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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산을 오르다 구멍 뚫린 돌들을 만났다.
 팔달산을 오르다 구멍 뚫린 돌들을 만났다.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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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편 기슭을 따라 팔달산을 오르다보면 지석묘를 볼 수 있다. 지석묘는 4기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묘를 큰 바위 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보아 팔달산에 고운 흙과 큰 바위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지석묘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성곽인 '서남각루'가 있고, 그 아래에도 큰 바위가 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바위에 나란히 뚫린 구멍의 비밀

산행에서 흘린 땀을 식히기 위해 드리워진 나무그늘, 바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다 보니, 잠시 상념에 잠기게 된다. 무아지경의 세계를 벗어나 일어서려는데 나란히 줄을 서 있는 구멍이 눈에 들어온다. 물이 고인 구멍은 간격과 크기가 일정하다. 순간 이 바위가 수원화성을 쌓을 때 사용된 재료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또 다른 바위에도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구멍들이 성 돌을 뜨기 위해 바위에 뚫은 흔적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팔달산의 성 돌 뜬 자리(부석소)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다.

수원화성 서남각루(팔달산) 남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경기도청 삼거리 위 50여 미터에 이르자 바위가 땅 속 흙을 비집고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일광욕이라도 하듯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즐기고 있다. 이곳 바윗돌들도 나란히 뚫린 구멍을 간직하고 있다. 그랬다. 팔달산에는 수원화성 건설을 위해 집단적으로 채석한 곳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많은 성 돌을 캤구나 하는 생각에 흔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수원화성 서쪽 '서삼치'와 '서포루' 사이 성 밖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곳에도 바위가 많다. 이곳 바위에는 돌 뜬 흔적, 바위에 난 구멍은 발견 할 수는 없지만, 바위의 생김새가 성 돌과 비슷하게 생겼다. 사각의 결이 분명하게 잡혀있다. 크기 또한 성 돌과 같은 모양새다.

이 돌은 다듬어 쌓기만 하면 성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팔달산은 수목이 울창한 산이다. 간간이 바위가 드러난 곳이 있지만, 대부분 흙으로 덮인 산이라 바위를 찾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흙속을 헤집고 땅속으로 조그만 내려가면 바위는 있을 것이고, 이곳에서 성 돌을 캐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성 돌들이 유난히 붉은 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붉은색을 띤 돌들은 약간 단단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지만, 오랜 세월 공기와 비바람에 산화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성 돌이 붉은색을 띤 것은, 팔달산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바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돌 뜬 자리에 남아 있는 바위들도 공기와 햇빛을 받아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바위가 붉은 색으로 변색되었다면 돌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붉은 돌은 수원 돌의 특징을 말해 는 것 같다. 수원 '화성'을 쌓기 위해 사용된 성 돌은 18만9400덩어리이다. 돌의 숫자에 포함된 돌은 성 돌을 받쳐주기 위한 작은 돌은 제외한 것으로 보이며, 이처럼 많은 돌을 당시의 기술로 정교하게 만들도 이동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8만9400덩어리의 돌은 팔달산에서 1만3000덩어리, 숙지산에서 8만1100덩어리, 여기산 6만2000덩어리, 권동(앵벌산으로 추정)에서 3만2000덩어리를 부석소(돌 뜬 곳, 채석장)에 캐낸 것이다. 여러 곳에서 생산한 돌은 치석소(돌을 크기에 맞게 다듬는 곳)에서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었다. 돌을 옮길(이동)때는 소가 모는 대거(大車: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평거(平車:소 4~8마리가 끄는 수레), 발거(發車:소 1마리가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동거(童車:장정 4인이 끄는 수레) 등이 사용되었다.

돌의 운반은 정조임금의 지시대로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한 치도(治道)를 통해 축성현장으로 옮겨와 성곽을 쌓았다"는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안내문이 수원 '화성'의 4대 성문 '화서문' 위쪽에 있다.

공사 실명제로 책임을 다했던 선조정신 본받아야

팔달산의 돌 뜬 흔적을 찾아 산을 한 바퀴 돌고 성문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화서문에 도착했다. 화서문은 '세계문화 유산'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지난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웅성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원 '화성' 성 돌을 쌓으면서 공사를 담당했던 감독관과 참여자의 실명을 기록한 것은 공사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수 백, 수 천 년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공역을 인정받겠다는 선조들의 정신은 엿볼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곳은 무사안일주의에 매료되어 부실에 대한 원인은 있는데 책임소재를 밝히지 못하는 총채적 부실 천국이라는 오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사회가 본받아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부석소와 치석소의 역사적 가치 정립해야

역사와 문화의 존재는 자연에서 시작되었다. 흙과 돌, 나무 등을 이용하여 움막을 짓고 생활해 왔다. 인류문명의 가치는 현존했던 생활상이 역사와 문화로 남아 숨 쉬고 있다. 세계문화 유산 수원 '화성'은 세계인 관심 속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성곽과 성문, 각루 등 현존하는 문화재를 관람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역사의 현장이 존재하게 된 배경, 그 기초적인 문화가치도 발굴하여 재현하는 것도 필요하다. 성은 흙으로 만들어진 토성과 돌을 다듬어 만든 석성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표적인 성은 돌로 만들진 석성이다.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거대한 중국의 만리장성이 석성이요,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이 석성이다. 이러한 석의 뿌리가 되었던 고향, 부석소를 알리고, 고향을 떠나 새롭게 태어난 치석소를 발굴하여 수원화성의 가치를 더 높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첨부파일
20150426_130752.jpg


태그:#부석소, #치석소, #수원화성 성 돌, #김연수, #팔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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