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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 표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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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건 사사키 아타루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아래 <기도하는>) 읽고 쓴 기록이다. 위안을 얻고 싶어서 최근에 다시 읽었다. <기도하는>을 처음 읽은 건 2012년도. 집에 있을 때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발견했다. 작가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번역자가 나름 이름 있는 사람이어서 괜찮은 책일 거라 생각하고 빌렸다. 읽고 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꽤 좋은 책이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할 때면 계속해서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2. <기도하는>이 좋았던 건 사사키 아타루가 "읽고 쓰는 일이 혁명의 본질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혁명하면 피나 폭력을 떠올리는 기존의 통념을 다섯 번의 강연을 통해 천천히 깬다.

'읽고 쓰는 일'은 여러 층위에서 해석이 가능한데, 낭만적으로 해석하면 읽고 쓰는 일이 개인을 변화시키면서 어떤 혁명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되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사회현상을 읽고 정치적 발언을 하는 행동이 혁명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되고(2년 전 있었던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 사사키 아타루가 쓴 의미대로 해석하면 사회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 즉 법을 읽고, 고쳐 읽고, 쓰고, 고쳐 쓰는 행위가 곧 혁명의 본질이라는 의미가 된다.

"법을 고쳐 쓰는 것=혁명"이라는 주장은 새로웠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혁명, 중세 해석자 혁명을 언급한다.

3.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부패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책을 인용하면 이렇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중략)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중략)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중략)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 근거한 개혁안들을 쓰고, 독일 민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민중들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했다. 그의 전집이 127권에 달한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썼는지는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그는 부패한 교회법을 바로잡기 위해 교회법과 대비되는 세속법, 그러니까 근대의 일반법 체계를 정립했다.

중세 때의 교회는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빈곤 대책, 결혼 제도, 교육, 계약 소송 등 사회적인 것들을 담당하는 정치 제도였다. 교회법도 성직자들이 지켜야 할 준칙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민들을 규율하는, 현재로 따지자면 민법의 일종이었다. 그 교회법이 부패했으니, 그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가 맡았던 역할을 세속국가에게 맡길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일반법 체계를 정비했던 것이다.

4.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지만, 네 번째 밤으로 건너가면 부패되기 전의 교회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루터 얘기는 두 번째 밤에 나온다).

"그러나 교회법에 속해 있던 이들의 관할 사항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을 위해.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생산', 즉 '번식'을 위해 있는 겁니다. (중략) 중세 유럽이었다면 교회에 가서 축복을 받으며 세례를 받고, 태어난 날짜와 부모의 이름과 아이의 이름이 교회 명부에 '등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는 법적 인격을 갖습니다. 죽임을 당했다면 살인이 됩니다. 독립된 인격으로서 법의 내부에 보호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법에 대한 내 인식을 바꿔놓았다. 국가는 시민들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영향도 있었고, 국가는 폭력을 독점적으로 휘두르는 존재라는 베버의 정의에도 익숙해 있던 터라 국가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었다. 법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검열하고 처벌하는 게 법의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국가의 역할, 사회의 복지를 책임지는 역할은 제도의 의해 수행되고, 그 제도가 수행되기 위한 근거는 법에 의해 마련되는 것인데, 그런 부분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법의 기능은 처벌이 아니라 보호에 있을 수 있다는 다른 인식이 열렸다. 또한 사사키 아타루는 "국가의 본질은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며 혁명의 목적도 "아이들을 '수호하는'"데 있다고 말했는데(독재 타도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것 또한 새로웠다.

5. 물론 법치주의를 강조하면서 법을 폭력과 억압의 도구로 삼는 현 정부를 보면 사사키 아타루가 꼭 맞는 것 같지는 않다. 복면 시위를 기점으로 부쩍 처벌이 강조되는 걸 보면 더 그렇다.

그래도 사회보장제도는 '세모자법'으로 상징되듯 법이 제대로 갖춰져야 작동할 수 있으며, 법에는 결국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긴 하다. 다른 책에서 본 것이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표되는 탈리오의 법도 사실상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고 한다. 당시 권력층이 자기 마음대로 사회적 약자를 처분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과잉금지의 원칙을 규정한 것이다. 복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6. 네 번째 밤에서는 중세 해석자 혁명을 다룬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런 혁명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12세기 법학자와 신학자들이 고대 <로마법대전>을 발견해 그것을 읽고 그 당시의 교회법을 고쳐 쓴 얘기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 가족, 교육, 사회보장 제도들이 마련된다. 혁명이란 기존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법을 고쳐 씀으로써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덧붙이면서. 그도 혁명에는 피가 흘렀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피는 혁명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일어난 독일 농민전쟁을 설명하면서 하는 말이다.

