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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성전에서 쫓겨나는 엘리오도로’, 바티칸 박물관 엘리오도로의 방. 예루살렘의 성전에 성물을 훔치러 들어온 엘리오도로를 천사들과 기사가 붙잡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 성전에서 쫓겨나는 엘리오도로 라파엘로, ‘성전에서 쫓겨나는 엘리오도로’, 바티칸 박물관 엘리오도로의 방. 예루살렘의 성전에 성물을 훔치러 들어온 엘리오도로를 천사들과 기사가 붙잡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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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의 '라파엘로의 방'은 전세계에서 몰려온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도무지 미술 감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곳곳에서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는 가이드 투어는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이어지는 '콘스탄티누스의 방(Stanza di Constantino)'의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도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liodoro)'의 <성전에서 쫓겨나는 엘리오도르>와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성체 논의>와 <파르나소스>, 그리고 저 위대한 <아테네 학당>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무리 오디오 가이드에 귀를 기울이며 그림 한 부분 한 부분에 집중해도, 이것은 이미 미술 감상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이 상황을 '경험'하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성전에 성물을 훔치러 들어온 엘리오도로를 천사들과 기사가 붙잡는 장면을 묘사한 <성전에서 쫓겨나는 엘리오도로>는 인물들의 생생한 움직임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죠. 하지만 이런 난리통 속에선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몇 번이나 발돋움을 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는 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 탓에 그림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수많은 인파 속 바티칸 박물관을 감상하는 법

라파엘로,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바티칸 박물관 엘리오도로의 방.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라파엘로,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바티칸 박물관 엘리오도로의 방.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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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낭패감이 드는 것은 이 같은 상황이 시스티나 성당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바티칸 박물관은 몇 번이고 계속 와야한다고 합니다. 이 야단법석의 현장은 그렇게 몇 번이라도 와서, 위대한 명작들을 눈에 계속 담아야지 그나마 익숙하게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이나 유럽인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자주 이곳에 올 수는 없겠지요.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에서 작품의 질감이나 미묘한 터치, 화면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나 작가의 정신을 느낄 수 없다면, 부족한 내용은 참고 서적들을 통해 지식으로만 채워야 됩니다. 물론 그것은 올바른 미술 기행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이 '바티칸 미술 기행'도 지난 4박 5일 동안의 나폴리와 마찬가지로 미완의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역시 다음, 또 다음을 기약해야 될 것 같습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바티칸 박물관 서명의 방. 고대의 사상가들을 한 자리에 묘사한 이 그림은 서양 철학의 근간을 계승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바티칸 박물관 서명의 방. 고대의 사상가들을 한 자리에 묘사한 이 그림은 서양 철학의 근간을 계승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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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비록 가장 사랑하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마음껏 느끼지 못하지만, 이번엔 그냥 실물을 눈으로 만난 정도로 만족합니다. 자신의 저서 <니코마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 그 곁에 <티마이오스>를 들고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습입니다.

아래쪽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 허리를 굽히고 컴퍼스를 돌리고 있는 유클리드는 브라만테의 모습이죠. 이외에도 소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히파티아, 프톨레마이오스, 조로아스터 등등 서양 학문의 위대한 스승들과 그 구석자리에 살짝 숨어 있는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라파엘로, ‘파르나소스’(부분), 바티칸 박물관 서명의 방. 고대 그리스를 계승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인 단테와 복카치오의 모습이 보입니다.
▲ 파르나소스 라파엘로, ‘파르나소스’(부분), 바티칸 박물관 서명의 방. 고대 그리스를 계승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인 단테와 복카치오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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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파르나소스>는 시와 음악의 신, 아폴론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인문주의자들을 묘사하여 예술의 본질과 르네상스의 정신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사포, 단테, 복카치오 등이 얼핏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난리벚꽃장' 같은 현장에서 제대로 된 작품 감상을 할 순 없지만, 이 정도면 됐습니다.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혼잡스럽기 그지 없었던 '라파엘로의 방'에서 나오니 뜻밖에 근현대 회화 작품들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인지 관람객들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관람객이 한 명도 없는 전시실도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곳에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피에타’, 바티칸 박물관. 화집을 통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흐의 피에타를 이곳 바티칸 박물관에서 만납니다.
▲ 피에타 빈센트 반 고흐, ‘피에타’, 바티칸 박물관. 화집을 통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흐의 피에타를 이곳 바티칸 박물관에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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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바티칸 박물관. 고흐의 그림 곁에 걸려 있는 채색 나무 부조입니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폴 고갱,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바티칸 박물관. 고흐의 그림 곁에 걸려 있는 채색 나무 부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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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고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린 <피에타>가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고흐의 '피에타'!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발견에 또 전율합니다. 그리고 그 곁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이 또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제목의 채색 나무 부조입니다. 그림과 조각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작품 역시 처음 발견한 것입니다.

