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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최참판댁 위쪽에 위치해 있다. 안에는 <토지>관련 자료들을 전시해두었다.
▲ 평사리 문학관 하동 최참판댁 위쪽에 위치해 있다. 안에는 <토지>관련 자료들을 전시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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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1926~2008)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토지>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간 연재된 대하소설 <토지>는 그녀의 중년과 노년을 함께 한 작품이다. 그녀의 글쓰기를 향한 집념은 서희가 토지를 되찾기까지의 집념을 떠올리게 한다.

<토지>는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한반도 내외라는 광범위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작이다. 또한 최참판댁의 토지 상실과 되찾기를 씨줄로, 거기서 파생된 다양한 인물들을 날줄로 삼아 다양한 사건을 엮어 나감으로써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다채로운 삶을 잘 보여준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복원한 동학혁명과 그 후

정읍 황토현 전적지 내에 있다. 당시의 시대상과 동학 관련 자료들을 잘 정리해 두었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관람하다 보면 저절로 동학 관련 공부가 된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 황토현 전적지 내에 있다. 당시의 시대상과 동학 관련 자료들을 잘 정리해 두었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관람하다 보면 저절로 동학 관련 공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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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동학'이다. 이 작품의 시작점인 1897년은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후일담이 시작되는 시기다. 이 작품은 역사책보다도 더 생생하게 동학 관련 역사를 잘 담아냈는데 이는 상상력으로 동학을 정확에 가깝게 발굴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동학 관련 인물로 주목할 만한 사람은 김개주이다. 그가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에 비극을 가져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핏줄인 김환과 김환을 따르는 무리가 작품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김개주는 '상민의 영웅', '살인귀', '피에 굶주린 이리 같은 위인' 등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김개주의 실제 모델은 동학혁명의 장수인 김개남이다.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박경리는 그를 세계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고 작품에서 되살려냈다.

동학은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와 서학에 반발한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한 것으로 인내천과 후천개벽을 그 핵심사상으로 한다.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과 천민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동학이 사교(邪敎)로 몰려 최제우가 죽고 나서도 최시형은 계속해 동학사상과 조직을 확고히 다졌고 이는 훗날 동학혁명의 발판이 된다.

정읍시 이평면사무소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동학농민군의 첫 집결지로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된 곳이다. 사진의 감나무 아래서 전봉준이 연설을 했다고 하는데 원래의 감나무는 2003년 고사되어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말목장터 정읍시 이평면사무소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동학농민군의 첫 집결지로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된 곳이다. 사진의 감나무 아래서 전봉준이 연설을 했다고 하는데 원래의 감나무는 2003년 고사되어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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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은 1894년 1월 10일 조병갑의 횡포에 반발한 고부 농민 봉기로 시작되었다. 이는 점차 확대되어 3월 1차 기포 후 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하여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파견되자 농민군은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집강소 체제에 돌입한다. 이때 전라우도는 전봉준에 의해, 전라좌도는 김개남에 의해 주도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횡포로 농민군은 9월 2차 기포하는데 이때는 북접도 함께 한다. 그러나 농민군은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때 김개남과 그의 부대는 독자적으로 청주병영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전봉준과 합류한다. 이후 농민군은 계속 남쪽으로 밀린다.

결국, 김개남은 태인에서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당하여 효수된다. 전봉준도 순창에서 부하 김경천의 집에 기거하다 그의 밀고로 잡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이로써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잔당들은 지리산 등으로 흩어진다.

김개남, 시대를 앞서간 자의 자화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에 위치해 있다. 효수 당시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1995년 4월 가묘를 만들었다.
▲ 김개남 가묘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에 위치해 있다. 효수 당시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1995년 4월 가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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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김개남은 전봉준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김기전의 <다시 쓰는 동학 농민혁명사>에서는 그가 정식 재판을 받지 못하고 붙잡힌 지 이틀 만에 효수되어 공초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로 인해 전봉준에게 동학혁명의 모든 책임을 씌워 재판한 공초 기록만 중요한 사료로 취급됐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김개남이 동학혁명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를 몇 가지 제시하는데 간추리면 이렇다. 첫째, 그는 재력가로 활동 반경이 넓었으며 동학에 일가친척을 많이 끌어들였다. 둘째, 그가 전봉준보다 빨리 동학에 입도하고 대접주로 임명되어 많은 동학교도를 동학혁명에 동원할 수 있었다.

셋째, 1891년 교주 최시형이 김개남의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천도교에도 없는 최시형과 손병희의 영정이 그의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넷째, 위험성 때문에 김개남만 전주에서 정신 재판도 없이 효수됐다.

