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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는 베르나우(Benau) 문화부와 베를린예술대학 아트 인 컨텍스트(Art in Context) 연구소의 주최로 필자가 독일에서 2015년 6월부터 9월까지 진행하는 참여형 예술프로젝트다.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올해로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과 통일 25주년을 맞이하는 독일 사이에 어떠한 역사적 간극이 존재하는지,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전쟁 이후 독일과 한국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지를 고민하며 베르나우 지역주민들과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과정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나누고자 몇 회에 걸쳐 게재하려 한다.... 기자 말

다른 할머니들이 한참 동안 열심히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친케 할머니는 단 하나의 짧은 문장을 쓴 채로 가만히 자신이 만든 비누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누에는 4개의 숫자가 보였다.

'1 9 8 8'

내가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자, 할머니는 자신이 종이에 쓴 문장을 보여주며 말씀하신다.

"1988년에 아들을 잃어 버렸어."

나는 순간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만 했다. 그녀는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이런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해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분단된 독일만 보고 살다 간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조용히 옆에서 듣고 있던 도른버그 할머니가 주름 가득한 손으로 친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전시된 친케 할머니의 비누와 글. 빨간 비누 안에 '1988'이라는 숫자는 그녀가 아들을 잃어버린 해를 뜻한다.
 전시된 친케 할머니의 비누와 글. 빨간 비누 안에 '1988'이라는 숫자는 그녀가 아들을 잃어버린 해를 뜻한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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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케 할머니는 내가 베르나우에 와서 처음 '빨래 프로젝트'에 대해 주민설명회를 했을 때부터 열성적인 반응을 보여주신 분이다. 그녀는 서독 출신이지만 동독 남자를 만나 결혼한 후, 지금까지 동독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냉전으로, 혹은 이데올로기 분쟁으로 인해 갖게 된 각자의 '불안'을 비누로 만들어서 씻어 버리자는 '빨래프로젝트'에 대해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이른바 '동독 여성들의 모임'에 있는 친구들의 참여까지 끌어냈다(관련기사 : 한국말로 뭐라 했지? 아, 빨갱이 내가 빨갱이야).

사실 빨래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빨래하기 전, 비누를 만드는 과정이다. 비누는 단순히 빨래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독일 분단되었을 때 동독지역에 속했던 베르나우 사람들과 내가 소통을 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몇 차례에 걸쳐 빨래프로젝트 참여자들과 비누를 만들기를 했다. 이름하여 '불안 비누 만들기 워크숍'.

워크숍 참가자들이 알파벳을 조합해서 자신들만의 '불안비누'를 만들고 있는 모습
 워크숍 참가자들이 알파벳을 조합해서 자신들만의 '불안비누'를 만들고 있는 모습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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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부터 Z까지, 몇 백 개의 알파벳과 숫자들을 미리 비누로 만들어 놓았다. 빨래프로젝트 참여자들은 각자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준비된 알파벳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불안비누'를 만들어 베르나우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에 전시했다(관련기사 : 온통 빨간색 군사기지, 한국이 불안하다). 베르나우 사람들은 그렇게 '빨간 비누'를 만들며 자신들이 경험한 분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전쟁보다 두려운 것

"나는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였어."

안드레 할아버지가 무거운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의 반공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후였다.

"한국 사람들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지금까지 싸우는 게 너무 안타까워.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 나는 공산당 당원이었어. 내가 선택해서 코뮤니스트가 된 게 아니라 그냥 동독에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어느새 코뮤니스트가 되었지. 그때 당시 서독 언론들과 정치인들은 동독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국가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지. 하지만 정작 동독에 살았던 나의 삶은 그렇지 않았어. 우린 항상 이웃들과 함께 일을 했었고, 함께 무엇이든 나눠먹었지. 무엇보다 지금처럼 월세를 낼 걱정 따위는 안 했었지.

한적한 도시 외곽인 베르나우에서 공산주의자로 사는 건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어. 신자유주의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나를 지금 가장 불안하게 하는 건, 내가 늙어간다는 거야. 더 이상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는 거야. 이것 봐, 내 몸뚱아리 하나 조절 못해서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한다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비누에 '나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한편, 안드레 할아버지보다 9살이나 많은 지그리드 할머니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녀는 먼저 질문 하나를 던졌다. 

