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알모라 가는 길
 알모라 가는 길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어이구…."

내니딸에서 알모라로 향하는 시골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운전기사 옆 엔진부분 짐받이에 3명의 승객들이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을 정도였다. 중간중간 승객을 태우며 버스가 두 시간쯤 달려올 무렵이었다. 내 입에서 한숨과 함께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댕기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인디언 아줌마의 엉덩이가 내 두 다리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 다리를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아줌마는 그 짐받이와 좌석 사이에 끼워놓은 내 배낭을 깔고 앉아 내 두 다리를 등받이처럼 기댔다.

'달려라 하니', 그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버스에 외국인은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나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맨 앞좌석에 앉았고 그녀는 반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 옆자리에는 인도 사내가 예닐곱 된 아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차멀미가 심한 아이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을 열고 심하게 구토를 했다. 결국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는 팔자에 없는 어린 아들 돌보듯 그 아이를 무릎에 앉혀야 했다.

아줌마가 깔고 앉은 무거운 '고행길'

 운전석 옆 짐받이에 세 사람이 엉덩이를 붙여야 할 정도로 혼잡한 만원 버스..
 운전석 옆 짐받이에 세 사람이 엉덩이를 붙여야 할 정도로 혼잡한 만원 버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내 배낭을 깔고 앉은 아줌마가 두 다리를 꼼짝 못하게 했다.
 내 배낭을 깔고 앉은 아줌마가 두 다리를 꼼짝 못하게 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시간이 흐를수록 두 다리가 저려 왔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없이 두 다리를 꼼지락거리는 게 전부였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투덜거리며, 아줌마에게 다리가 불편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나마 좌석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지만 내 배낭에 엉덩이를 겨우 걸치고 앉아 있는 아줌마는 나보다 훨씬 더 불편했을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버스 안의 승객들 대부분이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서로서로 큰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자신이 편하겠다고 시비를 걸며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버스안의 인도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에 익숙해 보였다. 때로는 불편함이 인내심과 배려심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렇게 버스 안 사람들은, 내게 자신만이 편하겠다는 마음은 이기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줬다.

아무리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해도 옴짝달싹 못하고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버스 안은 고행길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차창밖으로 수려한 풍경들이 끊임없이 다가왔다.
 버스 안은 고행길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차창밖으로 수려한 풍경들이 끊임없이 다가왔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마련이다. 불편을 감수한 대가가 있었다. 차창 사이로 다가오는 수려한 풍경들이 그 힘든 길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두 대의 차량이 겨우 빗겨 갈 수 있는 비포장 도로 옆으로, 물 맑은 계곡이 굽이쳐 흘렀다. 겹겹이 펼쳐져 있는 수려한 산세들이 눈앞으로 끊임없이 다가왔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달려 올 무렵, 멀리 히말라야 설산이 보일 듯 말 듯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아래로 겹겹이 이어져 있는 산세, 그 산비탈에 옹기종기 기대고 있는 소박한 집들과 어우러져 있는 다랑이 논밭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호반의 도시, 내니딸의 유럽풍 풍경이 아름다워 관광지로 손색없는 도시라 한다. 하지만 가공되지 않는 순수 자연의 풍경, '알모라 가는 길'이 나에게는 훨씬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내니딸에서 대략 4시간 정도 달려온 버스가 상가 건물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서 있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버스 차장이 '알모라'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알모라에 도착하면 히말라야 설산이 한 눈에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주변을 둘러봐도 히말라야 설산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는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길에 오르면 히말라야가 보이겠지'하고 기대를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외국인들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거기다가 묵직한 인도안내서가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들고 비탈길을 오르는 그녀의 낯빛이 무거워 보였다.

"가방 이리 주세요. 내가 들어줄게요."
"괜찮아요."
"무겁잖아요."
"에이 참, 괜찮다니까 왜 자꾸만 그러세요."

그녀는 화를 버럭 냈다. 그녀가 화를 낼 만했다. 나를 믿고 따라 온 리시케시나 내니딸, 거기다가 히말라야 설산이 보일 것이라 말해 줬던 알모라 역시 감탄사를 내지를 만큼의 도시는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여기가 아닌가봐'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숙소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남자를 따라왔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무작정 비탈길을 올라야 하는 게 무척이나 짜증스러웠을 것이었다.

우리는 숙소를 찾지 못하고 말없이 언덕을 넘었다. 오늘 아침 버스를 탄 후부터 내내 별 말이 없던 그녀였다. 며칠 더 함께 다니기로 했지만, 그녀가 버럭 화를 내는 순간 나는 속으로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다, 서로 갈 길을 가야 할 때가 왔구나' 싶었다.

