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기요. 이 앞에 있던 회사 지금 잠겨있던데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아세요?"
"왜요? 거기에서 돈 받을 거 있어요?"

"예, 조금"
"허! 아저씨도 당했네 당했어."

당황한 내 모습을 건너편 구멍가게 아저씨가 안됐다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플라스틱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아저씨.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얘기를 풀어놓습니다.

"요 사무실 열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어. 사무실 집기도 외상으로 구매했다고 하구. 하여튼 돈 되는 거면 다 챙겨갔어. 거 뭐여, 한우세트, 컴퓨터까지 외상으로 사다 놓구 내뺀 겨. 아저씨는 뭐 갖다 줬어?"
"선물세트요. 한 700만 원 정도 돼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내뱉는 구멍가게 아저씨. 이 아저씨 말투도 기분이 나쁩니다. 나를 언제 봤다고….

"하여튼 나쁜 놈들이여. 오늘도 아저씨가 세 번째여. 얘네들 엊그제 밤에 물건 다 빼고 날랐다구. 바지사장 세워서 완전히 계획적으로 사기 친 거예요."

사무실 문 옆에 붙어 있는 메모를 보았습니다.

'A 회사 관련자들은 현재 수배 중이니 사기 피해를 입은 분들은 천안 경찰서로 문의 바랍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손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약 10여 분간 구멍가게 아저씨의 설교를 들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꾹 누르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기요. 지난 번에 선물 세트 500개 주문해서 갖다 주었던 곳이요. 사기꾼들이래요. 지금 경찰에서…."

하늘이 노래지더니 가슴에 멍울이 생기고 한숨만 나왔습니다. 운전대 잡을 힘도 없었습니다. '무슨 낯짝으로 지점장님을 뵐 것이며 동료 직원들은 또 어떻게 보나'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잠시나마 다른 직원들 앞에서 거드름 피웠던 순간이 부끄럽고 창피하게 눈앞에서 흘러갔습니다.

어렵게 입사한 회사

영업 실적 팍팍 올려준 회사, 알고보니 전문 사기꾼들.
 영업 실적 팍팍 올려준 회사, 알고보니 전문 사기꾼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1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지금도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배송 직원으로 입사했습니다. IMF 구제 금융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수년간 단기 아르바이트와 백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때였습니다.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고 들어간 회사의 배려로 저는 1개월 뒤 정직원으로 발탁이 되었고,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내 손으로 밥벌이를 하게 돼 정말 기뻤습니다.

어느덧 계절은 가을이 되었습니다. 회사는 추석을 맞아 지점별로 선물 세트 판매 할당량을 내렸습니다. 판매 실적이 우수한 지점은 보너스가 주어진다고 했고, 판매 우수 직원에 대한 평가도 병행이 된답니다.

상품 판매라면 영업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도 못하는 제게는 큰 걱정이었습니다. 기존 거래처가 있기에 맨땅에 헤딩은 아니었지만 소심한 성격에 스트레스가 굉장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저는 선물 세트 팸플릿 한 무더기를 들고 차에 올랐습니다. 첫 거래처는 천안 공설 운동장 근처 골목길에 있는 A 회사. 처음 거래하는 회사라 찾는 데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고객이 주문한 상품을 내려놓고, 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선물 세트 팸플릿을 내밀었습니다.

"저,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직원들 선물 세트 정하지 않으셨으면 이거 한 번 보시겠어요? 가격은 조정 가능합니다."
"그래요? 어디 한 번 줘보세요."

"음…. 이거 괜찮겠는데. 이사님, 이 선물 세트 어때요?"
"김 부장이 알아서 해."

부장이라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더니, 팸플릿을 보고 손가락으로 짚어줍니다.

"B품목 200개랑 C품목 300개 주세요. 언제까지 되죠?"

전 이게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내게 선물 세트 주문을 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선물 세트 총 500개면 700만 원가량되는 큰 금액입니다. 뜬금 없이 첫 거래처에서 실적을 올린 것입니다. 전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 3일 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침 일찍 오겠습니다."

으쓱해진 마음, 하지만...

거래처를 나와 곧바로 사무실에 전화했습니다. 무척 흥분됐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조금은 거만하게 말했습니다.

"저, 선물 세트 주문 좀 넣어주세요. B품목 200개랑 C품목 300개요."
"벌써요? 대단한데요? 웬일이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팸플릿주고 한 마디했는데 바로 주문하네요."
"수고했어요. 근데 A업체는 처음 듣는 곳인데 어디에 있어요?"
"천안 공설운동장 옆 골목인데요, 사무실 개설한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직원들도 분주하게 왔다 갔다하고 차도 여러 대 서 있어요."

