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대한민국은 지금 '노동개혁'의 시대다. 정부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임금피크제'를 실행하겠다는 나라다. 이미 노동부의 '노동'이 불온해 보인다는 듯, '고용'노동부로 덧댄 나라에서 이제는 그 노동을 뜯어고치겠단다. 노동을 '개혁'의 대상으로 봐야 한단다. 그리고, 노동자에게 성실하게만 일해 달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주문한다.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바닥인생이었는데, 박근혜 대통령 때도 똑같다."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의 카메라 앞에 마주한 어느 여성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노조 투쟁을 벌였던 동일방직의 여공들도, 2015년 서울시로부터 직접 고용 시위를 벌이는 '콜순이' 상담 여직원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누구 말마따나 그저 성실하게 일한 그들이 노동의 대가를, 노동 환경을 정당하게 보장받았는지는 의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됐듯,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변함없는 노동자, 여성노동자들의 삶이 그러하다.

"임흥순 감독의 영화 <위로공단> 시사회에 갔습니다. 영화제가 아닌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서 은사자상을 받았다는 게 궁금했는데, 정말 다큐멘터리면서 미술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노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정치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도요."

지난 7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트위터에 쓴 감상평이다. 그렇다. 13일 개봉하는 <위로공단>은 영화이면서 미술이고, 다큐멘터리이면서 예술이기도 하다. 실로 섬세하고 지적이며 감정적이기까지 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40여 년의 시간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공간을 포괄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노동이란, 한국사회에서 여성노동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명량>이나 <국제시장>을 관람했던 박근혜 대통령이라면, 세계 예술계가 주목한 수작을 꼭 관람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화융성'이란 돈이 바탕이 아니라 예술이, 정신이 바탕이 되는 법이니까. 구로공단을 거쳐 캄보디아 카나디아 공단의 공순이들에게까지 헌사와 위로를 보내는 <위로공단>. 이 영화는 예술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독보적인 다큐멘터리다.

이성과 감성, 미술과 영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영화에서 폐병에 걸린 젊은 여공은 동료에게 "너라도 이런 데서 일하지 말라"고 힘없이, 그러나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이키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은 그 운동화를 꼭 한번 신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월급으론 절대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공장 노동자가 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그때는 대학에 그렇게 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게 된 여성 노동자들은 머리를 깎아야 했을 때, 여자로서 눈물이 그렇게 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 쉽지 않았다. 아니 대부분이 회사와 정권에 의해 격한 노동 조건에, 절실한 투쟁 환경에 내몰렸다. 1970년대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과 YH무역 농성사건, 1980년대 구로동맹파업, 그리고 2005년 기륭전자 사태가 대표적이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임흥순 감독은 그들의 목소리를 지금의 시점에서 되살린다. 엄마가, 아내가, 또 삶의 주체가 됐지만 여전히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을 잃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기억을 공간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으로.

여기서 그쳤다면 여타 다큐멘터리와 다르지 않았을 터. 베니스비엔날레는 물론 일반 관객들까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 영화, <위로공단>의 도드라진 변별점은 바로 인물들의 마음을 들여다본 뒤 외면화한 여러 퍼포먼스다. 인터뷰 중간중간 삽입된 임흥순 감독의 강조점은 어느 한 갈래로 묶기 어렵다.

때로는 개미들의 움직임을 클로즈업에 담는다. 유독 까마귀떼가 푸른 하늘을 휘젓는다. 머리카락 조금을 빼고는 온몸이 흰 천으로 뒤덮인 여성들이 귓속말을 나눈다. 여공처럼 보이는 여성이 눈을 가리고 빨간 옷을 입은 소녀의 손을 잡고 숲을 걸어간다. 또 눈을 가린 소녀는 낡은 건물을 더듬거리듯 내려온다. 모든 연출은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노동했거나 하고 있는 여성들의 마음을 임흥순 감독이 해석해 낸 결과다. 퍼포먼스는 대체로 기민하게 이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섬세하게 감정을 북돋운다.

이성과 감성의 공존은 <위로공단>이 인간을 바라보고, 시대를 조망하며, 그리하여 다시 2015년의 대한민국을 부드럽게 직시하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 더불어 다이얼로그로부터 축적된 인터뷰이들의 심상은 상승 작용을 거치게 된다. 각 인터뷰이들이 생활했던 공간의 독특한 기운과 기억으로부터 길어 온 자료화면들, 현재적이고 은유적인 퍼포먼스를 통해서. 후반부, 임흥순 감독의 이러한 연출 방식은 '여기'의 '회고'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각의 확장을 통해 훨씬 더 큰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구로공단부터 캄보디아 공단까지, 시공간을 아우르는 시선의 확장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하루만 쉬게 해달라고 해도 돌아오는 건 욕설뿐. 월급을 모아 공부를 하고 싶지만, 고향 집에 월급 대부분을 보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비정규직은 85달러, 정규직이어도 95달러. 캄보디아 카나디아 공단의 의류 노동자들은 한국, 중국, 일본 등으로 수출되는 40~50달러짜리 옷을 입을 여력이 없다. 과거 한국 여공들의 나이키 운동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영화 <위로공단>은 카메라를 어린 캄보디아 여공들에게 가져간다. 그들의 목소리와 얼굴은 고스란히 1970, 80년대 우리 어머니와 누나들의 얼굴과 겹친다. 2014년 카나디아 공단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고, 한·중·일 기업들은 생산에 차질을 빚자 대사관을 통해 강경 진압을 촉구했다. 그리고 2014년 벽두, 캄보디아 공권력은 시위 중인 노동자들에게 구타와 폭력, 심지어 발포까지 자행했다.