한 자리에서 고흐와 고갱을 만나니 앞서의 낭패감들이 조금은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야곱의 사다리>와 <피에타>, 앙리 마티스와 파울 클레, 살바도르 달리, 프랜시스 베이컨 등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들도 연이어 만나다 보니 어느새 그곳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입니다. 

선명하고 거대한 그림에 입이 떡 벌어지는 시스티나 성당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 정면 주제단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좌우 벽면의 르네상스 대가들의 ‘모세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 연작, 그리고 천장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아니 서양 미술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이 이곳에 모여있습니다.
▲ 시스티나 성당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 정면 주제단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좌우 벽면의 르네상스 대가들의 ‘모세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 연작, 그리고 천장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아니 서양 미술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이 이곳에 모여있습니다.
ⓒ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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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성당 안을 역시 발디딜 틈 없이 가득 메운 관람객들. 그들을 따라 머리를 들고 천장을 쳐다보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고개를 돌려 양쪽 벽을 바라보면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루카 시뇨렐리,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로셀리 등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함께 그린 <모세의 일생> 연작과 <예수의 일생> 연작이, 그리고 또 정면을 바라보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다시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이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수 천의 시선들. 나도 그들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지만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정신이 없을 뿐입니다.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지만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거대하고 선명한 그림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연작은 젊음과 열정을 온통 바친 미켈란젤로의 고독한 작가 정신이 낳은 인류 문화사의 보물 중 하나입니다.
▲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연작은 젊음과 열정을 온통 바친 미켈란젤로의 고독한 작가 정신이 낳은 인류 문화사의 보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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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이, 얼마나 익숙하게 보아온 그림들입니까? 그림 한 부분 한 부분을 설명하고, 저 천장화와 저 벽화를 그리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어떤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저 미켈란젤로와 작가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한없는 존경과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 이 공간에 서 보니 이것들은 단순히 '그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고, 사상이고. 역사이며, 위대한 예술 정신입니다.

신성은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토록 위대한 공간을 창조한 예술에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신성하다'고 믿는 것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더 이상 인간이 손댈 필요가 없는 위대한 '자연'과 진실이 살아있는 '예술' 뿐이라는 생각만 듭니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이 곳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고 사상이며 역사이며 예술 정신입니다.
▲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이 곳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종교이고 사상이며 역사이며 예술 정신입니다.
ⓒ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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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관광객들 속에서 이번 '바티칸 미술 기행'은 미완의 여정이 되고 말았지만,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나는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올 것입니다.

'이탈리아 미술 기행' 연재를 마치며

지난 2015년 4월 15일부터 9개월 가까이 이어져 온 '이탈리아 미술 기행' 연재는 21-3, 53편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습니다. 로마를 시작으로 오르비에토, 피렌체, 산 지미냐노, 시에나, 아시시, 피사, 볼로냐, 밀라노, 토리노, 베로나, 베네치아, 파도바, 나폴리까지 이탈리아 곳곳을 누볐던 그 겨울날들은 연재를 마무리하는 지금까지도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엄청난 깊이와 스펙트럼을 지닌 이탈리아 미술을 만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비 전공자이며 초보 여행자였기 때문에 여행 도중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죠. 그래서 기사에 밝힌 것처럼 후반부의 나폴리와 바티칸 여정은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탈리아 미술 기행'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미술 작품들. 그들을 만나는 여정은 이제야 비로소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니까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처럼 '미술 기행'의 여정은 그래서 늘 '미완'입니다. 앞으로 어떤 '미술 기행'이 이어질지 확실히 정해지진 않았지만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이탈리아 미술 기행'은 끝났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 새로운 미술 기행을 기대하며 '이탈리아 미술 기행'은 끝났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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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시스티나성당, #바티칸박물관,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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