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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이버네티쿠스>는 사이버 시대 인간의 이모저모를 추적하고, 이를 미디어이론과 인문학적 시각에서 풀어나가는 연재물입니다. PC통신 시대부터, 디시, 일베, 여초커뮤니티 등... 누리꾼들의 사상을 폭넓게 분석하고, 대안적 인터넷 문화를 모색합니다 ― 기자 말

대나무숲의 역사적 기원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신라 제48대 경문왕 때, 왕위에 오른 경문왕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처럼 커졌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 뿐이었다. 왕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고 기술자 또한 그랬다. 하지만 세상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길 없던 두건 만드는 노인은 도림사 대나무 숲 가운데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소리가 들렸으니, 왕이 이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어버렸다. 그래도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고 들려왔다는 이야기다(위키백과). 이는 비밀 장소에서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부조리를 속시원히 폭로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이어졌다.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나무숲의 역사적 기원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신라 제48대 경문왕 때, 왕위에 오른 경문왕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처럼 커졌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 뿐이었다. 왕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고 기술자 또한 그랬다. 하지만 세상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길 없던 두건 만드는 노인은 도림사 대나무 숲 가운데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소리가 들렸으니, 왕이 이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어버렸다. 그래도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고 들려왔다는 이야기다(위키백과). 이는 비밀 장소에서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부조리를 속시원히 폭로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이어졌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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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역사는 서기 2012년 트위터 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을(乙)이라는 한 트위터리안이 있었는데, 그가 다니는 출판사 사장 갑(甲)은 악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소연 할 곳 하나 없던 을이, 어느날 설움에 울컥해 자기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땅에 떨궜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자리에 신령스런 대나무 한 그루가 분연히 솟으니, 을이 이 대나무를 분신처럼 아껴 '출판사 X'라는 계정명을 붙여주었더라.

이후 을은 대나무 옆에 몰래 걸터앉아 한풀이를 하곤 했다. 갑이 월급 적게 주려 꼼수 부린 이야기, 부동산 차명 은닉, 보수단체 집회에 직원 동원한 것 등... 그런데 이를 우연히 듣던 종달새들이 그냥 묻어둘 이야기가 아니라며, 나무들 사이를 바삐 오가며 '리트윗'하니,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주변 나무와 그 주인들이 모두 알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갑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만 것이다.

얼마 뒤 을은 갑이 전직원을 소집했다며, 눈물을 머금고 그 꼿꼿하던 '출판사 X'를 꺾어버렸다(계정폭파). 이 참극을 지켜본 트위터리안들이 어찌나 슬피 울던지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 눈물 떨어진 자리에 우후죽순처럼 또다른 대나무들이 솟아오르니(!), 20일 사이 크고 작은 대나무숲이 100군데 가량 우거질 정도였다.

그 품종도 다양해, '○○○ 옆 대나무숲'하는 식으로 출판사·언론사·학계 심지어 고부갈등까지 포괄하니 이때를 가히 '구 대나무숲' 시대라 부를 만하겠다. 이전엔 을 혼자서 부담을 다 짊어졌다면, 이젠 자기 분야의 숲 앞에서 모두에게 공개한 '비밀번호'란 것만 외치고 들어오면 다수가 신출귀몰하게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지르고 내뺄 수 있는 터였다. 갑들이 그 외친 자들을 색출하기 어려워 혼비백산에 빠졌고, 이에 글 꽤나 읽었다는 교수들도 논문을 탁! 치면서 '그래, 바로 저것이다'라 찬탄했더라.

그러나 이 게릴라전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어디서 유입된지 모를 무도한 무리들이 숲의 비밀번호를 알아내 대나무를 갉아먹고 불을 지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운영방해 및 계정폭파). 또한, 익명성을 악용해 반사회적 표현이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는 왜곡된 내용을 외치는 경우도 더러 있어 숲의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고 말았다.

