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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왼쪽)과 진 클라우드 정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오른쪽)이 지난 2015년 6월 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왼쪽)과 진 클라우드 정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오른쪽)이 지난 2015년 6월 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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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스탈린그라드 광장에 1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모두 단결하여 긴축에 저항하자"고 외치며 공화국 광장까지 함께 행진했다.

공산당, 좌파당, 녹색당, 반자본주의신당 등의 좌파정당들과 노동조합들, ATTAC 등의 반세계화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섰다. 이른바, 유럽의 좌파그룹들이 함께 주관하는 "그리스 지지 주간(6월 20일 ~ 27일)의 시작이었다.

"그리스가 은행이었다면 진작 구제되었을 것"

그리스가 은행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구제되었을 것.
 그리스가 은행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구제되었을 것.
ⓒ Riwan Trom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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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이탈리아와 독일, 런던에서도 같은 취지의 집회가 열렸다. 22일 오후에 열리는 유럽연합 특별정상회담을 앞두고, 유럽의 좌파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 IMF. 유럽중앙은행)의 압력에 저항하는 그리스를 지지하기 위해 힘을 결집했다. 이날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유럽이여 단결하라. 우린 모두 긴축의 피해자다!"
"프랑스는 그리스를 지지하라!"

트로이카(유럽연합, IMF, 유럽중앙은행)는 그리스에게 돈을 빌려준 대가로 살인적인 수준의 긴축을 요구했고, 그 긴축의 해법은 지난 5년간 그리스를 회생시키기는커녕 뜨거운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 5년 동안 그리스의 GDP는 25% 감축했고, 기업과 자영업자들의 도산이 속출했다.

정리 해고된 사람들은 창밖으로 몸을 던졌으며, 청년실업률은 60%로 폭등했다. 신생좌파정당 시리자가 순식간에 집권세력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긴축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깨달았고, 시리자는 긴축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그리스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긴축으로 숨통이 조여드는 것은 그리스만의 현실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유럽좌파 연대의 끈끈한 원동력이 자리한다. 금융자본주의 독트린의 실험무대였던 유럽연합은 그들의 원칙을 회원국 모두에 적용하였고, 그 결과 지난 20년간 유럽 국가들은 하나같이 가속화되어 가는 불평등의 고통스런 시간을 경험했다.

이는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각국 민족주의 극우정당들의 상승세를 부추기고 있다. 유럽연합은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 조정, 임금 동결, 연금축소와 금융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세금감면 등을 회원국들에 강요했다. 그 결과 프랑스 빈곤층은 이제 900만 명을 넘어섰다.

휴머니티, 너의 이름을 쓴다. 폴 엘뤼에르의 유명한 시 <자유> 를 패러디
 휴머니티, 너의 이름을 쓴다. 폴 엘뤼에르의 유명한 시 <자유> 를 패러디
ⓒ Riwan Trom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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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1조 원 이상을 소유한 슈퍼리치의 수는 점증하여 55명에 이른다. 전세계 슈퍼리치들의 숫자 또한 지난 25년 동안 10배나 증가했다. 올랑드는 사르코지 때 이미 8만 명이나 줄였던 교원 수를 복원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여전히 교사들은 매년 수만 명씩 감축되고 있으며, 거리에 나서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 병원은 하나 둘 문을 닫고, 빈곤층에 대한 지원은 점점 줄어든다. 늘어나는 건 오로지 세금뿐이다.

유럽의 좌파들은 지금의 유럽연합을 금융자본가들을 위한 과두정치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 집단에게 신자유주의는 그 어떤 가시적인 폐해에도 불구하고 건드릴 수 없는 신의 언명과도 같다. 그리스 경제를 처참하게 파괴해 놓고도 그들은 여전히 같은 원칙을 고수한다.

"긴축하라."

스페인의 극좌정당 포데모스 파리지부
 스페인의 극좌정당 포데모스 파리지부
ⓒ Riwan Trom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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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트로이카가 그리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리스는 추가 원조를 받을 수 없다. 그리스는 오는 30일로 정해진 IMF 부채상환 날짜를 지켜낼 재간이 없고, 그것은 곧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이어진다.

22일의 유럽의회특별정상회담은 모든 위험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독일의 메르켈을 필두로 하는 유럽연합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긴축을 고수하면서 그리스를 유로존 밖으로 내쫓을 수도, 결국 그리스가 주장하는 긴축반대의 노선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현명한 중재안이 등장하여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에 이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스를 축출하지 않고, 긴축을 배제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면, 유럽연합의 '긴축'이라는 대원칙에 금이 간다.

그렇다고 그리스를 유럽 밖으로 내쫓자니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유로존 탈퇴의 도미노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심각한 우려가 따른다. 유럽연합의 정상들이 처한 진퇴양란의 기로에 비해 오히려 그리스의 입장은 단순명료하다.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악랄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이 요구가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었다는 데 대해 이견이 없다.

더 이상의 긴축은 굶어 죽어가는 그리스에게 곡기를 끊으라고 권유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먼저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 다시 긴축을 시작하느니, 차라리 어디로 치달을지 알 수 없는 디폴트라는 혼란을 택하겠다는 것이 현 정권의 지지기반인 청년층의 압도적 여론이다.

