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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이 찬성 5, 반대 4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간 결혼을 합법화하자 미 백악관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백악관 그림에 동성애 지지를 상징하는 무지개색을 덧입혀 '트위터' 표지사진으로 만들었다.
▲ '동성결혼 허용 기념' 백악관 트위터 사진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이 찬성 5, 반대 4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간 결혼을 합법화하자 미 백악관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백악관 그림에 동성애 지지를 상징하는 무지개색을 덧입혀 '트위터' 표지사진으로 만들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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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퀴어 문화 축제를 하루 앞 둔 저녁,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분한 가운데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 동성결혼 합헌 판결과 이와 관련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감동적인 긴급성명을 들으면서 아들 생각이 나 전화를 하셨단다. 어머니는 미국이 저렇게 좋은 방향으로 변화 했으니 한국도 영향을 받지 않겠냐는 기대가 가득한 눈치다. 어머니와 필자는 마치 우리에게 일어난 일처럼 한참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기쁨을 공유했고 그 기쁨을 이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필자 사이에는 비밀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모자 사이에서도 말 못할 비밀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필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시작한 1996년에도 부모님께 차마 '커밍아웃'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경상북도 영주라는 좁디 좁고 보수적인 지역 사회에서 부모님께서 받아야 할 손가락질을 필자가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부모님께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드리는 불효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부모님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석천이형이 커밍아웃을 하게 됐고 나는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의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당시 KBS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 동성애를 주제로 패널 섭외 요청을 해왔고 공영방송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활동가들의 권유로 출연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아들이 여성이 아닌 남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방송 내내 우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다고 한다. 거의 모든 성소수자가 넘기 힘든, 그리고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가족이라는 큰 산을 그렇게 넘고 말았다.

이후 어머니는 하리수씨나 석천이형이 TV에 나오거나 성소수자 관련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이 방영되면 어김 없이 전화를 하시곤 한다. 특히 제주도를 배경으로 남성 동성애자의 사랑을 소재로 다룬 김수현 작가의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본방 사수 후에는 꼭 전화를 하셔서 왜 애인이 없냐고 필자에게 물으시곤 했다. 그리고 김조광수·김승환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에도 궁금한 것을 물어보곤 하셨는데 아마 나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그러시는 것 같은 눈치다.

미 연방 대법원의 가슴 벅찬 판시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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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미 연방 대법원의 동성 결혼 합헌 판결문과 오바마 대통령 긴급 성명이 어떻기에 다들 감동적이라고 하는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판결은 5대 4로 합헌 판결이 났고,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판결문을 쓰기로 유명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이번에는 절제된 언어로 판결문을 써내려갔다.

그는 동성결혼이 합헌이라는 판결문에서 "결혼보다 심오한 결합은 없다. 결혼은 사랑, 신의, 헌신, 희생 그리고 가족의 가장 높은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이 사건의 일부 상고인들이 보여줬듯이, 결혼은 때론 죽음 후에도 지속되는 사랑을 상징한다. 동성애자 남성들과 여성들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들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혼을 존중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혼의 성취감을 이루고 싶을 정도로 결혼을 깊이 존중하기 때문에 청원하는 것이다"라고 판시하며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일부 개신교도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전 세계 성소수자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으며 눈시울을 붉히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소망은 문명의 가장 오래된 제도 중 하나로부터 배제되어 고독함 속에 남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법 앞에서 동등한 존엄을 요청하였다. 법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한다."

마치 기형도 시 빈집을 연상케 하는 명문장이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과거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장관 취임 1년 전인 변호사 시절 동성애자인권연대 소식지에 실은 기고글 '세상을 여는 슬픔'도 떠오른다.

"게이바에 간 것이 두 달 남짓 되었다. 나는 아직 모른다. 게이들 속에서 그들의 무엇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세상의 평화가 열리는 듯한 느낌을 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상처가 치유되는 듯한 위안을 준 것인지를,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나는 게이들 속에서 내가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울었던 그 슬픔을, 사랑의 상실감을 공감하였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여성과 남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동성애자들에게 완강하게 빗장을 걸어 잠갔을 때 그들은 출입을 봉쇄당한 빈집에 갇힌 사랑의 상실감에 깊은 절망과 슬픔을 느꼈으리라고 나는 짐작할 뿐이다. 그 슬픔 앞에서 나는 이성애자인 나는 사치스러울 뿐이라는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은 순간이 있었을 뿐이다."