"모든 전설의 시작은, 을의 '눈물 한 방울'이었다"

"대자보 떼는 학교... 안녕 못한 학생들". 지난 2014년 1월 7일 오후 '100만원 대자보'로 논란이 된 중앙대학교(이사장 박용성) 관계자가 교내에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허가받지 않은 게시물"이라며 떼고 있다.
 "대자보 떼는 학교... 안녕 못한 학생들". 지난 2014년 1월 7일 오후 '100만원 대자보'로 논란이 된 중앙대학교(이사장 박용성) 관계자가 교내에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를 "허가받지 않은 게시물"이라며 떼고 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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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기 2013년 말 이 땅에 '대학생' 부족들이 산발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 비범한 몇몇이 있었더라. 그중 한 명을 고려대 '주현우'라 불렀는데, 이름을 풀이하면 '가장 먼저 씨(대자보) 뿌리는 자(붙이는 자)'라 했다. 그 뒤 따른 수많은 자들이 당당히 자신의 서명을 한 대나무 씨를 뿌리며, 사회를 향해 마치 방언 터뜨리듯 '안녕들하십니까'라고 연신 안부를 물어대니 그 속에 쌓인 바가 많았음을 짐작할 만했더라.

대학 구조조정, 청년 노동 문제, 청소노동자 파업, 심지어 씨앗 뿌리기를 반대한다는 씨앗까지... 그 다양한 품종에도, 그 통하는 DNA는 하나였는데 즉 "사회만 우리에게 C 뿌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도 사회에 씨 뿌릴 수 있다"는 거였다. 이에 대뜸 놀란 관원들과 그 추종자들(이들을 일베에서는 '행게이'라고 한다더라)이 '학칙'이니 '불법선동'이니 운운하며, 씨 뿌린 땅을 일거에 엎어버렸고 이 뭔 참극인지 씨앗 태반이 못 쓰게 됐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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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야만의 시기를 격으면서도, 살아남은 씨앗들은 있었다. 그간 페이스북 '안녕들하십니까' 고을에 '좋아요'라 반응했던 이들이 20만 명 이상에 이른 터였으니, 그중 일부라도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바로 그 단초 즉 사회를 향해 '외치고 싶은 열망'으로부터 서기 2014년 즈음하여, '역사적인 대방향 전환'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오늘날 '신 대나무숲' 시대의 도래라 한다.

"역사적인 대방향 전환"... 익명과 실명의 기묘한 공존

2014년부터 페이스북에 '대나무숲'이 늘어나, 이제 어지간한 대학은 대나무숲 하나 이상은 있을 정도다. 대나무숲은 주로 대학생들의 익명제보를 받아 서로 삶의 희노애락을 공유하는데, 대학생 뿐 아니라 직장인들이나 중고등학생들도 일부 참여하고 있으며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 우후죽순 처럼 생겨난 페이스북 '대나무숲' 2014년부터 페이스북에 '대나무숲'이 늘어나, 이제 어지간한 대학은 대나무숲 하나 이상은 있을 정도다. 대나무숲은 주로 대학생들의 익명제보를 받아 서로 삶의 희노애락을 공유하는데, 대학생 뿐 아니라 직장인들이나 중고등학생들도 일부 참여하고 있으며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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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야기는, 오늘날 페이스북 대나무숲 시대의 전사(前史)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 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나무숲은 기존 맥락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길래, '역사적인 대방향 전환'이라 한 것일까? 답은 바로 익명성과 실명성의 '조화'에 있다.

우선 각 대학 페이스북 대숲 페이지에 제보글을 올리려면, 구글 문서시스템이나 자체 개발된 익명제보함을 거친다. 이때 대숲 관리자에게도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된다. 관리자는 자신이 양심에 따라 세운 기준을 통해, 대숲에 옮길 만한 글인지 아닌지(주로 욕설, 인신공격 등이 걸러진다) 판가름 한다. 이후 대숲으로 옮겨진 글을 보고 실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든 댓글을 달든 반응을 한다. 주제에 따라, '진지'해지기도 하고 '드립' 치듯 골계미를 보여주기도 해 많은 이들의 공감과 웃음을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제보글 주제는 대학생들의 흔한 관심사인 연애, 학점, 취업 고민은 물론이고, 세월호나 대학 구조조정 등 다양한 학내외 이슈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관리기준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엄격해 주제가 '뻔한' 대숲은 인기가 떨어진다. 가령 정치적 이슈, 전 이사장의 성차별 발언 등 학내 이슈와 관련된 제보를 아예 '덮어놓고 가겠다'는 식으로 운영하는 대숲들이 그런 경우다.