저는 으쓱한 마음을 누르고 다른 거래처를 향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한 번에 700만 원을 채웠으니 기존 거래처에서 조금만 더 실적을 올리면 2천만 원을 넘을 거고…. 정말 1등 하겠는데? 오늘 들러야 할 거래처가 스무 곳이니까 못해도 두 군데는 건질 수 있을 거야. 아자 아자! 힘내자.'

그날 전 오전에 세운 공적을 바탕으로 거래처마다 들러 선물 세트 영업을 했습니다. 모기만 한 소리와 함께 건네준 팸플릿은 대부분 휴지통으로 골인했지만, 몇몇 거래처에서는 할인 가격과 배송 일자를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이날 저는 추가로 다른 곳에서 500만 원의 실적을 올렸습니다. 저 자신도 놀랐고 실적을 확인하는 사무실 직원도 크게 놀란 눈치였습니다. 지점장님은 제게 전화를 걸어 축하도 해주셨습니다.

꿈 속에서도 영업은 계속

하루 배송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천국 마차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루 만에 1200만 원의 실적을 올렸습니다. 전국구로 봐도 이런 실적은 처음이랍니다. 사무실에서 지점장님과 대리님, 동료 직원의 축하를 받으며 전 행복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행복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도 선물 세트를 팔아치웠습니다.

당시 시즌에 저는 합계 2천만 원이 넘는 실적을 올렸습니다. 서로 자극이 되어서인지 다른 직원들도 대부분 1천만 원 이상 판매를 했습니다. 한 지점에서만 7천만 원 가까운 실적을 내니 본사에서도 상당히 놀라워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선물 세트 판매 1위는 떼놓은 당상이라며 자축했습니다. 추석이 4일 정도 남은 어느 날 아침, 지점 대리님이 저에게 종이 한 장 주시며 물어봅니다.

"지난번에 천안에서 700만 원어치 팔았던 A 회사 있죠? 아직 대금 입금이 안 됐던데 오늘 방문해서 확인 좀 해줄래요? 전화도 안 받네요?"

거래처마다 가끔 입금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전화 한 통화하거나 방문해서 사정을 얘기하면 바로 송금해주거든요. 바로 A 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텅 빈 사무실, 책상과 의자만 나뒹굴고...

텅 빈 사무실 계단을 내려오며 할 말을 잃었습니다.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찌 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 전문 사기범의 소행이라는 말에 하늘이 누렇게 보였다. 텅 빈 사무실 계단을 내려오며 할 말을 잃었습니다.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찌 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 김승한

관련사진보기

운전하며 보이는 저 멀리 A 회사가 좀 이상해 보입니다. 들를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문도 닫혀 있고 인기척이 없습니다. 사무실 앞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건 뭔가요?

아무도 없습니다. 사무실 집기는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습니다. 책상과 의자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종이 쪼가리와 전선이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 옆에 붙어 있는 글씨.

'A회사 관련자들은 현재 수배 중이니 피해를 입은 분들은 천안 경찰서로 문의 바랍니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유심히 보고 있던 구멍가게 아저씨가 사건의 전모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나같은 납품 업자를 대상으로 억대 사기를 치고 도주한 전문 사기범이었습니다. 전 망연자실한 채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관련 서류를 들고 천안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경찰관 아저씨 말씀은 이랬습니다.

"전문 사기범이에요. 바지사장 내세워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놈들이에요. 주동자는 부장과 이사라는데 지금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일단 오셨으니 서류 접수하시고요, 조서 작성하고 가시면 돼요. 그리고 수배령이 떨어졌으니까 잡히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그 사기꾼들! 잡혔을까요?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찰에서는 연락이 없습니다. 공소시효도 지났을 테고요. 지금도 어디선가 또 사기 치며 잘 살고 있을는지…. 그 놈들에게 딱 두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나한테 공짜로 가져간 사과는 다 깎아 먹었냐?"
"돈은 없어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

지점장님은 미숙한 영업으로 사기를 당한 저를 다그치거나 꾸중 한 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회수하지 못한 부실 채권 700만 원도 지점장님이 대신 해결해 주셨습니다. 14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지점장님과 아직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통화도 자주 하고요. 참 고마운 분입니다. 살아가며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이고 은혜입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선물세트, #사기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