"한국 사람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아니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어떤지는 잘 알죠."

내가 농담처럼 웃으며 대답하자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흥미로운 점은 한반도 분단 이후에 태어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왜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토록 반감을 가지고 있냐는 거야. 한국 사람들의 불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는 것 같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제대로 본 적도 없으니까 불분명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더욱 검열하고 더욱 불안해 하는 거지. 세대가 바뀌어도 그 불안은 대물림될 거야.

내가 젊었을 때, 코뮤니즘(공산주의)은 내 꿈이었어. 코뮤니즘이야말로 긍정적 가능성이 많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지…. 나는 지금까지 많은 걸 경험해 왔어. 전쟁을 경험했고, 총 맞아 죽는 사람들을 봤고, 군중들의 폭력을 봤고, 굶주림과 가뭄 등 많은 걸 경험해 봤지…. 그럼에도 내가 요즘 제일 두려운 것은 차가움이야, 사람에 대한 차가움.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할 줄 모르는 차가움말야."

지그리드 할머니의 불안비누에는 '차가움'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에게 공산주의는 한때 그녀의 꿈이었지만, 현재는 실패한 혁명에 불과하다. 과거 혁명과 평등을 꿈꾸며 하늘을 향해 불끈 추켜올렸던 독일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주먹은 이제 매달 연금을 받고, 동네 카페에서 포커를 치며 살아가는 노인의 주름 가득한 손이 되어 버렸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유령,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그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전혀 두렵지 않은 형태로 그렇게 독일 이곳저곳에 박제가 되어 있는 듯하다. 베르나우에 있는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에 그려진 낡아 빠진 공산주의 프로파간다 벽화처럼 말이다.

자신의 비누를 다 만들고 자신의 불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지그리드 할머니
 자신의 비누를 다 만들고 자신의 불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지그리드 할머니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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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불안을 씻어 낼 수 있을까

한편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젊은 세대에 속하는 안드레아스 아줌마는 한국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그녀의 질문들은 단순했지만 내 속을 쓰리게 했다. 가령 '한국 사람들은 왜 북한에 못 가?'라든가, '그럼 외국에서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돼?'라든가, '독재자의 딸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어?'라는 식의 질문들 말이다.

안드레아스 아줌마는 나중에 남북한이 통일되면 반드시 한반도로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네! 꼭이요'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과연 그날이 언제쯤이 될까 싶어 마음 한편이 갑갑해졌다.

하루는 워크숍이 끝날 때쯤 재료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워크숍에 참여한 디아나 할머니가 다가와 함께 재료 정리하는 것을 도와준 후, 나를 안으면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다.

"너에게 너무 고마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남의 불안이나 두려움에 대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듣고, 깊게 이야기 해본 적이 없었어. 이 워크숍은 뭔가 이상한 마법 같은 힘이 있는 것 같아. 그거 아니? 근데 오늘 여기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내가 살았던 역사를 사람들이 이해해 주니까, 내가 갖고 있던 불안도 천천히 없어지는 걸 느꼈어. 나는 한국에서 온 너와 내가 분단이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우리 오늘 만든 우리들의 불안비누를 빨래하면서 모조리 씻어버리자! 너의 불안도 말이야! 다음에 빨래하러 모이는 날 나눠먹을 음식도 가져갈게!"

디아나 할머니의 불안비누에는 '지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정치 상황은 갑갑했지만 모든 것을 이웃들과 함께 했던 과거 동독 시절에 비해 요즘 부쩍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했다.

그렇게 나보다도 키가 작은 백발의 할머니가 소녀처럼 나를 힘껏 안아주고는 씩씩하게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철렁했다. '나도 저 나이쯤 되었을 때, 세상 갖은 풍파를 겪고도 저렇게 씩씩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사실 나는 우울해져가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불가피하게 한국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독일 사람들에게 매번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때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좋은 점을 이야기해보려 했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한국이 좋은 나라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참혹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동독사람으로서의 삶이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면 할수록 한국과 북한의 분단된 현실이 더욱 냉혹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독일은 우리 상황보다는 낫잖아'라는 식의 생각들이 나를 더욱 괴롭혔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분단된 나라의 사회적 모순들과 아픔들이 지금은 모두 '과거형'이라는 것, 하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나를 더욱 회의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베르나우, #공공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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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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