프랑스 좌파당의 대표 장뤽 멜랑숑은 이날 집회에서 "독일정부의 터무니없는 경직성이 상황을 지금과 같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왔다"며, "프랑스는 독일 정부를 향해 지금까지 취해온 비굴한 태도를 버리라"고 꾸짖었다. 또한 "프랑스가 그리스 편에 서줄 것"을 올랑드 대통령에게 주문했다. 이날 시위의 목적이 22일에 유럽연합정상회담에서 그리스에 우호적인 결정이 내려지도록 직접적으로 정부를 압박하는 것임을 멜랑숑의 메시지는 분명히 했다.

유럽연합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당수이자 야당 지도자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지난 1월 25일 그리스 총선 승리 후 지지자들 앞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 그리스 총선, 급진좌파연합 시리자 압승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당수이자 야당 지도자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지난 1월 25일 그리스 총선 승리 후 지지자들 앞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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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지금 포커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주권, 존엄, 그리고 그들의 유럽에서의 위치를 걸고 싸우는 중이다." - 프랑스 시사주간지 <마리안느>, 6월 22일

유럽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자금은, 유럽의 민간은행이 도산할 위기에 빠질 때 그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쓰일 것이다. 우리가 외환위기 시기에 익히 보았던 그 방식대로 투입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유럽의 한 나라가 도산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은 이 자금의 투입을 거부한다. 그리스를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한 '긴축'이 전제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러한 현실은 유럽연합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유럽의 통합은, 표면적으로는 유럽 국가들끼리의 평화와 연대와 협력을 목표로 출범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금융자본가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 독트린의 잔인한 실험장이었다. 유럽헌법이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국민투표에 의해 부결되었던 이유도, 유럽을 신자유주의의 종신 노예로 삼으려 했던 의도가 유럽헌법 내용에서 발각됐기 때문이다.

NPA(반자본주의신당) 그리스 민중과 연대를. 부채를 취소하라.
 NPA(반자본주의신당) 그리스 민중과 연대를. 부채를 취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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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은 감히 긴축이라는 독트린과 금융 권력에 저항하는 그리스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지금까지 다양한 협박의 방법을 구사해 왔다. 거기에 맞서는 그리스 국민들의 저항은 초유의 것이다.

집권정당과 의회, 그리고 국민들이 똘똘 뭉쳐서, "파산을 할지언정, 우린 긴축을 거부한다"라고 외치는 나라는 일찍이 유럽출범 이후 존재한 적이 없다. 그리스의 저항에 유럽의 좌파들이 함께 어깨를 걸고 지지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스 도전이 거둘 승리는 결국 절망적인 시대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으로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한 독일,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로 소비가 급증하여 경제가 활성화 되고 있다는 뉴스, 부자들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면 그 넘쳐흐르는 물이 저 아래까지 넉넉히 떨어질 거라던 '낙수 효과'는 사실이 아니었다는 소식, IMF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도입한 구조조정과 긴축이라는 해법이 IMF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계산에서 비롯된 실수였다는 고백 등등이 쏟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위험한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가장 빠른 속도로 인류를 파괴하는 최악의 시스템이라는 사실이 명백한 데도 말이다. 대신 가장 먼저 지옥의 뜨거운 맛을 보았던 이들이, 가장 먼저 깨달았다.

올랑드에 직접 요청한 좌파들 "그리스 편이 되어 달라"

시리자, 포데모스... 또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
 시리자, 포데모스... 또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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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시위대는 외쳤다.

"부당한 부채는 당장 쓰레기통에!"
"긴축은 유럽의 유일한 길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이지 주식이 아니다."
"그리스를 질식시키지 마라."
"또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 시리자, 포데모스가 그것이다."

'로보캅'처럼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시위대 숫자만큼이나 많이 거리에 깔렸지만, 시위를 방해하진 않았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정상회담이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지난 토요일 집회를 주도했던 극좌정당 지도자들은 엘리제궁에서 올랑드 대통령을 만나, 프랑스가 그리스 편에 서 줄 것을 당부하였다.

올랑드 대통령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리스 정부의 뜻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있다"고 이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밝혔다. 긴박한 순간, 기꺼이 좌파 정당지도자들을 맞이하여 최후의 의견을 수렴하는 대통령, 거리에서의 외침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힘을 다해, 프랑스의 역사적 정치적 위치를 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좌파지도자들. 어쩐지 우리에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광경이다.

시리자의 도전이 기울어져 가는 유럽의 지축을 뒤흔들어 새로운 길을 제시해 보일 것인지, 유럽연합 금융 마피아들의 압력에 굴복할 것인지 앞으로의 1주일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국 22일의 정상회담에서는 그리스의 새로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자리가 오는 24일 유로그룹(유럽재무장관협의체)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유럽의 좌파연대는 그리스를 지지하기 위한 활동을 27일까지 전방위에서 펼칠 계획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유럽연합, #그리스, #그렉시트, #디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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