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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을 다녀온 후 그림으로 그려본 이향정.
 양동마을을 다녀온 후 그림으로 그려본 이향정.
ⓒ 정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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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을 '반촌'이라 한다. 양동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즉, 경주 양동의 양은 양반의 양이 아니라 양갓집의 양이다. 양동마을은 조선 시대에 뛰어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경주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반촌으로 꼽힌다. 양동마을이 반촌이라는 말은 현지에 가보지 않고도 그곳에 전통 기와집이 많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실 양동마을에는 조선 시대의 와가 고택이 88채나 있고, 초가집도 48채가 보존돼 있다. 그래서 양동마을은 우리나라 최대의 전통 가옥 밀집 지역으로 평가받는다.

양동마을은 온통 문화재로 이뤄져 있다. 경주 남산을 두고 흔히 '남산에 문화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라 하듯, 양동마을 역시 '양동마을에 문화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동마을 자체가 문화재'라 할 만하다. 무수한 문화재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마을 자체가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189호로 지정을 받았고, 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을에 보물이 세 점씩이나?

중종 때 청백리로 이름높았던 손중돈의 고택인 관가정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이향정 방면과 양동초등학교 방면의 경치를 바라보는 데 적격이다. 또 향단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에도 안성마춤이다. 집 우측 뒤에 사당이 있다.
 중종 때 청백리로 이름높았던 손중돈의 고택인 관가정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이향정 방면과 양동초등학교 방면의 경치를 바라보는 데 적격이다. 또 향단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에도 안성마춤이다. 집 우측 뒤에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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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의 고택들 중 세 점이 보물, 열두 점이 중요민속자료, 열두 점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세 점은 이 마을 입향조인 손소(1433-1484)의 차남으로 정2품 의정부 우참찬까지 지낸 손중돈의 고택 관가정(442호), 이황과 이이가 출현하기 이전 서경덕과 더불어 성리학의 체계를 정립한 대학자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향단(412호) 그리고 이언적의 본가였던 무첨당(411호)이다. 중요민속자료 12점은 손소가 1458년에 지은 서백당(23호) 등이다.

중요 고택의 주인으로 이씨와 손씨가 번갈아 등장하는 것으로 가늠되듯이, 양동마을은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 두 성씨의 집성촌이다. 본래는 여강 이씨만 살았는데 뒷날 손소가 이 마을로 장가를 오면서 차차 양씨가 대를 이어 살아가는 마을로 정착되었다. 두 성씨는 형산강이 조성해낸 동해안 최대의 평야인 안강들판의 대부분을 소유한 채 600년 가까이 살아 왔다.
이언적의 고택 향단이 높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채 위엄을 뽐내고 있다.
 이언적의 고택 향단이 높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채 위엄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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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은 차량을 몰고 들어갈 수 없다. 안동 하회마을과 마찬가지로 동네 어귀에서 차를 멈춰야 한다. 세계문화유산을 구경하러 가는 길이니 그 정도는 불만 사항으로 여길 수는 없겠다. 자동차가 마을 안을 분주하게 오간다면 문화재 관람이든 웰빙 여행이든 사실상 엉망이 될 터이므로 차량 진입 금지 조치는 당연한 일이다.

주차 후 양동마을문화관을 거쳐 동네 어귀에 도착한 나그네는 문득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저 높은 언덕 위에 거창하게 자리잡은 한옥들이 위세를 부리며 굽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위압감을 주는 데에 가장 주동 역할을 하는 건물은 보물 412호인 향단이다. 실제로 향단은 복잡한 건물 구조와 고급스러운 내부를 자랑하면서 상류층의 자부심을 뽐낸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아 볼 수가 없다.  

향단은 이언적의 생가는 아니다. 이언적은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이언적이 월성 손씨 대종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난 것은 그의 아버지 이번이 손소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언적은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자연스레 이언적은 외삼촌의 보살핌을 많이 받게 되는데, 특히 손소의 차남 손중돈이 이언적을 많이 보살핀다. 손중돈보다 27세 아래인 이언적은 외삼촌이 양산, 김해, 상주 등지로 옮겨가며 관직에 복무할 때 줄곧 따라다니면서 생활한다. 그러던 중 24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다.    

서백당. 손씨 종택으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난 집이다. 집 오른쪽에 굉장한 거목 향나무가 있어 운치가 더욱 빛난다.
 서백당. 손씨 종택으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난 집이다. 집 오른쪽에 굉장한 거목 향나무가 있어 운치가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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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손씨 종가인 서백당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8호인 향나무가 사당 앞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손소가 직접 심었다는 이 향나무는 수령 500년을 자랑한다. 그런가 하면 여강 이씨 종가인 무첨당은 별당 건물이라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첨당 자체가 대청이 6칸이나 되고 좌우로 방이 각각 붙어 있는 대형 건물인 까닭에 무심코 보면 사랑채처럼 여겨진다.    

