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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극 중에서 다툼을 벌이던 영자(김윤진 분)와 덕수(황정민 분)는 애국가가 울리자 잠시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극 중에서 다툼을 벌이던 영자(김윤진 분)와 덕수(황정민 분)는 애국가가 울리자 잠시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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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민의례의 첫 번째 순서인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녹음 파일로 울려퍼지곤 하던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학창 시절 헤아릴 수 없는 아침 조회와 운동장 조회, 강당 조회, 운동회, 기타 행사에서 끝없이 되뇌어온 덕분에 이 짤막한 문구는 나의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군 시절 매일 아침저녁으로 복창하던 복무신조보다도 선명하게.

참여정부 초기였던 2003년, 유시민 당시 개혁당 국회의원이 "국기에 대한 맹세는 파시즘의 잔재"라는 주장을 펼쳤다.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보수 언론은 반격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전체주의적 측면이 있다는 초기 쟁점은 반국가주의와 이적성의 여부로 어느새 바뀌었고, 국회에서는 '친북 세력'(지금은 종북이라는 말이 일상으로 쓰이지만, 이 때만 해도 친북이었으며 이는 매우 공격적인 단어였다)에 대한 말싸움이 날마다 벌어졌다. 오랜 시간 벼려왔던 보수 진영의 회심의 일격은 상처만 남긴 채 성과 없이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논란의 불씨는 죽지 않았다. 오랜 권위주의를 거친 한국 사회에서 성역과 금기가 되었던 국체(國體)를 겨눈 이 '발칙한' 언설은 사람들이 못본 척 넘어갈 수 없을 만큼 큰 물음표를 세상에 던졌다. "조국과 민족의", "몸과 마음을 바쳐" 두 부분을 큰 축으로 간헐적인 다툼이 몇 년간 벌어졌다. 목소리 크기나 기세로는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압도했지만, 점차 내용적인 우위는 진보 진영이 가져가는 모양새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쟁점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아예 없앨 것이냐, 고쳐서 유지할 것이냐가 되었다.

결론은 유지로 났다. 지난 2007년 7월, 행정자치부는 국기법 시행령을 새로 제정하여 공포하였고 '시대 변화상을 반영한 새로운 맹세문'을 규정하여 명시하였다. 2015년 현재 쓰이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길고 길었던 철권통치의 시기에, 조국과 민족은 어휘 자체만으로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하는 위상을 가졌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고,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었던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 그것은 종교의 교리보다도 강력하다. 장엄한 민족 중흥의 기치를 내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무언가 이적성 목적을 띠는 반국가 행위가 되는 엄혹한 날들이었다.

그런데 국기에 대한 맹세문에 "조국과 민족" 대신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들어가고 "몸과 마음을 바쳐"가 빠졌다. 이제 공권력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거대한 위명 위에 올라앉아 절대적인 복종을 강압하는 시대는 지났다.

또한 국가란 본디 국민의 복리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합의체이므로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반드시 추구해야 하며, 따라서 국민이 충성을 다해야 할 대상은 '그냥 대한민국'이 아닌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동서양의 정치학자들이 익히 했던 말들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후발 민주주의 국가로서 힘들게 얻어낸 값진 성취였다.

'북의 지령','적화통일 기도'... 2015년 국회가 맞나

그러나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여부를 둘러싼 작금의 혼란상을 보며 나는 2007년을 떠올리고 있다. 그 때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확실히 달성한 것으로 여겼던 이 작은 역사의 진보가 매우 허탈해졌다. 어느새 다시 국가주의의 시대가 온 것인지, 쉬이 부정하기 어려운 시국이다.

지난 3일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황교안 국무총리는 자세한 예시와 설명으로 정부의 강한 의지와 이 사업의 절박한 당위성을 직접 설파했다. 국정화를 하겠다는 정부의 뜻에 반대하는 집필자들과 '국민 일각'에 대한 적의가 담화문 전반에 걸쳐 절절히 묻어났다.

반평생을 반국가 세력 척결에 바쳐온 공안 검사 출신인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 애국가 4절을 잘 외우지 못하는 신임 검사들에게 나라 사랑이 부족하다며 꾸짖은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고삐를 한 손에 말아쥐고 사업을 총괄 지휘하는 대통령은, 지난해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한 후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주인공이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하기식 때 일어서서 경례하는 장면을 꼽았다. 그는 '헌법 부정 세력 엄단 지시'를 취미로 삼고 있다. 후보 시절 소리 높여 외쳤던 '줄푸세'(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뜻- 편집자 말)의 진짜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이들에게 정부 정책에 반하는 행위는 반국가인 것인가. 5공화국 시절의 한문으로 된 속기록에서나 볼 법한 '북의 지령', '적화 통일 기도' 등 추억의 반공 용어들이 2015년의 국회에서 날마다 들려오고 있다. 국무회의 개의에 앞선 국민의례에서 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소설을 한번 써 보자면, 반국가 이적세력으로부터 헌법을 다시 한번 수호했다는 뿌듯함에 가슴벅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자유'를 반공의 동의어로 인식하고, '정의'를 공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하위 가치쯤으로 여기는 듯한 그들에게 과연 올바른 교과서란, 그를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 대통령은 <국제시장>을 언급하면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는 애국가의 한 구절을 언급하였다.

1970년대와는 달리 2015년의 한국 사회에서 나라와 정권은 동의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의 지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국정화에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을 초등학생이라도 알 법한데, 그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권의 맹목이 분노를 넘어 가련할 따름이다.


태그:#교과서 국정화, #국기에 대한 맹세,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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