"독일농민전쟁은 12개조의 요구라는 텍스트의 천명으로 시작됩니다. (중략) 요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의적인 수탈 절차를 정지하라, 농노제를 폐지하라, (중략)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들뿐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명문화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95개조의 의견서가 있었던 것처럼 12개조의 요구가 있습니다. (중략) 폭력이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근거를 명시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중략) 혁명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차적인 수단으로 폭력이 휘둘러져왔다는 것입니다. 혁명은 절대적은 자유를 요구하며 법을 분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법을, "우리가 법이라 부르는 것"(르장드르)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중략) 반복합니다. 혁명에서 폭력은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6. 독일 농민전쟁은 1524년에 발발했고, 철저한 탄압의 결과로 10만여명이 피를 흘렸다. 탄압 이후 농민들의 12개조 요구를 기초로 한 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사사키 아타루는 농민전쟁이 '승리'했다고 표현하는데, 이 부분은 공감가지 않았다.

승리라는 말을 쓰기엔 너무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나 싶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쨌거나 혁명은 권력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법을 새로 쓰는 것이며, 결국 법이 새로 쓰여 졌으므로 혁명은 성취되었다는 것이겠지만.

7. 세 번째 밤에서 얘기하는 이슬람 혁명도 큰 줄기는 같다. 무함마드는 신의 말씀이 쓰인 책을 계시 받았고, 그것을 읽었으며, 그것에 근거해 코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 자체는 설화에 가깝기 때문에 재밌지는 않았다.

사사키 아타루는 무함마드조차 읽고 썼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 번째 밤에 원리주의와 나쁜 원리주의를 구분하는데, 나쁜 원리주의는 사실상 무원리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원리주의자라면 원리, 즉 텍스트에 따라야 하는데(이 경우에는 성전) 그들의 행동은 텍스트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하드를 선언하기 위해서는 합법적 권한에 기초하는 절차가 필요하고, 예컨대 일정한 수의 법학자가 모여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의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권한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이슬람법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남자가 멋대로 지하드를 입에 담습니다. 옴진리교도 그렇습니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자기들 멋대로 과거의 성전을 인용합니다만, 사실 제대로 성전을 읽지 않았습니다. (중략) 원리주의자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근거나 전거는 모두 자신입니다."

법치주의를 강조하지만 정작 헌법은 읽지 않는 어떤 분이 생각난다면 기분 탓이다.

8. 사사키 아타루가 혁명을 단순히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것"이라고 말한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법은 자의적이서는 안 된다. 법치주의는 인치, 그러니까 전제 왕권의 자의적인 통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왔다. 법이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므로 제정과 적용, 해석 과정에는 철저한 기준과 근거가 필요하다.

참고로 법의 중요성은 <사회계약론>을 쓴 루소도 강조했던 바 있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법은 그 중요성 때문에 법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가 없다면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대해서 법의 제정을 부탁하라고 한다. 근거 없는 법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 그건 규칙도 뭐도 아니다. 그러니 법을 새로 쓰기 전에 먼저 근거를 "읽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을 읽었고, 무함마드는 신의 말씀을 읽었고, 중세 신학자들은 로마의 법전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개신교가 마태복음 5장 44절 좀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불신지옥만 외치지 말고 말이다)

9. 그런데 사사키 아타루에게 읽는다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다. 첫 번째 밤에 그는 "읽는다"는 일의 광기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일이며, 자신을 책 한 줄 한 줄 속으로 내던지는 것이며, 자신이 틀렸는지 세상이 틀렸는지 알 수 없는 도박에 자신을 거는 것이며, 미치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단순화해서 생각하면, 책을 읽는다는 건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들이 거짓으로 드러나 세계관이 깨지고, 자신이 옳은지 책이 옳은지 확실할 수 없는 불안, 초조, 두려움, 일종의 도박, 일종의 광기 상태에 빠지는 일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 정도로 충격 받는, 무참히 깨지고 자신을 내던지는 독서가 있을까 싶다. 아마 중세 시대 때 별자리를 "읽고" 지동설을 "썼던" 과학자들이라면 자신을 내던지는 두려움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김정한의 소설 <바비도>에도 "읽는" 일의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루터도 성경을 읽을 때 그런 심경을 느꼈을 것이다. 루터에 대해 사사키 아타루가 쓴 말을 길게 인용하면 이렇다.

"그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세계의 성립 근거를 찾아 아무리 성서를 읽어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중략)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이 세계에는 준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미쳤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중략)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중략)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중략) 그러나 역시 루터는 아무래도 사진이 미쳤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거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고, 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지 않으므로 몇 번이고 말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읽는"일이 이런 것일까. 평범한 독서는 독서가 아닌 것이고, 자신을 내던지는 강렬한 경험이 있을 때에야 "읽는"일이 성립하는 것일까.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을 순종하는 사제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 발언에 대해선 공감이 가진 않았다. 그런 경험이 희박할 현대 사회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또한 그는 책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것이며, 읽는다는 건 읽을 수 없는 걸 읽는 일이라는 말까지 하는데, 이 부분 역시 공감가지 않았다.