나는 제대로 씻지 않아 꼬질꼬질한 옷에서 땀내가 풀풀 나는 남자였다. 값싼 숙소와 식당을 찾아다니며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인도 안내서를 펼쳐놓고 여기저기 재미꺼리나 풍물을 찾아나서는 것도 아닌 '어리바리'한 남자였다. 거기다가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인조차 쉽게 만날 수 없는 궁벽한 곳을 찾아다니며, 느릿느릿 시간을 죽였으니 속 터질 만큼 답답했을 것이다.

갈라진 행선지, 헤어질 때를 직감했다

힘겹게 언덕을 넘어 버스 종점 근처의 낡은 숙소를 잡았다. 각자 짐을 풀어놓고 내게 대마초를 권하는 숙소 관리자 청년에게 물었다.

"어디에 가면 히말라야 설산을 볼 수 있나요?"
"저 산 너머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청년은 숙소 베란다 저만치에 펼쳐져 있는 산을 손짓하며 말했다. 코사니에 가려면 저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힘겹게 입을 뗐다.

"여기서 히말라야도 안 보이고,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네요. 내일 곧장 코사니로 가야겠어요. 코사니에 가면 히말라야가 눈앞에 탁 트여있다는데…."
"거기서 얼마나 계실 건데요."
"맘에 들면 열흘 넘게 있으려고요."
"저는 귀국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냥 다람살라로 가야겠네요."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이제는 괜찮을 거 같아요. 다람살라에 가면 한국 분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니까."
"그럼 그렇게 하시죠. 괜히 제가 미안하네요. 여기까지 와서 히말라야도 볼 수 없고…."

 북인도 쿠마온 알모라 시장 골목. 우리네 오일장처럼 좌판을 펼쳐 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인도 쿠마온 알모라 시장 골목. 우리네 오일장처럼 좌판을 펼쳐 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할아버지가 다양한 채소 씨앗들을 펼쳐놓고 있다. 농가에서 채취한 씨앗들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다양한 채소 씨앗들을 펼쳐놓고 있다. 농가에서 채취한 씨앗들이라고 한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그녀와 숙소를 빠져나와 각자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골목 여기저기에 좌판을 펼쳐 놓고 있는 시장을 둘러봤다. 인도에 와 있는 동안 어느새 손톱이 길게 자라 있어 손톱 깎기를 구입했다. 과일 깎는 칼도 하나 골랐다.

시장 바닥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할아버지의 좌판에 펼쳐져 있는 씨앗들이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오래 전 우리네 오일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채소 씨앗들이었다. 상표가 없는 비닐 포장으로 보아, 적어도 종묘상의 씨앗은 아니었다. 씨앗 장수 할아버지와 손짓 발짓으로 알게 된 것인데, 농가에서 직접 '채취'한 씨앗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씨앗을 직접 받아 농사를 짓는 농가들이 거의 없다. 한국의 종묘상은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 불리는 외국 대기업에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이들 종묘상에서 내놓는 씨앗들은 거의 다 대를 잇지 못하는 유전자 조작 씨앗, 죽음의 씨앗들이다.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씨앗이라 할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생명은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된다. 10년 넘게, 대부분의 씨앗을 '받아' 농사를 지어 온 나로서는 할아버지의 씨앗 좌판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농사에서 손을 놓은 지 2년, 다락방에 숨죽이고 있을 씨앗들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힌두교와 불교 미술을 혼합해 놓은 듯한 문양들이 전시되어 있는 알모라 민속 박물관.
 힌두교와 불교 미술을 혼합해 놓은 듯한 문양들이 전시되어 있는 알모라 민속 박물관.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보통 만다라는 중앙에 부처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 문양은 힌두신, 난다데비를 모셨다.
 보통 만다라는 중앙에 부처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 문양은 힌두신, 난다데비를 모셨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시장에서 망고와 바나나를 사들고 숙소에 돌아와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인도 안내서에 따라 어느 박물관에 있단다. 그녀의 설명에 따라 박물관을 찾아갔다. 작은 민속 박물관에는 정교하게 조각한 16~17세기의 힌두신상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알모라 지방의 민속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힌두 조각상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힌두교 문양 '랑골리'(Rangoli)는 신에게 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인도의 종교 미술이다. 불교 미술의 만다라(Mandala)는 우주만물의 본질을 표현한다. 이 둘을 혼합해 놓은 듯 한 다양한 문양들이 눈길을 끌었다. 정확한 정보는 없었지만, 이곳 '쿠마온 알모라' 지역이 지리적으로 옛 티베트와 접하고 있어 이 문양에 힌두교와 티베트 불교가 혼합되어 있는 듯 보였다.