한산사에서 내려다본 악양들판의 모습이다. 멀리 지리산 구제봉이, 오른쪽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동학농민군은 섬진강을 피로 물들이고, 그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숨어 든다.
▲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한산사에서 내려다본 악양들판의 모습이다. 멀리 지리산 구제봉이, 오른쪽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동학농민군은 섬진강을 피로 물들이고, 그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숨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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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에서는 동학혁명 당시 김개주가 최참판댁을 거쳐 간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약간 각색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람은 김개남이 아닌 그의 오른팔 금구 김인배 대접주였기 때문이다. 김인배는 하동과 섬진강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뒤로 갈수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 '섬진강 강가 송림의 흰 모래가 선혈로서 붉게 물들었었다고들 했다'는 구절은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품 속의 김개주처럼 역사 속의 김개남도 동학혁명 장수 중 가장 과격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는 그가 천민부대를 이끈 것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양반에 대한 반감이 강했고 양반들에게 많은 횡포를 부렸다.

그래서인지 황현의 <오하기문>에서도 김개남을 '사납고 무단스러운 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가 죽은 후 양반들이 다투어 그의 내장을 씹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정식 재판 없이 이틀 만에 효수된 것도 양반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토지>에서 김개주의 형인 우관선사가 주지로 있는 절로 나온다.
▲ 지리산 연곡사 <토지>에서 김개주의 형인 우관선사가 주지로 있는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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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에 대한 평가에는 그의 과격한 행위와 철저한 반봉건주의도 한몫한다. 그는 수령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목을 내리쳤고, 전주화약 당시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학혁명의 중요한 순간에 주요 노선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갔다. 이는 김개남의 현실인식이 주류와 달랐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근왕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김개남은 그보다 진일보한 혁명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김개남이 자신의 이름을 기범에서 '남쪽에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뜻의 개남(開南)으로 바꾼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김개남의 반봉건적 사상이야말로 근대시민사회로 가는 발상의 전환이라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토지>에서도 농민군에 대해 '생리적으로 수구파다. 수만 동학이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시초부터 그들은 인륜도덕을 강렬하게 내포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기치는 위국진충이며 소파왜양이었던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작가의 이러한 인식은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평가할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주로 최참판댁의 소작농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용이, 영팔이 등 작품 속에 비중 있는 인물들의 집이 있다.
▲ <토지> 속 평사리의 모습 주로 최참판댁의 소작농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용이, 영팔이 등 작품 속에 비중 있는 인물들의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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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은 참 독특한 인물이다. 당시 향반으로 45마지기의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동학에 입도하고 혁명에 앞장섰다. 그는 그 시대의 선각자였다. 혁명이 실패한 후 김개남의 집안은 도강 김씨라는 성마저 버리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했다. 하지만 역사란 참으로 얄궂어서 이제는 이곳 저곳에 그를 위한 비가 세워지고, 길이 만들어진다. 시대에 앞서 나갔던 이의 비극적이지만 찬란한 결말이다.

최근 정당 대표의 전직 대통령 묘지 참배가 문제가 됐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 정작 참배 받아야 할 이가 누구인가. 아직도 시체가 수습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무명의 농민군에게 참배가 필요한 시기다.

박경리의 <토지>에는 피가 서려 있다. 토지에 서린 피를 안다면 그 공간은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사라져도, 토지에 서린 피는 남는다. 그 땅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주로 별당아씨와 서희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나온다.
▲ 최참판댁 별당 주로 별당아씨와 서희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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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tip]

하동에는 <토지> 관련 볼거리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드라마 촬영지로 쓰였던 최참판댁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쪽에 평사리 문학관이 있다. 조금만 더 가서 한산사에 오르면 지리산과 섬진강을 비롯해 작품의 배경이 된 평사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최참판댁에서 구제봉을 마주봤을 때 오른쪽으로는 평사리공원이, 왼쪽으로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인 조씨 고가가 있다.

<토지>에는 하동과 구례에 있는 절들도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곳은 우관선사가 주지로 있던 연곡사, 김개주가 윤씨부인을 겁탈했던 천은사, 그밖에 쌍계사가 있다. 모두 지리산을 끼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기에 여행하기에 좋다. 

덧붙이는 글 | 2월 12일 정읍, 2월 20일 하동에 다녀와서 쓴 기행입니다.



태그:#박경리, #토지, #김개남, #하동, #평사리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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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아, 하지만 그냥 있을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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