중이 웅성거렸다.

HR은 자신을 공격한 후보들을 의식한 듯 조선조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법담을 소개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로 보이는데, 대사는 내가 어떻게 보입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태조가 부처로 보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성계가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자 무학대사는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라고 했다.

HR은 상대 후보에 대한 비난 없이 이 법담을 소개했고 청중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결국 HR은 무소속으로 나서 큰 표 차로 당선됐다. 이후 무소속 당선자들은 민정회를 만들었는데, HR은 민전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0대 국회의원 선거 다음해인 1979년 10·26 이 발생했고 곧이어 신군부는 12·12로 권력을 장악했다. HR은 신군부로부터 축출된 후 2009년 작고할 때까지 권력 내부로 진입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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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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