나중에 자료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흔히 북인도 히말라야 지역을 강가(갠지스 강)가 시작되는 '히말라야 가르왈'과 '히말라야 쿠마온'으로 나눈다. '쿠마온'의 중심 도시는 내니딸과 알모라인데, 알모라는 1560년대에 들어선 찬드 왕조의 수도였다고 한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나와 찬드 왕조 시대의 유일한 유적이라고 하는 난다데비 사원으로 향했다. 기쁨과 복을 안겨준다는 난다데비는 시바의 아내인 파르바티를 일컫는다. 인도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히말라야 산봉우리로 유명하다.

석탑이 준 고뇌, 그녀와의 마지막 포옹

 알모라 난다데비 사원의 석탑, 16세기 쿠마온 찬드왕조 시대에 지어진 왕실 사원이라고 한다.
 알모라 난다데비 사원의 석탑, 16세기 쿠마온 찬드왕조 시대에 지어진 왕실 사원이라고 한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석탑에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세 분류, 동물·인간·신의 세계로 나눠 놓고 있다
 석탑에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세 분류, 동물·인간·신의 세계로 나눠 놓고 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왕실 사원인 난다데비 사원에는 그 시대의 유물인 석탑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는 이 석탑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석탑에 새겨진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세 부류, 동물·인간·신의 세계로 나눠 놓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맨 아래 부분에는 탑을 떠받들고 있는 듯 보이는 코끼리를 비롯해 말·호랑이·뱀·물고기 등의 동물의 세계가 차례로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인간 세계, 그리고 힌두 신상이 서 있는 신들의 세계가 맨 위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삼지창을 들고 있는 신상은 시바 신,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신상이 바로 난다데비로 보인다.

이 탑에 새긴 조각 중에 특이한 것은 인간 세계를 상징하는 부분에 남녀의 노골적인 성교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인 쾌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조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음과 양은 천지만물을 운행하는 힘이다. 인간에게 기쁨과 복을 선사한다는 자비의 신, 난다데비는 힌두어로 '삭티',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힌두교에서는 '삭티'의 개념을 무엇보다 중요시 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힘은 하나이며 그 힘은 여성과 남성의 에너지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난다데비 사원의 기단에 새겨진 남녀의 성교 장면은 바로 생명을 잉태하는 힘, 천지만물을 운행하는 음과 양의 조화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단에 새겨진 남녀 교합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성적 쾌락 혹은 생명사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관점 중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선택은 내게 달려 있다. 

다음날 우리는 동이 터 오르기도 전인 이른 새벽부터 배낭을 꾸렸다. 다행히 델리로 가는 첫 차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알모라에서 부터 장장 12시간 걸리는 버스를 타고 델리에 도착해 다시 카주라호나 다람살라로 떠나야 하는 기나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의 어깨가 축 쳐져 보인다. 그녀는 '달려라 하니'처럼 패기 발랄했지만, 안으로는 이혼을 앞두고 있는 나만큼이나 말 못할 아픔이 많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아픔과 함께 하고자 했다. 자비의 어원이 '함께 상처를 나눈다'에 있듯이 누군가와 상처를 나누는 것은 동시에 내 상처를 보듬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나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상처를 나눌 만큼 자비심이 없었다. 자비심은커녕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로부터 입은 상처와 분노로 가득했었다. 내 안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면 오히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뿐이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옹을 했다. 그녀의 아픔이었는지 내 아픔이었는지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아픔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강한 몸으로 남은 일정 잘 보내세요."
"건강 잘 챙기세요…."

짧은 포옹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나 또한 곧바로 출발하는 코사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헤어졌다. 만남은 길어도 헤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알고 있었다. 열흘 동안 함께 다니면서 서로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함께 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인도(네팔 포함) 체류기간이 5개월 가까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보름 정도에 불과했다. 그녀는 짧은 여행기간 동안 좀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길을 나섰다. 애초에 내가 원하던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열흘 동안의 동행을 한 순간에 지워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콜까타 마더 테레사 '죽음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마치고 바라나시 화장터, 그 땡볕에서 넋을 놓고 살타는 냄새를 맡아가며 한 없이 앉아 있던 그녀, 인도 아이들과 티 없는 웃음으로 놀아주던 '달려라 하니'가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져 일주일쯤 지날 무렵 손전화기로 문자가 날아왔다. 자신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하니는 참 좋은 사람이다, 함께 한 시간들이 고마웠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