임흥순 감독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캄보디아 유혈사태를 적극적으로 내러티브(이야기 전개)에 끌어들인다. <위로공단>의 동시대성, '저개발의 기억'을 아시아라는 공간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동시에, 이제는 제3세계로 범주화할 수 없는 동아시아 국가와의 격차도 빠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투쟁까지도 폭력으로 물들게 하는 한·중·일 기업, 자본의 탐욕까지 언급한다.

더불어 <위로공단>은 익숙한 여러 표현 기법을 쓰면서도, 형식에 있어 독창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미싱 작업이 한창인 공장을 훑어가며 길게 찍은 장면이 대표적이다. 최초로 노동 현장을 카메라에 길게 담은 이 장면은, 저 타국 노동자들의 오늘날 모습을 통해 '노동의 엄중함'을 강조한다. 동시에 영화가 과거 한국의 '공순이'들과의 접점을 연결하는 문제적인 강조점이다. 그리고 다시, 오늘날 한국의 서울로 돌아온다.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절에 종로 한복판에 모여 "우리를 처벌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위로공단>이 '위로'하는 현재의 우리들에 대하여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아이 원하는 것도 못해 주고, 어머니에게 10만 원씩 드리는 것도 부담되고. 이런 상황을 부모님도 다 아니까 고통스럽죠.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다 책임을 지고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늙어서 스스로 날 관리 못할까 봐. 이대로 죽어야 하나."

일명 '콜순이'로 불리는 다산콜센터 상담노동자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정규직과 다를 바 없이 열심히 일해도 삶의 불안정성에 시달려야 하는 비정규직의 고통스러운 삶. 그들은 현재까지 서울시를 상대로 직접 고용 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위로공단>은 그렇게 다양하게 분화된 여성노동자들의 현재를 여러 갈래로 분산시켰다가 또 취합한다.

영화 <카트>의 배경이 됐던 이랜드 홈에버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는 휴게공간까지 기도실로 만들어 버리는 회사의 무신경함에 치를 떤다. 계산대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손님이 던진 카드에 맞는 굴욕을 감내해야 하고, "너 말 안 들으면 이런 데서 일한다"고 어린 자녀에게 말하는 손님을 마주해야 한다.

화려해 보이는 승무원들도 고되긴 마찬가지다. 어느 외국인 손님은 앉아서 다리를 벌려 보라고 요구하고, 왜 무릎까지 꿇고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육체노동의 고단함은 이제 감정노동의 무게까지 짐 지우는 형태로 변모해 가고 있다.

21세기의 여성 노동자는 어쩌면 김흥순 감독이 힘을 주어 연출한 퍼포먼스처럼, 눈을 가리고 더듬더듬 건물에서 내려가는 소녀와 같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명확했던 싸움의 대상이 존재했던 과거와 달리, 언제 어디서 옥죌지 모르는 대상 혹은 사회 전체와 끊임없이 싸워나가야 하는 막막한 환경에 봉착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한 승무원 노동자의 절실한 한 마디는 팍팍한 울림을 전해 준다.

"한 번 사는 삶, 저도 진실한 삶을 살아 보고 싶어요."

영화의 후반부에서 임흥순 감독은 두 가지 이미지로 <위로공단>을 '현재', '여기'에 단단히 연결한다. 한겨울 서울시청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이는 노동자들과 그 옆에서 유유히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의 대비. 이어 시청 건물을 뒤로 한 채 광장에 선 소녀만을 흑백 처리한 화면에서 '메르스 극복을 위해 힘을 모아주세요'라는 간판이 달린 시청 앞 여성 의료노동자로의 장면 전환. 이 장면만으로도 <위로공단>은 무시무시하게 우리의 노동 조건, 처지를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현재의 '조건'들을 환기시키는 임흥순 감독의 연출은 이름 모를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한적한 동네 공원에서 노닐다 업고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누군가는 이를 손쉬운 '위로'로 재단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업느냐가 중요하다. 오히려 나이를 먹은 이가 더 어린 쪽을 업는 연출 의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낱 '연대'라는 단어로 한정하기에, 시대와 세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위로공단>이 내포한 뜻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 한정하는 것 또한 편협한 시각이다. <위로공단>은 '노동'하는 다양한 관객들이 서로 토론하고 질문을 하면서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작품이다. <명량>이나 <연평해전>에 비해 쉽진 않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 작품을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욱이, 문화 한류를 그렇게 강조하시는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국내 최초로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예술 한류의 현재형 아니겠는가.

○ 편집ㅣ김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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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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