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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응답하라 1988>에는 반장이 뇌전증(간질의 정확한 의학용어)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날 반장은 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반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모여듭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던 덕선이는 깜짝 놀라면서 "비켜, 너네 보지 말고 빨리 저리 가!" 소리를 치면서, 응급 처치를 합니다.

장면이 바뀌고, 반장은 양호실에서 깨어났습니다. 선생님을 보면서 "저, 또 쓰러졌죠? 얘들 다 봤겠네요"라며 흐느낍니다. 이어 반장은 교실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긴장을 하면서 문을 엽니다. 친구 한 명이 쳐다보면서 하는 말은 "반장, 추워 빨리 문 닫아"였습니다.

덕선이도 반장을 향해, "야 너 왜 이제 와", "니 도시락 좀 꺼내봐, 소시지 먹자"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설픈 걱정이나 위로보다 더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친구들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덕선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반장의 학창 시절은 상처로 얼룩졌을 테지요.

저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동네에는 뇌전증으로 힘들어하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이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지면 어느 누구도 도움을 줄 생각을 하지 못 했습니다.

어른들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어린 저에게 그분은 무섭고 이상한 존재였을 뿐입니다. 누구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연장선은 학교에서도 벌어집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신문배달하는 학생은 일어나세요" 호명을 합니다, 쭈뼛쭈뼛 일어나는 제 자신이 싫었지만 그렇게 해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무상급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한다, 안 해야 한다'를 떠나서 어떤 아이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굶주리거나, 또 다른 시선으로 힘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다르게 산다고 나쁜 게 아닌데, 가난한 삶에 가난한 마음까지 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신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도 덕선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듯이 대해줄 수 있는 배려의 사회를 기대합니다.

개똥이네 서점
 개똥이네 서점
ⓒ 황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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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을 품고, 오늘은 개똥이네 서점(일산점)에 갔습니다. 중고 유아동 전집을 취급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는 유명한 곳입니다. 오프라인으로도 진출을 하고 있습니다. 전집류를 판매하고 있지만 중고 단행본도 꽤 있습니다. 중고책방에 가면 보물 찾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일반 서점이나 온라인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귀한 책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원 정도의 책을 샀을 뿐인데, '키재기 스티커'를 서비스로 주셨습니다. 대형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살뜰한 친절입니다. 책으로 밥벌이 하기 어려운 시대에 "언제든, 편안하게 들러주세요" 인사를 하시는 주인 아저씨가 하루의 영업을 끝내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이 외롭지 않기를 바랍니다.

개똥이네 서점의 중고단행본 코너에는 어떤 책들이 있나 탐색을 하다가 파란색의 책 한 권을 뽑아 들었습니다. '보물 당첨!' 2015년 10월에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한 아모스 오즈 님의 <숲의 가족>(uddenly in the depth of the forest) 2008년 초판본 입니다. 거의 새 책을 2천 원에 구매했습니다.

<숲의 가족> 이스라엘 출신 아모스 오즈 작가가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그려낸 우화입니다. 어른과 청소년을 위한 132쪽의 짧은 동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숲의 가족 표지
 숲의 가족 표지
ⓒ 황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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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동물들이 모두 사라진 어느 마을의 이야기로 시작 합니다. 어른들은 우리 마을에 언제 동물이라는 게 있었냐며 잊어버립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비롯해서, 작은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학교의 임마누엘라 선생님은 동물이 있었음을 가르치지만, 어른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일축합니다. 동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아이는 왕따를 당하고, 물고기나 새가 되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몇 명의 어른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습니다.

어느 날, 마야와 마티 두 아이가 동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갑니다. 마을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그곳에는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뿐인데 마을 사람들은 선입견과 경계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숭부숭한 밤색 털을 가진 곰이 수풀을 헤치고 갑자기 앞으로 다가와서 무거워 보이는 머리를 남자의 손에 대고 비볐다. 곰은 호기심에 가득 차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마야와 마티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마음에 들어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곰은 약간 부끄러워하면서도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곰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날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난 그냥 곰이에요.'"(108쪽)

숲에서 두 아이는 곰을 만나 크게 놀랐지만, 곰은 자신을 그냥 곰으로 인정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품에 안아 주기를 바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작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모스 오즈 작가는 2015년 10월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림을 흑과 백으로만 칠하려고 해선 안 된다"며 잘못된 사실을 발견하면 글 쓰는 사람은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숲의 가족은 어른을 위한 짧은 동화이지만 진실을 찾아 나서는 모험과 깨어 있는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아모스 오즈 작가 소개]
현대 이스라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이자 지식인의 한 사람. 1939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근교에서 태어났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다.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 키부츠에서 25년간 고등학교 교편을 잡으며 농사일과 글쓰기를 병행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활동가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조국과 동포,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서슴지 않아 '침묵하지 않는 작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황춘원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ementoring.blog.me/)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창비(2008)


태그:#숲의가족, #아모스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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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강원도 속초로 이사 온 가족의 따뜻한 일상으로 위로와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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