양동마을은 가운데가 낮은 분지 형태이고 좌우로 언덕을 따라가며 집들이 들어섰다. 신분이 높은 사람의 큰 가옥일수록 높은 위치에 지어졌는데, 일반 백성이 높은 양반의 고대광실 주위를 얼씬거려서는 안 될 일인 까닭이다.

물론 고지대에 자리잡은 종택 등 대규모 고택들은 경상도 와가답게 '통말집'이라 부르는 ㅁ자의 폐쇄적 구조이고, 그 아래에서 평지까지 이어지는 와가들은 '반말집'이라 부르는 튼 ㅁ자 형이다. 그에 비해 '가람집'이라 불린 일반 백성들의 집들은 길에서 방문이 보이는 일직선의 초가였다.

양동마을을 즐기는 방법

양동마을에는 민박을 할 수 있는 집이 여러 채 있다. 사진은 그 중 한 곳으로 서백당 맞은편 언덕 위에 있는 라송헌의 모습이다. 민박에 관해서는 양동마을 체험문의 전화번호 054)762-2633을 이용하면 된다.
 양동마을에는 민박을 할 수 있는 집이 여러 채 있다. 사진은 그 중 한 곳으로 서백당 맞은편 언덕 위에 있는 라송헌의 모습이다. 민박에 관해서는 양동마을 체험문의 전화번호 054)762-2633을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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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 나그네들에게 주는 소형 홍보물 <양동마을>에는 마을 답사길이 1길~7길로 나뉘어 소개대 있다. 1길은 안락정, 이향정, 강학당, 심수정을 둘러보는 길이다. '양동마을 입구에서 떠나는 조선 시대 문화 기행'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20분이면 가능하다는 것으로 보아 양동마을을 잠깐 둘러보고 떠날 나그네를 배려한 안내로 여겨진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길은 서백당, 무첨당, 향단, 관가정을 둘러보는 7길이다. '양동마을 대표 가옥'들을 골라서 답사하는 2시간짜리 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양동마을을 찾아온 김에 모두 둘러보겠다는 분들을 위한 전체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을 안 어느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가정할 때 총 다섯 시간가량 걸리는 이 여정의 첫 방문지는 주차장과 매표소 사이의 (1)양동마을문화관이다. 그 후 (2)양동초등학교를 담장 너머로 구경한 다음, 담장이 끝나는 지점의 삼거리에 서서 원경으로 (3)향단 방면을 바라본다. 향단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멀찍이서 전경을 올려다보는 맛이 남다른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양동마을문화관 내부에는 마을 내 중요 문화재들에 대한 해설이 집의 모형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사진은 이향정의 모형이다. 답사자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동그라미 부분이고, 네모 부분은 집 일부의 뒷모습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마을문화관에서 모형을 잘 감상한 후 마을 안으로 들어가 각각의 문화재를 둘러보는 것이 현명하다.
 양동마을문화관 내부에는 마을 내 중요 문화재들에 대한 해설이 집의 모형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사진은 이향정의 모형이다. 답사자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동그라미 부분이고, 네모 부분은 집 일부의 뒷모습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마을문화관에서 모형을 잘 감상한 후 마을 안으로 들어가 각각의 문화재를 둘러보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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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문화관 내부에는 마을 내 중요 문화재들에 대한 해설이 집의 모형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위의 사진은 이향정 모형이다. 나그네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동그라미 부분이고, 네모 부분에서는 집 일부의 뒷모습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마을문화관에서 모형을 잘 감상한 후 마을 안으로 들어가 각각의 문화재를 둘러보는 것이 현명하다.

나그네들은 흔히 초등학교 담장 끝의 삼거리 가게를 등뒤에 두고 직진한다. 하지만 왼쪽으로 가야 좀 더 지혜로운 답사를 즐길 수 있다. 양동마을이 배출한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인 손중돈의 고택 (4)관가정부터 둘러보게 되는 이 여정을 선택하면,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미덕을 발휘하여 마을 전경을 먼저 조망하게 해주는 관가정의 배려를 만끽할 수 있다. 게다가 관가정 협문 밖에 서면 그냥 다녀서는 담밖에 못 보는 향단의 전체 윤곽도 볼 수 있다.