10. 그리고 텍스트를 읽고 거기에 자신을 내던졌다고 하자. 그런데 그 텍스트가 옳았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으면 내가 틀린 것인지 세상이 틀린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사실 이 양자택일은 하나의 전제가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텍스트는 항상 옳다는 전제. 텍스트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는 "읽기"는 맹목과 다름없고, 난 맹목적인 건 아주 싫어하니, "읽는"것의 광기만을 말하는 그가 사제처럼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반항심도 들었다. 물론 텍스트를 의심하기 않기에 읽는다는 걸 광기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광기는 숱한 맹목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딱히 신성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라면 텍스트가 틀렸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11. 물론 루터가 이렇게 말한 건 멋있다. 진짜 멋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12. 읽는다는 것의 광기, 그리고 혁명에 관해 얘기를 한 후, 마지막 밤에 그는 '그리고 380만년의 영원'에 대해 말한다. 380만년이라는 건, 통계적으로 추정되는 한 종의 평균수명 400만년에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탄생했던 시간인 20만년을 뺀 수치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380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문자문명이 정착된 건 고작 5천년 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인류에게 남은 시간 동안 문명의 부침은 어느 정도 있을지언정 인간은 망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것이며 또 다른 황금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몰락하지 않았고,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종말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는 계속될 것이다.

이 해맑고 강한 긍정주의가 좋았다. 난 별로 긍정주의를 좋아하진 않는데, 그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은폐한 채 어떤 일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전가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사키 아타루의 긍정주의는 좋았다. <기도하는>을 다시 읽은 것도 사실상 다섯 번째 밤 때문이다. 한 부분만 통째로 인용해본다.

"1850년,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90퍼센트였습니다. 최신 연구에는 95퍼센트라고 하는 문헌도 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만 '완전 문맹'의 데이터입니다. 뭐, 백 보 양보해서 90퍼센트라고 합시다. 예컨대 당신에게 친구 열 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만이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게다가 어쨌든 '완전한' 문맹이 90퍼센트니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그 친구 한 명도 책을 읽을 수 있는지는 아주 미심쩍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달력을 읽을 수 있고 표지판을 읽을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모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리가 1842년에 <죽은 혼>을 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 시대>를,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를 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뭘까요, 이 사람들은. 어이가 없지요.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걸 연달아 쓸 수 있었을까요? 확인하고 넘어갑시다.

그 당시 러시아의 인구도 나와 있습니다. 최초의 러시아 인구 조사가 1851년에 이루어졌으니까요. 그것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제국의 인구는 4000만 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만 명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이 정도의 일을 가리켜 비로소 위기라고 하는 겁니다. 내일 일어나면 일본인의 문맹률이 90퍼센트가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지옥의 한마디겠지요. 실례지만 일본 작가의 90퍼센트 이상은 쓰는 걸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러시아 문학이 옛날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문학에 끼친 영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거기에서 얻은 힘으로 일본 문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도달했는지. 그러므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지금 당장 문학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논할 자격도 없습니다. 전혀요. 여러분은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가 소설을 썼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에 비해 자신들은 팔리지 않는다, 문학이 놓인 환경이 좋지 않다, 시대가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어처구니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 들었던 모든 위대한 이름에 대한 모욕입니다. 훨씬 가혹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았으니까요.

그래도 창의와 여러 가지 궁리를 거듭하며 말을 계속 자아내왔으니까요. 터무니없는 노력을 언어에 쏟아부어왔으니까요. 왜일까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도스토옙스키 등은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이 99.9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잠깐 부언하자면 2008년 전후로 최근까지 '문학의 종언'이라는 테마는 문학계를 뒤흔들던 주제였고, 나 또한 혼자서 고민해보던 주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이런 유쾌한 반론이라니. 그저 반가울 수밖에.

13. 물론 사라지는 99.9%에 눈을 돌리면 아쉽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무용한 것도 같고. 대부분이 사라지는 데 지금 하는 일들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현재의 '인문학의 위기'도 그 99.9%에 속하는 일인 것 같고, 부끄러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현 시대는 윤리가 몰락하는 시대 같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현실을 보면 씁쓸하고 안타깝다. 그래도 다섯 번째 밤을 읽고 나면, 지금 시대가 칠흑 같은 밤이라고 하더라도 이대로 세계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며, 아침은 몇 번이고 오고야 만다는 낙관을 가질 수 있게 된다. 0.1%만 살아남아도 혁명은 계속되는 것이니까. 단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우리는 저마다 읽고, 또 쓰면 되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14. 혁명(혹은 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힘이 나게 하는 낙관주의. 이 두 가지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미덕이다. 유쾌한 해학이나 새로운 사실들도 중간 중간에 덤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마지막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맺는다. "많은 것이,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합니다. 380만년의 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이룸)(2012)


태그:#사사키 아타루, #혁명, #기도,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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