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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으로 '제17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새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사이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기자 말

2015년 6월 15일 저녁에는 일본 도쿄에서 첫 강연이 있다. 이날 오전에는 '우리학교'를 방문하는 일정이 잡혀 있다.

내가 일본 초청을 받아들이자 각 도시의 주최 측으로부터 관광 일정을 잡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내가 강연할 모든 도시가 관광으로도 유명한 도시들이라며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우리학교'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다행히도 내가 강연하는 모든 도시에 '우리학교'가 있다고 한다.

'우리학교'란 조총련계의 조선학교를 말한다. 전 교과과정을 우리 말과 우리 글로 수업을 진행하고, 민족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학교다. 한국에서도 이 학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우리학교'를 방문하고 지원도 한다. '우리학교'를 지원하는 대표적인 단체로 '몽당연필',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등이 있다. 나는 유튜브를 통해 영화 <우리학교>와 <60만번의 트라이>의 예고편을 보고 재일동포 학교에 대해 알게 됐다.

미국에는 기껏해야 주말에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한글학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주말 '한글학교'에서 우리말과 글을 깨우치는 일이란 쉽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 2세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거나 케이팝(K-Pop)을 따라 부르며 우리말을 익힌다.

영화 <우리학교>는 나에게 큰 감동을 줬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우리학교'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설령 이런 학교가 있다고 해도, 자녀들이 하루빨리 미국 사회에 동화돼 주류사회로 진출하기 바라는 부모들은 자녀를 '우리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일 실감했을 거예요"

박수로 맞이해 주는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 학생들.
 박수로 맞이해 주는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 학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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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기로 한 학교는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 과연 어떤 학교일까. 조총련계 학교이니 북한에서 가봤던 그런 학교들이겠지 생각했다. 칠판 위 벽면에는 북한 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학생들은 북한에서 제작한 교과서로 공부할 테고….

우리가 탄 차량이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들께서 반갑게 맞아준다. 인사를 나눈 후 현관에 들어서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학생들이 도열해 꽃다발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혹시라도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선다.

환영인사를 마치고 잠시 교장 선생님과 환담을 나눈 뒤 나는 체육관으로 안내됐다. 전교생이 모여 있는 체육관 벽에는 '신은미 선생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남북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보고 있는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 학생들.
 남북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보고 있는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 학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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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대형스크린에서 6.15선언 15주년 기념 동영상이 상영된다. 6.15선언 당시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에서 내보냈던 영상물이다. 이를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통일된 조국을 그리는 아이들의 마음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어서 학년별로 환영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른다.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드는 과분한 대접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어린이 여러분들은 통일 조국에서 살아갈 우리의 꿈나무들이며 미래입니다, 부디 민족의 혼을 간직한 자랑스러운 겨레가 돼주세요"라는 말로 답례했다. 그러자 옆에 계신 선생님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귓속말을 한다.

"선생님, 저 아이들은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일을 실감했을 거예요. 재미동포가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통일을 이야기하며 어울린 적이 없었으니까요."

솔직히 나는 그 선생님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꿈만 같은 통일조국을 실감케 해줬다니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환영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교실로 돌아간 뒤 나는 아이들의 학습현장을 참관했다. 교실에는 내 예상과는 달리 북한 지도자들의 사진도 걸려 있지 않았고, 교재도 북에서 온 게 아니라 현지에서 제작한 것들이었다. 교과 내용 또한 여느 학교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일본 땅이지만 모든 수업이 우리말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과 여선생님들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말 수업과 여선생님들의 이런 모습이 '우리학교'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에는 고등학생들도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일본 학생들이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심지어는 면도칼로 옷을 찢는 등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요새 들어서는 바깥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는단다. 학생이 원하는 경우 교내에서만 입는다고.

아주 오래 전 일본여행 때 목격한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한 쌍의 여학생이 도쿄의 지하철역을 걸어가고 있었다. 조선인이라면 '뼛속까지' 멸시하는 사람들이 사는 일본에서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대놓고 활보했던 이들이 아마도 지금의 '우리학교' 선생님들일 게다.

한 할머니의 질문

도쿄에서의 첫 강연 당시 모습.
 도쿄에서의 첫 강연 당시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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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연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하니 건장한 청년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난해 겨울 익산 통일 토크콘서트에서 발생했던 사제폭발물 테러를 의식해 빈틈없는 경호를 펼치고 있었다. 주최 측은 "일본에서 익산 테러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없지만,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라면서 나를 안심시킨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성황이다. 더욱이 민단 측에서 '신은미의 강연에 참석하지 말라'는 공문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국 유학생, 주재원 등 이미 책을 구입한 사람들이 강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책을 들고 와 사인을 부탁한다.