정충비각 뒤로 관가정이 보이는 풍경. 정충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손종로와 그의 충성스러운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려 세워졌다. 주인인 손종로의 것만이 아니라 노비의 비까지 함께 세워 비각이 둘인 점이 감동을 준다.
 정충비각 뒤로 관가정이 보이는 풍경. 정충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손종로와 그의 충성스러운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려 세워졌다. 주인인 손종로의 것만이 아니라 노비의 비까지 함께 세워 비각이 둘인 점이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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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에서 (5)정충비각으로 내려온다. 정충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손종로와 그의 충성스러운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려 1783년(정조 7)에 세워졌다. 주인인 손종로의 것만이 아니라 노비의 비까지 함께 세워 비각이 둘인 점이 특별히 감동을 준다.

관가정에서 내려온 후에는 향단 방향으로 좌회전하지 말고 그냥 직진한다. 왼쪽에 연꽃 단지를 두고 다수의 나그네들이 오가는 마을 큰길로 향해 걷는다. 양동마을체험관이라는 기와집이 도로변에 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식당도 있다.

네거리에서 식당을 왼편에 두고 산 쪽으로 올라간다. 네거리 모퉁이에 푸른 빛의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6)이향정으로 가는 길이다. 이향정은 휘영청 굽은 높은 담장이 관광객을 유혹하는 고택이다.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79호 고택으로 1695년(숙종 21)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이향정부터 큰길을 따라 성주봉 아래에 줄지어 지어져 있는 집들을 "하촌"이라 부른다.

양동마을에서 정자 중 가장 규모가 큰 심수정
 양동마을에서 정자 중 가장 규모가 큰 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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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정을 둘러본 후 다시 큰길로 내려와 중요민속자료 81호인 (7)심수정과 중요민속자료 83호인 (8)강학당을 찾는다. 양동마을체험관 앞을 지난 뒤 오른쪽 산 속으로 들어가면 이내 나타난다. 심수정은 1560년(명종 15) 무렵에 지어진 건물로, 양동마을의 정자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문이 잠겨 있지만 오른쪽 높은 비탈에 올라서면 내부도 어느 정도 감상할 수 있다.

심수정 오른쪽에 있는 강학당은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들어가는 길이 아늑하여 정취가 깊다. 대사간을 지낸 이연상이 후학들을 가르친 장소로, 현재 건물은 1867년(고종 4) 무렵에 지어졌다. 매표소에서 도로 건너 숲속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손씨 문중 서당 안락정(중요민속자료 82호)과 쌍벽을 이루었던 교육기관이다.

좀 더 마을 안으로 올라가면 역시 오른쪽 산비탈 아래에 중요민속자료 77호인 (9)두곡고택이 있고, 그 뒤 높은 숲속에 (10)동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동호정 오른쪽 아래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듯 보이는 (11)영정이 낡은 모습을 한 채 그늘에 숨어 있다. 주변은 숲이 울창하다. 그래서 이 일대를 "거림"이라 부른다.

서백당 향나무.
 서백당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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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정 서쪽 담장의 협문으로 나와 큰길로 내려온다. 큰길을 가로지른다. 드디어 (12)서백당을 찾아가는 길이다. 서백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양동마을 중에서도 가장 안쪽이기 때문에 "안골"이라 부른다. 과연 안골답게 서백당으로 가는 길은 깊다.

대문으로 올라가는 길조차 향기로운 서백당 뜰에 선 채 한참 서성인다. 고풍스러운 한옥 구경에도 취했지만 500년 넘은 향나무 고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에도 흠뻑 젖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나무 사진을 찍지 않는다. 나무 사진을 찍으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낯선 나그네든 일행이든 사람이 나타나 나무 아래에 서주어야 제대로 된 나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래야 사진을 보고 나무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백당을 지나면 (13)낙선당이 기다리고 있다. 낙선당은 호란 때 전사한 손종로의 갈라진 종택으로 1540년(중종 35)에 지어졌다. 특별히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낙선당은 무첨당 방향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낙선당을 지나면 대문채 앞뜰이 아름다운 (14)창은정사가 있다.

이언적 종가의 제청인 무첨당.
 이언적 종가의 제청인 무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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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되돌아서 내리막을 걷는다. 서백당을 왼쪽에 둔 채 줄곧 내려오면 안골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거림 방향이 아닌, 오른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민박을 하는 예쁜 집 (15)라송헌을 둘러본 뒤 오른쪽으로 작은 고개를 오른다. 이 고개 좌우에는 집이 없다. 양동마을 아닌 다른 마을을 찾아왔나 싶은 착각이 들 만큼 한적하다.

고개의 정점이 삼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정표는 왼쪽으로 가면 수졸당, 오른쪽으로 가면 무첨당이라고 말해준다. (16)경산서당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경산서당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바로 등뒤에 있기 때문이다. 경산서당을 둘러본다.