그래서 요즘은 '어둠의' 대나무숲들이 늘어가는 추세다. '어둠의'라는 수식어에서도 드러나듯, 그간 표현하는 걸 암묵적인 불문율에 부쳤던 신념들을 한 번 풀어보라는 암시가 깔려있다. 모대학 공대 학생회장이 폭행을 저질렀다는 논란에 함께 분노하기도 하고,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조심스런 커밍아웃에 '문제없다'는 식의 격려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모든 시도가 언제나 환영 받는 건 아니다. 특히 기존 사회규범 의식이나 의사소통 방식 등을 의도적으로 '흔들어 보려는' 경우들이 있다. 고려대 K씨는 "한때 고대숲에 성적인 주제와 관련된 제보들이 자주 올라"와 "당시 … 많은 사람들이 (내심)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준은 없"지만 "여러 시도를 해보는 것은 찬성"이라며 "(관리인들의) 제보기준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대다수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앙대 홍성빈씨도 대숲을 "남에게 말 못하고 속앓이 하던 말을 시원하게 터놓는 공간"이라고 했다. "직접은 못할 말들을 흘러가는 바람에 실어 보내듯 하는 제보들이 공감도 되고 격려의 한 마디라도 더 쓰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한편, 부산대 J씨는 댓글러들의 실명 활동이 존경스러운 면이 있다고 봤다. 특히 얼마 전 학내에 물의를 일으킨 교수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 (당당하게) 대숲에서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이 멋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부산대 교수, '노무현은 가짜 대통령' 과제 요구)

'익명성 대 실명성'인가, '소극성 대 적극성'인가?

영화 연인(2004) 스틸컷.
 영화 연인(2004) 스틸컷.
ⓒ 쇼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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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은 하나같이 대숲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됐다.

① 담아둔 말을 속시원히 꺼낼 수 있다.
②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와 달리, 집착없이 흘려보낼 수 있다.
③ 서로 공감가는 대나무가 많은 편이다.
④ 빠른 피드백이 가능하다.

SNS의 유동성과 빠른 전파성, 대학 또래 공동체의 유대감과 유머러스함을 대숲의 '익명성'을 바탕으로 살릴 때 가능한 장점들인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완전한 익명성'을 찬성하진 않았다. '중앙대 어둠의 대나무숲' 관리인은 "(제보된 대나무) 100개 중 1~2개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숲으로 옮긴다면서도 "(자신도) 사람이라 동의하기 어려운 제보도 많"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고려대 K씨도 "만약 익명성이 더욱 도전적"일 수 있으니 "고대숲 댓글창에도 적용해보는 건 어떠냐" 한다면 "반대"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현재로서도 "충분히 건설적, 도전적 토론"이 가능하고, "혹시나 있을 무책임한 댓글러들의 무례함을 걸러주는 게 실명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결국 '신 대나무숲'은 책임질 줄 아는 실명 댓글러들과 도전적인 익명 제보자 사이의 수위를 조정하되 최대한 자유롭게 하려는 관리자의 양심을 믿고 운영되는 구조인 셈이다. 그렇다고, 관리자에 대한 견제가 없진 않다. 이용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페이지 구독을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절묘하게 셋의 균형이 맞춰지는 구조인 셈이다.

동덕여대 홍원식 교수에 따르면, 이제까지 인터넷이 공론장이기 위한 조건을 연구한 사람들은 주로 '익명성 대 실명성' 구도에서 강조점 상의 차이를 보였다. '익명성'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누리꾼들의 잠재적 두려움을 줄이고 거리낌없는 표현을 유도해 공론 활동 참여를 증진시키는 효과를 주목한다. 반면 '실명성'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은 누리꾼들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감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함으로써 더 합의지향적이고, 우호적인 공동체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홍원식, <인터넷 공론장 돌아보기>)

그런데 정작 대숲을 이용하는, K씨는 '익명성 대 실명성'이라는 구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에 대해) 소극적 성향의 사람들은 본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꺼려 (익명으로) 제보를 하는 것"이지만, "적극적 성향의 사람들은 실명에도 주관을 뚜렷이 드러"내므로 꼭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실 이 점이 필자가 본 연재를 시작하게 된 직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문제에 따라서 소극적일 수도 있고, 적극적일 수도 있다. 단지 어떤 사람이 적극적 성향이 클수록 굳이 익명성과 실명성의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을 수 있고, 반대로 소극적 성향이 클수록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터넷 공론장의 조건은 익명이냐 실명이냐의 문제보다 '호모 사이버네티쿠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물음부터 시작해야 맞을 것이다. 호모 사이버네티쿠스의 기원부터 함께 그 맥락을 추적해보자!

[매주 월요일 또는 화요일에 <호모 사이버네티쿠스> 업데이트합니다]


태그:#대나무숲, #페이스북, #트위터, #SNS, #안녕들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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