한국 언론사들의 기자들도 왔지만 주최 측은 몇몇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장을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주최 측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강연이 끝나자 한 할머니가 질문하신다. 그런데 휴대전화와 마이크를 한 손에 들고 말을 한다. 누군가에게 휴대전화를 통해 질문과 대답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에서는 30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당신은 북한에 몇 번 갔다 오고 뭘 안다고 북한에 대해 말을 하는 겁니까?"

"저는 북한에 관광여행을 다녀온 사람입니다, 북한의 식량문제 등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계시니 그분들께 문의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간단히 답했다. 이분의 질문은 다음날 일부 방송과 언론 보도에 언급됐다. '신은미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다 그 강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저런 날카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는 듯이.

간혹 일부 언론의 '빈정거리는' 평론가들도 비슷한 말을 해댔다. '북한에 몇 번 갔다 오고 책을 썼다'며 내가 쓴 북한 기행문을 폄훼했다. 그러나 시중에 출간된 기행문들이란 단 한 번 여행을 다녀와서 쓴 것들이 대부분 아닌가.

도쿄 강연 종료 후 재일동포 독자들에게 책 사인을 하는 모습.
 도쿄 강연 종료 후 재일동포 독자들에게 책 사인을 하는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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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청중들의 모습과 분위기는 한국이나 미국의 동포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내가 북한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들을 이야기하면 박장대소를 하다가도, '조국'이나 '통일'이라는 말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을 꺼내 들고 눈물을 훔쳤다. 이게 바로 재일동포다.

온갖 멸시와 차별을 경험하면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실감하며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에게 '조국'이란 말은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다. 게다가 조총련에 속해 있는 동포들은 한국의 선산에도 갈 수 없다. 이들에게 '통일'은 곧 '성묘'를 의미하기도 한다. '조국'과 '통일'이란 말에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일본서 태어난 아이의 말... "내 고향은 경북 상주"

멀리 구마모토에서 오신 한 독자분께서 강연이 끝나고 뒤풀이에 참석했다. 그분은 "구마모토는 말고기가 유명하다"라면서 얼음이 가득 들어있는 비닐팩에 정성 들여 싸온 말고기 육회를 꺼내놓으셨다. 그러더니 어서 한 점 들어보라 권하신다. 아, 그 '맛있다'는 개고기도 입에 못 대는데 말고기를…, 그것도 날것으로….

무척 당황해 젓가락을 들었다놨다 하는 걸 본 한 여자 아이가 내게 "정말 맛있습니다, 어서 드셔 보세요"라면서 덩달아 초조해 한다. 잘됐다 싶어 미적거리면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슬그머니 놓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고마워. 너도 혹시 고향이 구마모토니?"
"아니에요. 제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입니다."
"경상북도 상주?"
"네."

"일본에는 언제 왔어?"
"저는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재일동포 4세입니다."
"지금 방금 고향이 경상북도 상주라고 했잖아."
"아, 네…, 저희는 할아버지께서 태어나신 곳을 내고향이라고 합니다. 증조 할아버지께서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셨답니다. 언젠가는 꼭 가볼 거예요."

재일동포 4세 어린 아이로부터 '가보지도 못한 할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내 고향'이라는 말을 듣다니…. 울컥,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목구멍까지 복받쳐 오른다. 말고기 한 점을 나도 몰래 꿀꺽 삼켜버렸다.

재일동포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우리나라 지명을 댄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태어난 곳을 절대로 고향이라 말하지 않는다. 나는 조총련 동포 대부분이 북한과 지역적 연고를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서 만난 이들 대부분은 경상도·제주도·전라도 등에서 일본으로 넘어온 분들의 후손들이었다. 그럼에도 조총련에 속한 동포들의 경우, 남녘 고향에 갈 수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와서 한동안 가능했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다시 한국 방문이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지금의 한국 정부는 인도주의에 입각해 북한 정부에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반면, 조총련 재일동포의 성묘나 친척 방문을 위한 입국은 불허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인권문제 또한 거론하고 있다. 최근 서울에는 '북한인권사무소'마저 설치됐다. 그러나 멀리 북한까지 거론할 것도 없다. 조총련 재일동포들의 모국 방문부터 허락해야 한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 박혀 있는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인권 중의 하나가 조상 성묘 그리고 가족상봉이 아닌가.

"내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라는 재일동포 4세 아이의 말을 되뇌이며 호텔로 돌아왔다. 얼마나 많은 재일동포가 지금 내가 밟고 걷는 이 땅, 이 길을 따라 고향을 그리며 고개를 떨궜을까. 무거운 발걸음에 나도 그만 주저앉고 싶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신은미, #재일동포, #북한, #통일, #조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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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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