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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8월 17일 오전 주주총회를 마치고 일본 도쿄도의 한 호텔을 빠져나가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8월 17일 오전 주주총회를 마치고 일본 도쿄도의 한 호텔을 빠져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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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7일 롯데홀딩스의 주주총회에서 롯데가 둘째아들 신동빈 회장이 승리를 거두면서 20여 일간 쉴새 없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를 연출해 온 롯데그룹의 왕위계승전이 일단락됐다.

현대차 정몽구 부자의 계열사 글로비스 지분매각, SK그룹의 SI계열사 SK C&C 합병, 한진그룹의 지주사 전환을 위한 계열사 한진칼과 정석기업의 합병, 삼성의 사실상 지주회사 격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이르기까지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일련의 사건들을 꿰뚫는 키워드는 '재벌의 출자구조'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되었지만 재벌그룹의 총수 일가는 2~3%에 불과한 지분으로 70~80여 개에 이르는 계열사들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러한 소유지배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흔히들 '순환출자'가 거론되지만 반드시 순환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출자의 순환이 해소된다고 재벌체제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순환출자 대신에 '계열사간 출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순환 출자가 해소가 재벌체제의 문제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언론과 전문가들에게도 충분히 소화되지 않고 있다. 이는 지난해 7월 신규 순환출자가 금지된 이후 대폭적인 순환출자 고리가 축소됐지만, 재벌의 지배력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2013년 4월에 9만7658개로 발표됐던 재벌의 순환출자 고리는 2014년 7월에 483개로 줄어들었다.

소유-경영의 분리와 기업 소유지배구조

출자의 순환이 해소된다고 재벌체제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일까?
 출자의 순환이 해소된다고 재벌체제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일까?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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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재벌의 출자구조가 문제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보기 위해 약간의 부연을 하겠다. 자본주의를 끌고 가는 대표적인 경제주체는 기업이다. 기업이라는 조직체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자본을 조달해 합리적인 경영방침 하에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시장경쟁에 참가하고, 그 성과를 적립해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영위한다. 그런데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만드는 물건이 다양해질수록 더 많은 인력과 자금이 필요하고 복잡한 이해관계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기업의 형태 역시 여러 가지 방식이 가능한데, 오랜 경험을 통해 다수 출자자로부터 자금을 제공받되 전문경영자가 이사회를 구성해 상시적인 경영을 담당하고 주주는 일정한 사항에 대해서만 결정을 내리는 주식회사 체제가 지배적인 현상이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회사의 90% 이상이 주식회사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발생함에 따라 이해관계자들 간의 충돌 문제(경제학에서 말하는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업 소유지배구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소유지배구조의 개혁 기회와 무산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외환위기로 기존의 소유지배구조가 파산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정부가 국민 다수의 저축으로 형성된 자금을 유망 기업들에 재량적으로 배분했고 기업주는 다수 지분을 보유한 지배주주로 회사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기업의 규모가 확대되고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게 되는 과정에서 창업자의 지분 축소는 불가피하게 됐으며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취득 한도가 폐지되고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의 압력이 밀어닥치면서 소유지배구조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내외부적 변화의 기회를 재벌이 정당하게 대응하기보다는 계열사의 지분을 확대하고 2세에게 승계시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소모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총수 개인은 2% 내외의 지분을 보유하면서도 계열회사 및 특수관계인, 공익재단 등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로 개별 기업을 넘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왕조 시대적 유산이 해소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재벌이 기업을 지배하는 마법 '계열사간 출자'

롯데그룹의 지분구조도(2015년 4월 1일 기준)
 롯데그룹의 지분구조도(2015년 4월 1일 기준)
ⓒ 공정거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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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의 성장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뤄진 만큼 성장의 견인차였던 기업의 규모 역시 비약적인 확대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근로자를 비롯한 다수 이해관계자들의 땀과 눈물을 제대로 평가하기보다는 기업을 자신의 사유물로 여긴 재벌 일가의 계열사간 출자가 확대되면서 소유-지배간 괴리는 커졌다.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정부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재벌 대주주의 소유-지배 괴리가 완화되면 출자총액제한(한 기업이 회사 자금으로 다른 회사의 주식을 매입해 보유할 수 있는 총액을 제한하는 제도)을 폐지하겠다는 등의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을 내걸었지만 결국 출자총액제한만 폐지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간접 지배가 순환으로 연결된 경우에는 가공자본까지 만들어졌다. 재계에서는 적대적 M&A에 대항하고 경영권 승계를 위해서는 계열사 지분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정권교체 없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고 경영권은 천부인권이 아님을 감안하면 기본 전제부터 잘못된 전근대적·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애플, 테슬라,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굴지의 기업들은 창고 한켠에서 시작해 성장성과 잠재력을 인정받아 투자를 확보하고 해당 사업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혁신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반면 계열사간 출자라는 연환계로 국내 산업의 전 영역에 진출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함으로써 막대한 내부거래로 황금의 탑을 쌓은 우리 재벌은 그들과의 경쟁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최근 매일같이 들려오는 위기의 원인은 먼 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방조와 재벌의 탐욕이 어우러져 '땅콩 회항'(한진)과 '손가락 경영'(롯데)이 가능해진 현재의 계열사간 출자구조가 시장의 규율과 감독으로부터 철옹성을 쌓고 있다. 총수 일가가 임명한 임원으로 구성된 이사회로부터 선임되는 사외이사나 감사, 정관에서 배제조항을 기본으로 담고 있는 집중투표제, 지극히 협소한 영역에서만 허용되고 있는 집단소송제가 어떻게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겠는가?

기업개혁의 기치를 건 지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제도들의 실질적 작동을 요구하는 경제민주화 공약이 대통령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적은 지분으로 많은 회사들을 지배하려는 헛된 꿈을 버리지 않은 한 언제라도 다시 소액주주의 불만과 외국계펀드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소규모 신생기업의 진입은 원천 봉쇄되고 있고, 빵·분식집·문구·슈퍼 같은 소규모 기업과 영세 상인들은 내몰리고 있다. 실적 나쁜 계열사의 퇴출과 이를 통한 자율적 구조조정은 이뤄질 방법이 없다.

광복 70년을 맞아 영화 <암살>을 통해서나마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를 반성하며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살리려는 바람이 불고 있다. 기업을 개인 소유물로 여기며 대를 이어 물려받으려는 구태와 악습은 언제쯤 청산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하준 님은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롯데, #순환출자, #재벌 , #경제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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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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