무첨당의 협문
 무첨당의 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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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무첨당 방향으로 걷는다. 지대가 높아 저 아래로 안강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양동마을의 손씨와 이씨가 무수한 하인과 소작농들을 거느리고 경작했던 들판이다. 지금까지 양동마을 안을 구경하면서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야 손씨와 이씨들이 이곳에 정착한 이유가 헤아려진다. 저 넓은 들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가정, 향단과 더불어 양동마을이 보유한 3대 보물 중 한 가지인 (17)무첨당은 이언적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지은 별채 건물이다. 무첨당 오른쪽에는 안채가 있고, 뒤로 저 높게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안내판은 무첨당이 제청 이외에 남성들이 독서를 하고 손님 접대도 하는 등 사랑채의 기능도 했다고 설명한다.

흔히 무첨당을 둘러본 다음 대문으로 되돌아나온다. 하지만 무첨당에서는 협문을 출구로 이용하는 것이 멋지다. 무첨당이 위치하는 곳을 '물봉골'이라 부르는데, 협문에 서면 물봉골 큰길이 저 아래 하촌까지 이어지는 정경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이런 협문을 통과해보는 체험은 도시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물봉골 큰길을 죽 내려오면 오른쪽에 향단이 보인다. 정면은 심수정이 숲속에 웅장하다. 양동마을의 중요 문화재들을 거의 다 둘러보았다는 만족감이 솟아난다. 다만 상춘헌고택, 수졸당, 안락정 정도가 빠졌을 뿐이다.

마을 안 좁은 들판에 닿으면 곧장 마을 큰길로 가지 말고 오른쪽 좁은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향단으로 가는 길이다. 향단의 유명세 때문에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인파를 이루고 다가온다. 하지만 멈추지 말고 가야 한다. 향단 담장을 끼고 걷는 이 길을 답사해야 하는 이유는 올라보면 실감할 수 있다.

향단의 높은 담장을 등 뒤에 두고 돌아서서 하촌과 거림 방향을 바라볼 일이다. 처음 관가정에서 맛본 것과는 또 다른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와가와 초가들이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택이 많이 남아 있는 마을이 이곳 양동마을이라는데 이 풍경을 못 보고 돌아선다면 너무나 아쉬운 일일 것이다. 강학당 뒤로 성주봉이 솟아 있다. 언제 다시 양동마을을 방문하는 날에는 저 성주봉에도 꼭 올라보리라!

좌절 속에서도 자신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다

옥산서원 강당
 옥산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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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을 둘러본 후 꼭 가볼 곳이 남아 있다. 양동마을에 당도하여 주차 후 마을문화관을 향해 걸어갈 때 처음 만나는 안내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안내판은 마을 전체의 약도를 보여주면서 양동마을 아닌 곳도 한 곳 소개했다. 바로 옥산서원이다. 그만큼 옥산서원 일대는 이언적과 연관이 깊은 곳이다.

양동마을에서 대략 8km가량 서쪽으로 국도를 달리면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오른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그가 죽은 후 20년 지난 1572년에 지어졌다. 옥산서원은 본래 현판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바람에 새로 추사 김정희가 써서 남긴 현판 글씨가 남아 있고, 일반인이 볼 수는 없지만 보물 525호인 <삼국사기>가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옥산서원 뒤편 계곡에 있는 독락당도 꼭 둘러볼 곳이다. 독락당은 보물 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동마을의 향단이 보물 412호인 것을 생각해보면 독락당이 그 바로 뒷번호를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벼슬 없이 7년 동안 고향에 머물 때 이 집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옥산서원이 독락당 바로 옆에 건립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혜사터 13층 신라 석탑. 조선 시대에 이곳에는 정혜사라는 거대한 신라 고찰이 있었고, 정혜사 승려들은 옥산서원의 하인 노릇을 했다.
 정혜사터 13층 신라 석탑. 조선 시대에 이곳에는 정혜사라는 거대한 신라 고찰이 있었고, 정혜사 승려들은 옥산서원의 하인 노릇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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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뒤쪽에는 이언적 유적이 또 하나 있다. 그런데 유학 관련이 아니라 탑이다. 옥산서원의 뒷바라지를 전담했던 정혜사라는 신라 사찰의 뜰에 세워진 고탑이다. 언뜻 보면 고려 시대 탑처럼 여겨지는 이곳 정혜사터의 13층 석탑은 당당한 국보 40호이다.

지금은 절터밖에 없지만 이언적 생존 당시에는 이곳에 사찰 건물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이언적은 독락당에서 살 때 종종 이 사찰을 방문하여 승려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한다. 그는 좌절의 시간 중에도 쉼없이 자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이언적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교훈이다.


태그:#양동마을, #이언적, #손중돈, #옥산서원,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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