두 글을 비교해 보면 성소수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그리고 그로 인한 상실감에 대해 공감하고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대법원 판결 직후 소송당사자인 짐 오버게펠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고, 그것은 생중계로 전 세계에 방영됐다. "저는 당신과 (작고한) 배우자를 더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리더십이 미국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백악관 앞에서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미국은 이번 결정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좀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국내 동성커플 최초로 공개 결혼식을 올린 김조광수 영화감독(왼쪽)과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가 지난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서대문구를 상대로 낸 '가족관계등록공무원의 처분에 대한 불복신청 사건' 첫 심문기일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김조광수 감독은 "동성애자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을 하지 말아달라"며 "내가 죽기 전에 우리 관계가 정확하게 법적으로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모두가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 김조광수·김승환 커플 "동성애자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말라" 국내 동성커플 최초로 공개 결혼식을 올린 김조광수 영화감독(왼쪽)과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가 지난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서대문구를 상대로 낸 '가족관계등록공무원의 처분에 대한 불복신청 사건' 첫 심문기일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히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날 김조광수 감독은 "동성애자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을 하지 말아달라"며 "내가 죽기 전에 우리 관계가 정확하게 법적으로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모두가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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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 인권 현실과 동성 결혼이라는 현실은 그닥 녹록지 않은 험난한 가시밭 길이다. 지난 6일, 어제 대한민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재판이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렸다. 2013년 9월 청계천에서 공개 결혼식을 올린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는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인 12월 10일 서대문구청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구청은 헌법 제36조를 근거로 혼인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된다는 이유를 들어 불수리했다. 이들 부부는 서대문구청을 상대로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6일 서부지법에서 첫 심리가 진행됐다. 미 연방 대법원의 동성 결혼 합헌 결정으로 한국 법조계와 세간의 관심도 뜨거웠지만, 아쉽게도 비송사건 절차법에 따라 심문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 소송 관련해 50여 명의 변호사가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김현웅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에서도 거론될 만큼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담론을 넘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는 서부지법에서 첫 심리를 끝내고 기자회견을 통해 법정에서 법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발 부탁한다고, 제발, 내가 죽기 전에 우리 관계를 인정해달라고, 다른 나라처럼 38년은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더 이상 우리 관계를 법정에서 배제시켜주지 말아 달라고."

김조광수 감독은 이미 절규에 가까운 울부짖음으로 호소를 하고 있고, 이를 지켜보던 김승환 대표 또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장서연 변호사는 최후 진술을 통해 이렇게 호소했다.

"(중략)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평범한 소망을 오랫동안 가져왔습니다. 이성애자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소망을 동성애자들은 오랫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시대가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은 비단 두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략)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서 많은 동성 커플이 존재하며, 법적으로 그 관계를 인정받지 못해서 여러 가지 차별과 불이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통과 소외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입니다. (중략) 동성애자들이 혼인법제도에서 완전히 배제 당함으로써 겪고 있는 고통과 박탈감을 고려하면, 신청인들이 제기한 이 사건 신청은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어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판결을 촉구했다.

평등으로 가는 긴 여정

이제 몇 개월 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가 말했듯 이것은 분명히 평등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믿는다. 평등으로 가는 그 긴 여정에 당사자들이 크게 상처 받지 않고 잘 버텨주길 바라며 그 길에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축복과 함께 연대의 힘을 보태주길 간절히 소망해 볼 뿐이다.

더불어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와 가족이 그들을 부끄러워하거나, 비난하거나 가족 구성원에서 배제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장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가족에게서 오히려 모멸과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족으로부터 받는 배제와 차별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이런 점에서 성소수자 아들을 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깊은 사랑을 보여준 어머니는 필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어머니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전한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지난달 28일 서울광장을 출발해 을지로 일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지난달 28일 서울광장을 출발해 을지로 일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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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입니다.



태그:#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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