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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바로 며칠 전에 시작되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거실에 앉아있는 나에게 이제 막 직장에서 퇴근한 베르나르 아저씨가 말을 걸어 오셨다. 이번 주말에 가족들이 다 같이 자신의 부모님을 방문할 예정인데 혹시 같이 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나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말이다. 베르나르 아저씨의 아버님은 이제 연로하시고 밖에 잘 나가지 못하시기 때문에, 다 같이 그곳에 가는 김에 내가 한 번 바이올린을 연주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베르나르 아저씨의 부탁이었다.

사실 바이올린을 가져오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3개월 동안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실력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지만, 여행 중에 새롭게 만나게 될 고마운 분들께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드리고자 가져온 것이 바이올린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피곤하기도 했지만, 흔쾌히 가겠다고 답했다.

아침을 대강 챙겨 먹고 이것저것 준비를 한 다음 가족 모두가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파리에서 약 19km 정도 떨어져 있는 생제르망앙레(Saint-Germain-en-Laye). 베르나르 아저씨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이곳은 수 세기 전 태양왕 루이 14세가 태어난 곳이자 현재 유명 축구팀 파리 생제르망(Paris Saint-Germain)의 훈련장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생제르망앙레에 가려면 RER(Réseau Express Régional)이라 불리는 급행열차를 타야 했기에 가까운 RER역이 있는 마레지구로 향했다. 마레지구는 그 이름(Marais, 늪)이 의미하는 대로 예전에는 늪지대였던 곳이다. 늪이 너무 많고 흙이 질어 예로부터 도외시되다 14세기부터 수도사들에 의해 경작되기 시작한 이곳은 17~18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의 주거지로 변모했고, 20세기에는 전 세계로부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꼽자면 동성애와 유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마레지구를 걷다 보면 동성 커플이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키파(Kippah)라고 불리는 모자를 쓴 유대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감옥에서 인턴 경험 쌓는 프랑스 대학생

팔라펠을 먹읍시다! - 베르나르 아저씨
 팔라펠을 먹읍시다! - 베르나르 아저씨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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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갑자기 배가 고파진 탓에 그곳에서 아침도 점심도 간식도 아닌, 그래도 배를 채울 수있는 무언가를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마레지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팔라펠(Falafel) 가게. 흔히 유대인들의 음식으로 알려진 팔라펠은 병아리콩을 으깨어 만든 동그란 공 모양의 음식인데, 피타(pita)라 불리는 넓적한 빵에 이런저런 야채와 함께 담겨져 나온다.

이 음식은 유래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이집트,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의 전통음식이라 주장하고 있어 상당한 논쟁을 빚는 중이라고 한다. 가게는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문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음식이 나왔다. 팔라펠을 한 입 베어 물은 순간, 역시 많은 나라들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게에서 나와 근처 레 알(Les Halles)역에서 RER A 선을 타고 셍제르망앙레로 향했다. 워낙 대가족이다 보니 다들 따로따로 앉았는데, 나는 어쩌다보니 이 집 셋째 딸 소피와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소피는 파리 1대학, 판테온-소르본에서 법과 경영을 복수 전공하고 있는데, 지금은 학교를 잠시 쉬며 법원과 감옥에서 인턴십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프랑스 사회는 어떤 사람을 뽑을 때 공부와 그에 따른 성적도 보지만, 그보다 '그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경험을 쌓아왔는가'에 더 초점을 둔다고 한다.

그 때문에 대다수의 프랑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며 학기 중에, 혹은 휴학을 해가면서까지 수시로 전공에 관련된 인턴십을 하고 있고, 또 해야만 한다고 한다. 오늘은 소피의 감옥 인턴십 경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소피가 감옥에서 하는 일은 장기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옥 안에서도 사회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게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소피는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이제 곧 인턴 계약 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더 새로운 경험을 쌓기 위해 다른 감옥으로 옮겨야 할지, 아니면 지금 있는 감옥의 사람들과 의리를 지켜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베르나르 아저씨는 본인 생각에는 지금 있는 감옥에 남는 것이 좋겠지만, 알아서 잘 결정하라고 했고, 옆에 있는 나는 딱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그새 기차는 생제르망앙레에 도착했다.

생제르망앙레 성(Chateau de Saint-Germain-en-Laye)
 생제르망앙레 성(Chateau de Saint-Germain-en-Laye)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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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밖으로 나오니 커다란 성이 보인다. 도시의 이름 그대로 생제르망앙레의 성(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이라 불리는 이곳은 12세기 루이 6세 시절 처음 건설되었다가 불타 없어진 성을 16세기 무렵 프랑수아 1세가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성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프랑스 왕실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태양왕 루이 14세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훗날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또 다른 성을 건축했고, 이 생제르망앙레의 성은 영국에서 망명해온 제임스 2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점점 세월이 흐르며 프랑스 왕가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다

생제르망앙레에서 바라본 파리
 생제르망앙레에서 바라본 파리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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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생제르망앙레 성 내부는 성의 역사와 여러 고대 유물들이 전시된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성 밖의 드넓은 정원은 많은 사람들이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휴식처가 되었다. 역에서부터 성을 지나 계속해서 걷다 보면 정원의 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다. 저 멀리 희미한 라데팡스와 에펠탑을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 드디어 베르나르 아저씨의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두 분의 환영을 받으며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교외의 자그마한 전원주택인 이곳은 집 자체도 아늑했지만, 주변 환경이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원에 누워 위를 올려다보니 이곳에 300년 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 눈을 감으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흘러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몸과 마음은 계속 늘어져 갔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늘어짐이었다. 다른 식구들도 번잡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다. 가족끼리 담소를 나누며, 혹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며 다들 한가로운 주말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싼 가족의 일요일
 하싼 가족의 일요일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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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적한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정원에 둘러앉은 모두를 앞에 두고 바흐의 '파르티타 2번'을 시작으로 '타이스의 명상곡', '사랑의 슬픔', '사랑의 인사', 그리고 코렐리의 '라 폴리아' 같은 바이올린 소품들을 연주했다. 할아버지가 많이 노쇠하셔서, 듣고 계신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 30분 정도 지났을까, 할머니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셨다. 때는 코렐리의 '라 폴리아'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부분을 연주하고 있던 순간이었는데, 이 곡이 끝나자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곳이 워낙 조용한 동네이다 보니 혹시 이웃들이 항의하러 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신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나의 바이올린 연주는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저녁 시간에 이르러 다시 RER을 타고 파리 9구의 하싼 가족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모처럼 여유롭게 보낸 일요일이었다.

헤어지기 전 베르나르 아저씨의 부모님과
 헤어지기 전 베르나르 아저씨의 부모님과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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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정훈 기자

덧붙이는 글 | 혹시 여행 중 파리의 지저분한 거리, 매캐한 연기, 그리고 북적이는 인파에 지쳐버린 분들이 있다면, 이곳 생제르망앙레에 들러 하루정 도 쉬어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태그:#파리, #여행 , #생제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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