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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넷…. 열….'

또 하나 비었다. 또 팬티를 도둑맞았다. 벌써 두 번째다. 운동할 때 입는 반바지를 포함하면 복도에 널어놓은 빨래가 없어진 게 세 번째다.

2인 1실인 기숙사 방은 침대와 책상, 옷장이 각각 두 개씩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욕실 겸 화장실 앞에는 싸구려 모텔에서 볼법한 직접냉각 방식의 소형 냉장고가 있다. 서로의 침대와 책상 사이에는 사람 한 명 다닐 좁은 틈만 남는다. 서로의 공간을 나누어 주는 경계석 같은 존재다.

벌써 세 번째 사라진 내 빨래... 남자 기숙사인데?

기숙사 복도
 기숙사 복도
ⓒ 이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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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방 규모에 비하면 제법 크다. 그래서 매일 아침이면 밝은 햇빛이 강제로 잠을 깨운다. 그래서 해가 너무 일찍 뜨는 여름에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한번 뒤척인 후 다시 잠을 청한다. 단잠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항상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어서 방은 낮에도 어두침침하다. 동향이라 아침엔 볕이 잘 들지만, 정오만 지나도 햇볕이 들지 않아 방에 있다 보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기분이 든다.

이 창문 아랫부분엔 작은 들창이 있다. 이 들창은 최소한의 환기만 가능하도록 아주 조금 열리게 되어 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한 건지 모르겠지만 본래 목적인 환기조차 잘 안 되어 사는 사람으로서는 매우 불편한, 있으나 마나 한 창문이다.

건조대를 놓을 수 없는 협소한 공간, 오랫동안 볕이 들지 않는 방의 위치, 환기도 잘 안 되는 창문은 방에서 빨래를 말리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물론 처음엔 방에서 빨래를 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빨래를 복도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비좁은 방에 건조대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불편해 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건조대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몸은 옷장이나 벽에 붙어서 게처럼 옆으로 걸어가야 했다. 빨래가 바로 마르지 않아 옷에서는 냄새가 났고 방에서도 빨래가 덜 말라 생기는 눅눅한 냄새로 악취가 풍겼고 습도도 높았다.

입었던 옷은 옷장이 아닌 의자와 침대에 있다. 의자를 쓰려면 옷은 침대로 옮기고 잠을 자려면 침대에 있던 옷을 의자로 옮겨야 한다. 아주 가끔 빨래하는 날만 의자와 침대 모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환경에서 게으른 남자 둘이 쓰는 기숙사 방은 혼돈 그 자체이다. 아마 방이 넓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지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빨래 건조대를 복도에 놓고 옷을 말린다. 복도도 방이 마주 보고 있고, 햇빛이 들어오는 곳은 복도 양 끝이어서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방에서 사람답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유명 상표 속옷만 사라지는 기현상

룸메이트의 빨래는 없어진 적이 없다. 도둑맞은 적이 없다. 내 팬티만 없어진 것이다. 누가 나를 좋아해서 내 체취를 맡기 위해 훔쳐간 걸까? 남자만 사는 기숙사 건물인데 그런 이유에서라면 달갑지 않다. 빨래한 옷에서는 섬유유연제 향기만 퍼질 뿐이다. 군대 훈련소에서 그리고 자대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특수한 성격의 공간이라 웃으며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름대로 지성인들이 있는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속옷이 없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사건이다.

사실 팬티가 없어지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내 속옷들은 유명 상표의 이름이 쓰여 있거나 로고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내 또래 혹은 보통의 남자라면 밴드 부분에 그런 게 박힌 속옷을 입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속옷을 입으면 밴드에 쓰인 상표가 나를 유명 상표 수준의 사람으로 포장해 주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비싸더라도 이러한 속옷을 입는다. 속옷을 훔쳐간 사람도 이런 이유로 훔쳐간 게 아닐까? 한 사람이 훔쳐갔는지 여러 사람이 훔쳤는지 모르지만, 속옷을 가져간 이유는 같을 것이다.

속옷이 없어지고 처음엔 불쾌했지만, 바지를 포함해 세 번째 없어졌을 때는 훔쳐간 사람을 욕하기보다 왜 훔쳐갔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물었다. 왜 비싼 속옷을 입는가? 가격으로 치면 저렴한 티셔츠나 바지를 살 수도 있는 금액을 나는 속옷에 쏟아 붓고 있었다. 양말 다음으로 가장 적은 천이 들어간 것인데 가격은 옷감이 몇 배나 더 들어간 것들과 비슷했다. 그렇다고 원단이 특수한 것도 아니다. 보통 95%의 면과 5%의 합성섬유로 이루어진다. 착용감이 월등히 좋은 것도 아니고, 통기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속옷은 남에게 보여줄 일이 거의 없다. 캐나다 가수 저스틴 비버나 흑인 래퍼처럼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내려 입어서 일부러 속옷이 보이게 입는 것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볼일도 없고 보여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왜 비싼 속옷을 입을까? 옷이나 가방, 자동차는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자랑이라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비싼 속옷을 입는 것은 가진 게 많지 않은 내가 적은 비용으로 있는 척하는 방법이었다. 타인에게 직접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과시적이지도 않고, 나도 만족하는 소비 활동이라고 그럴듯하게 허영심을 포장했다. 돈을 알고 난 뒤부터 사물이 나를 대신해 주었고, 때때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조차도 안 되는 상표의 상징이 나를 덮어버렸다. '나를 볼 때 내가 아닌 상표를 봐줘'라고 무언의 외침을 내지르는 듯했다. 내가 상품이 된 것처럼, 상품의 유명도가 나의 유명도인 것처럼 상표에 잠식당했다. 자의 반 타의 반 물아일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를 안다고 해서 때때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듯이 이 또한 그렇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에는 물질의 힘이 강력하다. 속옷은 나와 나의 속옷을 가져간 누군가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보이는 손이다. 허영은 자존감 하락에서 나타난 보호 기제다. 내부의 부족함을 외부에서 채우려 했고, 그 외부 물질은 속옷이 된 것이다. 속옷을 가져간 사람과 나는 속옷을 구하는 경로가 다를 뿐이지 결국엔 같은 존재다. 그와 나는 속옷으로 자존감을 채우려는 미숙한 존재였다.

덧붙이는 글 | '도둑들' 응모글



태그:#빤스, #도둑,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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